소설리스트

100화 (10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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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비안느가 짧게나마 겪은 콜트 부처의 환대는 편지 한 장에 고스란히 담겼다.

    에드문드는 그 편지를 받아 챙긴 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저와 함께 메르고빌 후작저로 향하고자 했다. 그렇게 그와 후작저로 돌아오니, 그가 이곳에 처음으로 결혼 허락을 받으러 왔을 때가 떠올랐다.

    그가 지난밤 침대에서 우악스럽게 자신을 괴롭혀, 단정하게 걷는 게 힘들다는 점. 손에 자분홍빛 다이아가 끼워져 있는 점이 닮았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에드문드가 가문으로부터 결혼 허락을 받아 왔다는 건 그때와 달랐다.

    아버지가 에드문드를 사윗감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가, 가문 간 결합이 힘들 거라는 걸 생각해 봤을 때 이건 정말 큰 변화였다.

    “알다시피 우리 가문과 자네의 가문은 엮일 수 없지 않겠는가? 마음은 이해하네만 허락은 해 줄 수 없네.”

    아버지는 귀족 의원 자리를 되찾기 위해, 가문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렉스가와의 혼약을 성사시키려 그토록 집착했으나 정작 그 문제를 해결한 건 뤼드빅이 아니었다. 이제 아버지가 의지할 수 있는 건, 가문의 협조를 등에 업은 에드문드뿐이었다.

    메르고빌과 콜트. 두 가문의 정치적 노선이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 봤을 때 콜트 가의 협조는 아주 큰 변화였다.

    “그나저나, 그 얘기 뭐였어요?”

    비비안느는 메르고빌 저택 응접실로 향하는 길에 에드문드에게 작게 물었다.

    “아까 수상 관저에서 혼자 통화하실 때, 다트첼가의 클럽에 무슨 정보를 푼 걸 이야기하시던데.”

    “아무것도 아니야.”

    그의 사업에 관한 것이려니 하고 비비안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부탁할 게 있다며 아까 수상 각하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신 건 또 뭐고요?”

    “그것도 별 건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알았어요.”

    그 짧은 대화가 끝났을 때는, 어느새 후작저의 응접실 앞이었다.

    문이 열리자 후작 부처의 모습이 보였다. 저희가 온다는 소식을 미리 전화로 전해 듣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에드문드는 긴 말을 하지 않고, 후작에게 가져온 편지를 건넸다.

    후작의 매서운 시선이 잠시 비비안느 쪽으로 향했다. 그 숨 막히는 순간은 에드문드의 목소리 때문에 오래 가지 않았다.

    “어서 읽어 보시지요, 아버님.”

    “이제는 어르신도 아니라 아버님이라 부르는 겐가.”

    “장인어른이라는 호칭이 더 좋다면 정정하겠습니다.”

    “…….”

    “그나저나 예전에 만나 뵈었을 때는 옆에서 한마디 거들던 건방진 치가 있었는데, 지금은 안 보여서 다행이군요.”

    “교도소에서 사형 집행 대기 중이라지, 덕분에. 물어봐 줘서 고맙네.”

    “그렇습니까. 그래도 더는 못 들으실 장인어른 소리를 듣게 해 드릴 사윗감이 여기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

    “그때는 두 명이었던 구혼자가 이제는 저 한 명밖에 남지 않긴 해도 말입니다.”

    후작은 더 할 말이 없는지 에드문드가 건넨 편지를 받아 가만히 읽어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후작이 후작 부인에게 편지를 넘길 때 에드문드가 입을 열었다.

    “제 부모님께서 레이디 메르고빌과의 혼약을 허락한다는 편지입니다. 두 분을 곧 만나 뵙고자 하신다고 전하시더군요.”

    “그래. 내 자네에게 가문의 허락을 받아 오라 했었지, 콜트 백작. 하나….”

    “이제는 콜트 공작입니다, 후작 각하.”

    “그래, 공작. 이어서 말하겠네. 하나, 렉스 의장은 내 오랜 벗이었네.”

    후작은 넌지시 거절의 의사를 표하려 했지만, 에드문드는 그가 말을 마치게 두지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에드문드가 정중함을 가장하며 은근히 선을 넘어 비위가 상했는지, 후작은 미간을 구겼다.

    그때 에드문드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노튼 백작께서도 후작 각하의 오랜 벗이라는 걸 알고 있지요.”

    비비안느는 놀라서 에드문드를 훑었다.

    노튼 백작은 아버지가 여러 은행 다음으로 가장 큰 빚을 진 상대였다. 이 저택에서 그자에 대해 논하는 건 금기였다. 아버지가 그자를 상대로 가장의 위엄을 갖추지 못하는 모습을 일종의 치부로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에드문드는 그따위 문제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이었다.

