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14)

❖ ❖ ❖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

처음에 그건 공작가 사람들의 적의였으나, 이제는 제가 모르는 에드문드의 과거였다.

응접실에서 걸어 나왔어도 비비안느의 생각은 공작이 한 말에서 멈추어 있었다.

“뭐, 그래. 킹슬리 말대로, 네가 학창 시절에 만났다던 평민 여자보다야 낫겠지.”

이곳에서의 첫 방문 때 킹슬리가 만찬회의 식탁에서 했던 말이 이어 떠올랐다.

“그나저나 의외네. 네가 해밀턴 스쿨을 다닐 때도, 알프레드 황립 대학을 다닐 때도 줄곧 여자가 있지 않았나?”

듣기 싫은 거들먹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이어졌다.

“그 여자들은 한 번도 식사 자리에 데려온 적 없었잖아. 전부 평민이라서 그랬나?”

듣기로 에드문드가 학창 시절 동안 만난 여자들은 다 평민이었다는데, 일단 귀족적이지 않다는 데서 저와는 정반대인 유형이라 왠지 의식이 되었다.

‘뤼드빅이 만났던 정부들이 모두 나와는 다르게 금발이라는 걸 생각했을 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에드문드의 옆얼굴을 흘긋 바라보았을 때 그가 손님방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에드문드를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나네.’

그녀가 자동차 상석 옆에 잠자코 서서 사람을 기다렸을 때, 에드문드는 스스로 자동차 문도 못 여냐는 듯 응수했었다. 새삼 그가 많이 달라졌다는 건 둘째 치고, 그가 저 같은 부류를 사귀지 않았다는 게 자명해졌다.

그러고 보니 그를 처음 만난 밤 그런 대화를 나누긴 했었다.

“백작 각하께서는 꼭 제 부류가 아닌 사람처럼 이야기하시네요. 한 번도 위선적인 상류 사회에 발 들인 적도 없는 깨끗한 사람인 것처럼 절 비웃고.”

“어떤지 모르지는 않습니다.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이러한 삶에 대한 그의 평가였으리라. 비비안느가 에드문드를 흘긋 살피며 방 안으로 들어가자, 그가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왜 따라 들어오시는 거죠?”

이유를 알면서도 그녀는 괜히 낯간지러워서 그에게 물었다.

“…레이디께서 고민이 있으신 것 같아서.”

불을 켜지 않아서 어둠 속의 그림자로만 그의 낯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자 시각이 차단되는 대신 예민해진 후각이 그를 감지했다.

손등이 조심스레 뺨을 스치고 내리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내가 그걸 해결해 드릴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믿음 때문에 그랬습니다만, 불편하십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말을 높이세요, 백작님? 답지 않게.”

“네가 내 아내가 된다고 하니 더 귀하게 대해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였나.”

“…….”

“싫으면 계속 이렇게 말하고. 결혼하려면 이런 것도 조율해야 되는 것 아닌가?”

이상했다. 그의 입 밖으로 ‘결혼’이라는 말과 ‘아내’라는 말이 나오니 기존의 고민들은 점차 희미해져 가기만 한다는 게.

“귀족 영애님께서 편하신 대로 하시지요.”

그가 자비롭게 그녀에게 고를 수 있게 해 주자, 괜히 ‘귀족 영애’라는 단어에 꽂힌 비비안느가 말했다.

“백작님께서 기존에 만나셨던 평민 여자들은 어느 쪽을 골랐는데요?”

“…….”

“아무리 절차를 지켜 주겠다고 약조하셨다 해도 저 혼자 그중에서 튀는 건 싫으니까요. 생각해 보니 귀족 영애라고 너무 고상 떠는 건 당신 취향이 아닐 것 같기도 했고.”

“예. 취향이 아니었습니다만.”

그 말에 비비안느가 그의 구두코로 시선을 돌리자 에드문드가 그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와 말했다.

“…보다 보니 어떤 레이디는 뼛속까지 귀족 영애인데도 외면할 수 없게 귀여운 것 같아서.”

그녀가 질투하는 게 귀엽다는 듯, 그의 말에는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귀족이라는 게 이곳 영지에서 봤던 젠체하는 작자들이 아니라, 영애 같은 거라면 얼마나 고상을 떨든 취향일 것 같습니다.”

‘영애 같은 거’는 또 뭐람.

비비안느는 툴툴대고 싶으면서도 그가 그 말을 꽤 사랑스럽게 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존대하는 쪽이 낫습니까. 아니면 말을 편하게 하는 게 나으려나.”

“…….”

“네가 골라야지. 내 부인이 될 사람이니까.”

“…….”

“말 그대로 넌 내 취향을 바꿔 놓은 사람이고, 허례허식에 둘러싸인 상류층에 치를 떨던 나한테도 귀족의 품위라는 게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 사람이기도 하잖아.”

