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114)
  • ❖ ❖ ❖

    결국 낯을 붉히는 건 비비안느뿐이었다. 사용인들은 오히려 비비안느를 새 안주인으로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기색이었다. 낯을 가리던 그녀는 결국 루이제의 손에 이끌려 저택의 가정부(housekeeper)와 집사 그리고 주방의 실세부터 그녀를 보조하는 사용인까지 만나 본 다음에서야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금방 새 안주인이 되겠다지만 선대 공작 부부에 대한 예의는 차리고 싶어서 그들에게 아침 인사를 하러 가려던 차에,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공작 부처가 당장 다른 영지에 있는 별장으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비비안느는 공작저의 현관에서 선대 공작 부처의 리무진이 떠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대한 차량이 어찌나 빠르게 달려 나가던지, 꼭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 모양새였다.

    ‘인사 정도는 나누고 가도 좋았을 텐데.’

    그게 저 때문이 아니라 제 옆으로 천천히 다가온 남자 때문이라는 건 꿈에도 모른 채, 비비안느는 서운한 감정을 애써 감추어야 했다.

    “비비안느.”

    낮은 목소리와 함께 비비안느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에드문드가 그녀의 허리를 감으며 다가와 이마에 입을 쪽 맞추었다. 입술이 볼에 닿을 때 그녀가 살짝 눈을 감는 것마저 그는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피로하다면서. 그대로 방에 있지, 왜.”

    고작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로 이토록 접촉이 자연스러워졌다는 게 낯간지러웠다. 그녀는 공작 부처에게 거절당한 일에 위로라도 받으려는 양 그의 쪽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이젠 괜찮아요. 루이제가 손수 마사지도 해 주고 근육통에 좋은 차도 끓여 줬으니까요.”

    에드문드는 어젯밤 그녀를 한계까지 집요하게 몰아붙였다. 그 이후 근육통과 아랫배의 쓰라림은 그녀의 몫이 되었다.

    그랬는데도 그가 오늘 아침에마저 부르튼 입술을 머금어 오자 그녀는 피로하다며 자리를 옮기려 했다. 그의 손이 도망치려는 그녀를 잡아 여러 차례 그의 옆에 눕힌 이후로, 그는 그녀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총리 관저로 돌아갈까.”

    이를테면 한층 정중해진 저 말투라든가. 비비안느는 하루 만에 그곳으로 바로 돌아가는 게 의아해져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무슨 일로요?”

    “어머니가 그곳에서 아버지와 함께 기다리고 계시다는 연락을 받았어. 두 분 만나 뵙고 나서 후작 부처께 인사드려야지.”

    “아.”

    “공작저 사용인들이랑 어울리느라 바쁜 건 알아도, 네가 이곳의 정식 안주인이 되려면 제대로 된 절차부터 밟는 게 우선이니까.”

    “네. 그럼요.”

    주방 사용인들과 친해진 기억을 떠올려 상기되었던 비비안느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아 있었다. 에드문드가 앞서 저택으로 향하다 나직이 물어왔다.

    “걱정돼?”

    “그냥 제가 당신 부모님을 기다리게 해 드렸을까 봐 조금요.”

    “그게 다는 아닐 텐데.”

    “다예요.”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네.”

    비비안느는 그의 옆에서 걸으며 내밀한 속내를 숨겼다.

    만일 콜트 부인이 마음을 바꿔 저를 며느리로 들이지 않겠다 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에드문드는 약속을 지켜서 어머니를 설득해 주겠지만 그럴 때까지 불편한 상황이 한동안 이어지긴 하겠지.’

    렉스 부인과 선대 세노윅 공작 부인을 거치며 귀부인들의 날 선 태도는 많이 겪어 봤지만, 그렇다고 거절이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시부모님이 될 사람들을 만난다고 하니 이토록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보아 그런 모양이었다.

    “내 어머니는 외숙부와는 다른 분이야.”

    그녀의 걱정을 눈치챈 듯 에드문드가 잔뜩 긴장한 비비안느의 옆얼굴을 훑고는 말했다.

    “우리 애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어도 내 어머니를 닮은 자유로운 사람으로 컸으면 한다며.”

    그 말에 비비안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와 초야를 보내고 나서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려면 내 어머니를 만나 보는 게 좋겠지.”

    “맞아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강한 분이시지만, 모두를 상대로 그런 분은 아니시니까.”

    “…….”

    “오히려 내 여자라 그러면 흠을 잡기보다 궁금해하실 거야.”

    그가 잡아 준 손은 그가 한 말만큼 따뜻했다. 비비안느는 그의 말이 옳았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아니, 이렇게 일찍 떠나신다고요?”

    새 주인 내외가 제도로 떠난다는 소식에 가장 격렬하게 반응한 건 저택의 시녀장 루이제였다. 공작저 현관에 막 들어온 에드문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디 메르고빌께서는 귀족 아가씨이지 않습니까, 루이제. 메르고빌 후작 부처께 허락을 받아야 하루빨리 내 아내로 맞을 수 있겠지요.”

    아무리 점잖게 말했어도 ‘결혼을 빨리 하고 싶다’라는 말이었다. 그와 그녀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더는 없게 하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읽혔다.

    비비안느는 어제 마구 보관실에서 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직 부모님께서 결혼을 허락해 준 적 없다는 게 신경 쓰인다고 했었는데.’

    그가 제가 한 말을 일일이 다 기억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설레기도 했다.

    앞으로는 달라지겠다고 말한 뒤의 그는, 매 순간이 숨 막히게 근사했다.

    “그래서 상견례 날짜를 논의하기 위해 총리 관저에 들렀다 메르고빌 후작저에 갈 생각입니다. 운전 기사에게 차를 현관에 준비해 두라 전해 주겠습니까?”

    “예. 그럼요.”

    루이제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돌아 멀어졌다.

    “이 저택 사람들은 네가 떠나는 게 벌써부터 아쉬운 모양인데.”

    그 모습을 본 에드문드가 고개를 숙여 비비안느에게 속삭였다. 비비안느는 귀가 간지럽다는 걸 느끼며 고개를 들어 그를 흘긋 보았다.

    포마드로 잘 정돈한 머리칼이나, 그 아래로 보이는 완벽한 이마와 수려한 이목구비. 남자다운 턱선이 잠시 그녀를 홀렸다. 거기다 저보다 훌쩍 큰 몸집과 단단한 어깨가 의식되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여러 차례 깜박인 다음 고개를 휙 돌렸다. 목청을 고르고는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입을 열었다.

    “…당신 여자니까요.”

    그만큼 공작저 사람들이 매력적인 그를 잘 따르고, 자신은 그저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이니까 잘 모시려는 거라는 겸양이었는데.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낮게 웃었다. 가만, 이 남자가 이렇게 잘 웃는 사람이었나. 비비안느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고개를 기울여 짧게 입술을 머금는 버드 키스를 했다.

    “그래. 네가 내 여자 맞지.”

    그것만 들렸다는 태도였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비비안느는 뇌가 그의 체향과 특유의 타바코 향기에 절여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위험한 사람이라서, 그를 좋아해도 되는지 그에게 묻자 이런 방식으로 답을 해 주었다. 표현을 해 주었다. 그가 정말 악명높은 암흑가 보스가 맞는지 의아할 정도로 말이다.

    거기다 결혼은 비단 두 사람만이 아닌, 두 가족이 합쳐지는 거라고 하던데. 그가 속한 세계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에드문드 덕분에 콜트 내외를 만난다는 것에 대한 감정은 어느새 두려움에서 미약한 기대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