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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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시각, 비비안느는 에드문드의 권유에 따라 그와 단둘이 공작저의 정원을 걸었다. 적막 속에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그녀였다.

    “…이제는 공작님이라 불러드려야 하겠네요.”

    그녀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곧 부드러운 시선이 닿아 오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나는 널 뭐라고 부를까.”

    비비안느의 선택에 따라, 그는 그녀를 깍듯이 존대하기로 했었으나 단둘이 있을 때는 옛 버릇이 튀어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를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어떻게 말하든 애정이 담긴 감미로운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욱 정중해 보였다. 거기다 그가 공적인 자리에서 존대를 쓸 때는 미묘하게 벽을 치는 느낌이 들어 그 거리감을 조금이라도 더 좁히고 싶었던 마음도 한몫했다.

    “공작 부인?”

    그저 농담하듯 가볍게 물어 오는 것이었는데도 비비안느는 마음이 다 간질간질했다.

    그때 그가 손을 슬쩍 잡아 왔다.

    시선을 땅으로 옮기며 아직은 기대하기 이르다며 되뇌어도 마음이 붕 뜨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장난치지 말고 단둘이 할 말이라는 것부터 해 주세요.”

    “그게 할 말입니다만, 공작 부인.”

    장난치지 말라고 했더니, 하지 말라는 건 또 잘했다. 저 남자가 못하는 게 뭐가 있겠냐만.

    “뭐가요.”

    그러다 비비안느는 자리에 멈춰서서 미심쩍은 눈으로 에드문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아까 그게 청혼이라고 하시지는 않겠죠.”

    “맞다면.”

    그러고서는 에드문드가 눈앞의 거대한 분수를 턱짓으로 가리키는 것 아닌가.

    비비안느는 분수대 앞에 무어라도 있나 싶어서 그 앞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가,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는 그의 농담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분수대에 앉았다.

    자신을 놀리다니 저 남자는 정말 나쁜 성미의 소유자인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어느새 제 앞으로 다가온 오만한 치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설마 구두끈을 묶어 달라는 건가….’

    그는 무릎을 꿇어도 누구에게 명령을 내리기 위해 할 것 같았다.

    비비안느가 시선을 내려 사내의 구둣발을 바라보았을 때쯤, 그의 품속을 뒤지던 손이 무언가를 꺼냈다. 사내의 손이 그 작은 상자의 뚜껑을 열었을 때서야 비비안느는 그가 무얼 하고 있는 건지 파악했다.

    ‘……!’

    보석 상자 안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것은 제가 그에게 돌려주었던 자분홍색 다이아 반지였다. 비비안느의 시선이 급히 그와 반지를 훑었을 때 그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비비안느 메르고빌.”

    설마.

    “…세노윅 영지의 공작 부인이자 콜트 부인, 그리고 내 아내가 되어 주겠습니까?”

    숨이 멎는 것 같고 세상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는 정말 이 순간만을 위해 그의 정체를 수상에게 드러내고, 샹프니야에서 저를 구했으며 약속대로 공작이 되었다. 거기다 제 걱정이 무색하게끔 다정한 말들을 건네고 그토록 부드럽게 저를 품어 오지 않았나.

    이쯤이면 절 죽이려 했던 남자를 믿어도 된다고. 그가 저를 다치게 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비비안느는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이제는 편해지자고.

    “저는….”

    그 어느 때와 같이 자신만만하던 에드문드의 표정에 균열이 생겼다.

    “공작님, 저는….”

    “비비안느.”

    “공작님께서 제게 해 주신 일은 정말 감사하고, 아뇨. 제가 거절하려는 게 아니라….”

    “…….”

    “네! 좋아요. 좋은데….”

    걱정이 되어서.

    당신 같은 남자랑 결혼하는 게. 마음 깊이 가라앉은 아주 작디작은 의심마저 거두고 자유로워지는 게. 마음껏 당신을 예전처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그리는 게, 모두.

    “좋아해요, 공작님. 정말이에요.”

    “…….”

    “그런데 제게는 너무 급작스러워서요. 공작님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안 것도 어제였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공작님을 좋아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에드문드 당신을.”

    평생 같은 찰나가 지나고 에드문드가 초조하게 제 표정을 살피자, 비비안느는 눈을 도르르 굴리며 말했다.

    “아, 일단 반지는 끼워 주시겠어요?”

    그는 뭐가 그리 귀엽고 웃긴지 삐딱한 미소를 지으며 다이아 반지를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그가 무릎 꿇은 그대로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자 분수대 아래로 비비안느의 구두가 기분 좋게 흔들거렸다.

    “고마워요.”

    “곧 나는 네 남편이 되겠군.”

    에드문드는 비비안느와는 달리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남편. 그 말을 그의 입을 통해 듣는 게 참 좋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비비안느는 제 손을 쥐고 있는 그의 손가락 끝이 참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손이 닿은 곳보다도 더 뜨거워 녹아내릴 것 같은 시선이 저를 담았다.

    “잠들지 못하는 새벽에도, 네가 샹프니야로 떠났을 때도 이 순간만을 그렸어.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이렇게 날 바라봐 주고, 다시 날 사랑해 준다면 못할 게 없어.”

    “…….”

    “널 잃을 뻔하고야 내가 몰랐던 내 짝사랑이, 네가 날 봐 줬다는 게 얼마나 값진지 알았으니까.”

    “…….”

    “좋아해. 네가 신경 쓰여. 사랑해, 비비안느 메르고빌.”

    그는 애원하며 제 무릎에 머리를 묻었다. 비비안느는 그 뜻밖의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조심스레 그의 넓고 단단한 어깨를 손으로 쓸어 보았다. 그러고는 도리어 제가 위로라도 건네는 양 어깨를 살짝 톡톡 두드려 주었다. 그가 답례로 그녀의 무릎에 끊임없는 키스를 퍼부었다.

    “고마워.”

    이상했다.

    고맙다는 말은 통념상 그토록 많은 걸 내어 주겠다고 하는 그보다, 제가 하는 게 맞을 텐데. 그런데 그가 제게 고맙다고 말하고 있었다. 결혼해 주어서. 그의 아내가 되어 주어서.

    “날 용서해 줘서. 받아 줘서.”

    그 말을 마치고 그가 사죄하듯 제게 부드럽게 키스해 왔다.

    버드 키스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더운 숨결이 밤공기에 섞일 때 에드문드가 말을 이었다.

    “네가 날 좋아해도 되는지 증명할 시간을 주지 않겠어?”

    비비안느는 대답 대신 그의 넥타이가 목줄이라도 되듯 끌어당기며 그의 숨을 다시 한번 받아먹었다. 그러고는 야외의 공기에 물든 그의 목덜미를 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는 그의 숨이 유독 거칠어지는 순간이었다.

    침입자의 살덩어리를 혀끝으로 훑어 내며 그녀는 생각했다.

    이 순간이 너무나도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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