“…….”

“모르겠으면 내가 침대에서 하는 걸 보고 결정해도 되고.”

그 말과 동시에 에드문드가 비비안느를 번쩍 들어 올렸다.

시야가 뒤바뀌어 그의 얼굴 너머로 침대의 캐노피가 보이자, 비비안느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공작께선 수상 각하와는 달리 저희 사이를 허락해 주시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비비안느는 그와 겨우 시선을 맞추고는 말했다.

“그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에드문드가 이마에 입을 맞춰 주고는 산뜻하게 침대에서 내려가 말을 이었다.

“내일쯤 되면 자연히 생각을 바꾸실 테니.”

그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오늘 피로하셨을 텐데, 그럼 이만 안녕히 주무시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가 등을 돌려 방에서 걸어 나갔기에,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세노윅 공작은 에드문드와 비비안느, 두 사람이 응접실을 걸어 나간 뒤에 한참이나 못마땅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쓴 입은 버터 스카치로도 달랠 수 없었다.

“난 이만 방으로 돌아가려 해요.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으면 더 있다 천천히 오세요.”

공작 부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광활한 응접실에 홀로 남겨진 공작은 무료한 얼굴로 진홍색 벽에 걸린 크고 작은 그림들을 슥 훑어보았다.

그림 속 수많은 눈을 무료하게 훑던 그는 크리스털 잔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그림 속에 지금보다 한참 더 젊은 자신이 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아기는 제 자랑스러운 조카, 에드문드의 어릴 적 모습이었다.

‘…녀석이 벌써 저렇게 컸단 말이지.’

그 긴 시간 동안 제가 제 조카를 얼마나 살뜰히 챙겼는가.

그리고 녀석은 얼마나 저를 잘 따랐는가.

에드문드는 어미를 닮은 반골 기질만 빼면 꼭 그에게는 없던 아들의 이상향 같았다. 그러니 그에게 특별히 마음이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물론, 그 애가 언제까지나 제 말을 잘 듣는 훌륭한 조카로 남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가 참아 줄 수 있는 조카의 결점은 그 애가 신대륙에서 경영학 석사를 땄다는 데까지였다. 먹고사는 데 바쁜 노동자 계층이나 할 법한 공부를 한 데에 이어, 이제는 암흑가 보스의 여자로 구설수가 났었던 상대와 결혼이라니.

거기에다 아내가 했던 말 때문에 이제 조카의 선택은 어느새 자존심 싸움이 되어 있었다.

“그래요. 그러면 당신이 그토록 믿고 아끼는 그 애더러 고르라 하세요. 이만큼 그 애를 생각해 주는 당신인지, 아니면 메르고빌 계집인지.”

그 말을 곱씹으며 공작은 촛불만으로 불을 밝혀 어두운 응접실 실내에서 램프를 찾았다. 램프는 백열등 전구를 크리스털이 감싼 것으로, 꽤나 신식이었다. 레버를 당겨 불을 켜자 시퍼럴 정도로 밝은 빛이 주위를 확 밝혔다.

바깥으로 나서 복도를 걸으며 이대로 공작 부인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향할지, 아니면 에드문드가 머무르고 있는 방 쪽으로 한번 가 볼지 고민했다.

‘그 애가 레이디를 손님방으로 안내하겠다고 했으니까, 내 말을 새겨들었다면 지금쯤 제 방으로 돌아갔겠지.’

아까는 당사자 앞이라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한다는 걸 에둘러 표현했지만, 에드문드와 독대를 하게 된다면 그에게 제 뜻을 정확히 밝힐 수 있으리라.

‘그러면 그 애는 착한 조카답게 내 뜻에 따르겠다고 하거나, 생각 정도는 고쳐먹겠지.’

어차피 경제학 석사를 마친 이후로 그 애가 한다는 사업은 입에 올리지 못할 정도로 시원찮았지 않았나. 그 정도의 한량이었으니 그는 작위가 절실할 것이다.

그 심리를 이용해 이참에 훈계를 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어느새 에드문드의 방문 앞에 도착한 공작은 헛기침을 하고는 문을 두드렸다. 문 안쪽에서 인기척이 나자 그는 내심 흡족한 마음에 휩싸였다.

‘정말 레이디 메르고빌에게는 손님방만 안내해 주고 돌아온 모양이군.’

그가 문을 열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그리고 동시에 공작의 만족스러운 표정이 사그라들었다.

문을 연 것은 에드문드가 아니라 그의 방을 정돈하고 있던 어느 사용인이었기 때문이다.

“공작 각하.”

사용인은 그에게 예를 표하고는 자리를 비켜 주었다.