    “렉스 의장을 잃으셨으니, 남은 벗마저 잃고 싶지는 않으실 것 아닙니까.”

    후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을 때 에드문드가 책상 위에 다른 봉투를 꺼내어 놓았다.

    “아까 건 제 부모님께서 사돈 될 이에게 드리는 편지였고, 이건 제가 드리는 겁니다.”

    비비안느는 아버지의 손이 분노로 떨리는 걸 처음 보았다. 후작은 그 손으로 봉투를 집어 들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수표였다.

    에드문드는 오랜 경험을 통해 저 같은 부류가 없는 처지에 적선을 받는 걸 즐기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드러내 놓고 돈을 건네는 걸 보면, 아주 정중한 방식으로 후작을 망신 주겠다는 의도였다. 에드문드의 눈빛이 반짝였다.

    “따님의 결혼은 돈 문제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액수로 가문의 빚 정도는 깨끗하게 갚으실 수 있을 겁니다.”

    “…….”

    “제가 가벼운 마음으로 메르고빌 영애를 만나는 게 아닌 건 부모님의 편지를 통해 이만 전달드렸고, 제가 번지르르한 말만 늘어놓는 건 아니라는 걸 제 성의로 보여드렸습니다.”

    “…….”

    “그러면 장인어른께서는 약혼 계약 또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걸 손수 보여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에드문드가 첫 번째로 결혼 허락을 맡으러 왔을 때 그는 지금과 같은 말을 했었다.

    “그러면 장인어른께서는 계약 또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걸 목격하시겠군요.”

    후작 부인은 수표를 확인하더니 잠시 놀란 얼굴을 했다가 표정을 급히 감추었다.

    후작은 받아들이고는 싶지만 자존심이 상한 모양인지 말을 아꼈다. 결국 체면치레가 이겼다. 후작이 수표가 담긴 봉투를 다시 에드문드에게 건네며 말했다.

    “자네….”

    “알겠습니다.”

    에드문드도 밀리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버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마음이 열릴 때까지 제가 얼마나 쓸 만한 신랑감인지 더 보여드리는 수밖에요.”

    그 말에 후작의 붉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역시 에드문드의 선물은 거절당했으나, 그는 이 상황을 예상했기에 여유로웠다. 그는 제가 한 말마따나 수표 따위보다 더한 걸 후작에게 줄 자신이 있었다.

    메르고빌 가로 향하기 전, 에드문드는 총리 관저 응접실에서 잠시 자리를 비웠었다. 비비안느가 말한 대로였다.

    “그나저나, 그 얘기 뭐였어요? 아까 수상 관저에서 혼자 통화하실 때, 다트첼가의 클럽에 무슨 정보를 푼 걸 이야기하시던데.”

    비비안느가 저를 뒤따라와 통화 내용을 살짝 듣게 된 건 예상 밖이었으나, 상관없었다. 그녀는 제가 어젯밤 사람을 써 다트첼가의 클럽에 풀었다는 정보의 내용은 모르는 듯했으므로.

    그 정보란 곧 경시청에 대대적인 인사 교체가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그걸 들은 이들 중에는 후작에게 돈을 빌려준 노튼 백작이 있었다.

    그는 그 소식을 통해 라이너스 메르고빌이 면직될지도 모른다는 것. 따라서 메르고빌가의 안정적인 수입원이 곧 사라질 거라는 사실을 유추했을 것이다. 후작에게 돈을 돌려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강박으로 이어졌겠지.

    바람잡이 몇을 시키니 노튼 백작은 마치 세뇌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당장에라도 메르고빌 후작에게서 돈을 받아 내야 한다고 믿게 되었으리라.

    제 예상이 맞다면 노튼 백작은 오늘 아침쯤 메르고빌 후작을 찾아가 빚을 한꺼번에 상환해 달라 요구했을 거고.

    그러니 이때 제가 미래 장인어른께 건넨 수표는 사막에서 찾은 오아시스보다 더 다디달았을 텐데.

    후작은 그걸 제 손에 돌려주었다.

    그래도 이런 상황을 대비해 손을 써 두었지 않았나?

    “그러면 부탁할 게 있다며 아까 수상 각하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신 건 또 뭐고요?”

    비비안느가 말했던 대로, 통화를 마친 에드문드는 아버지와 잠시 독대할 시간을 마련했다. 그리고 아버지께 부탁을 했다.

    조금 무리한 부탁이었다지만 상관없었다. 제 완고한 장인어른께 특별한 선물을 드리기 위해서라면 뭔들 못할까.

    그러니 아마도 지금쯤이면 아버지가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다아트로 사회 복지 재단의 이사장으로서 산하 병원들에 방문할 때일 테니,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 함께 차를 타고 가고 있겠지.

    에드문드는 잠자코 그들에게서 소식이 들려오기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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