공작은 떨떠름한 낯빛으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취침 시간을 의식한 건지 샹들리에의 불은 꺼져 있었고, 벽에 붙어 있는 은촛대 위에 올려진 촛불만이 그를 반겨 주었다.

공작은 백열등 램프를 든 채로 제 저택의 일부이지만, 에드문드가 머물러 사뭇 다른 곳 같은 스산한 방을 한번 휘 돌아보았다.

방은 한 군데 빼고는 모두 잘 정돈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한 벽면을 제외하고는.

그 벽면은 흑단으로 만든 책꽂이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높이는 천장까지 닿아 있어 그 앞으로 가면 사람을 잡아먹을 듯 위용이 대단했다.

책들이 있는 곳은 에드문드가 사용인들에게 건드리지 말라고 했던 부분이기 때문에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공작은 빼곡히 꽂혀 있는 책들의 제목을 훑으며 제 조카가 이것들을 모두 읽었으리라 흐뭇해하다가 어느 부분에서 멈춰 섰다.

제 머리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있는 책들 사이에 흰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공작이 그 종이를 꺼내 본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였다.

그 종이에는 조카의 필체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일 년이 지나 그녀를 다시 찾아냈을 때, 그녀는 배우가 되어 있었다.

발성 영화에서 보는 여배우들보다도 더욱 아름다웠고 본인의 배역에 충실했다. 언론에서 논하는 실직한 상원 의원이지만, 그런데도 건재해야 하는 귀족. 그 귀족의 딸 역할 말이다.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그때처럼 생기 있게 웃지도 않았다. 꼭 조화 같았다. 멀리서 보기에는 아름다웠지만 가까이에서는 향기가 하나도 나지 않는 부류의.

그쯤 읽었을 때, 공작은 제 조카가 시를 쓰는 취미도 있나 싶어 작게 웃고는 종이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왠지 속 모를 조카의 생각을 훔쳐보는 게 기꺼워 글을 계속 읽어 나가기로 했다.

신년제 무도회장에 들어설 때만 해도 혹시나 그녀를 찾지 못하지는 않을까 했던 의심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신년제 무도회장?

공작은 작년 말과 올해 월초에 에드문드가 공작저에 머물렀던 걸 기억했다. 그래. 작년 겨울에 에드문드가 고급 양주를 한 병 가져와 건네며 제 안부를 묻던 모습이 기억 속에 선연했다.

올해 1월 1일에도, 제 조카는 공작저에 있었다. 그는 제가 그날 시가지에서 본 발성 영화에 대해 이곳의 시녀장인 루이제와 대화를 나누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건 그날 오후의 일이고, 그로부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신년제가 한창이었을 올해의 1월 1일 자정에도 에드문드가 공작저에 있었던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제 조카는 그때 이 글에 적힌 ‘그녀’를 보러 어느 무도회장에 있었다는 것일 텐데.

공작은 생각을 마친 뒤 다시 활자를 읽어 내려갔다.

1년의 시간이 지나도 그 여자는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동시에 위태로웠다.

꼭 유리 조각처럼 말이다.

겨울이라 그랬는지 연회장의 빛은 더 차가웠고, 그 아래서 여자는 반짝이는 웃음을 지었다.

꼭 다음 날 아침이면 녹아내릴 길가의 눈 같았다.

사라질 걸 알아서 더욱 눈을 뗄 수 없었고, 독보적이기에 다가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납득했다.

여기까지는 ‘그 여자’를 본 데에 대한 제 조카의 감상인 듯했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누구일까?

원하는 정보를 찾아낼 수 없어 실망하려는 차, 다음 문단을 읽어 내려가던 공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돌이켜 보면, 그때 아버지의 명령을 무시하고 제도에 발을 들였던 건 호기심을 감추려는 핑계였을지도 모른다.

에드문드 콜트가 적은 ‘아버지의 명령’이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수상이 한참 첩보 작전이다 뭐다 하며, 에드문드로 위장한 요원을 메르고빌 영애에게 접근시킬 때 ‘진짜’ 아들로 하여금 제도에 발붙이지 못하게 했었던 축객령이었다.

그 명령을 어겼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공작은 손에 땀이 배어나는 것도 모른 채 이어서 에드문드의 필체를 훑어 내려갔다.

저 여자를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그녀의 삶에 한 발짝 걸어 들어갔었다.

매혹당했다는 걸 인정하면. 그래서 더 욕심을 부린다면 언젠가 저 여자에게 겨눠질 가문의 총구가 내게로 향할 걸 알면서도 어리석게.

또한, 위장한 적의 애정이야말로 목마른 그녀에게 겨눠질 그 어떤 것보다 강한 무기라는 걸 알면서도 불가항력적으로 이끌려서.

공작은 제 눈을 의심했다.

이 글에서 에드문드는, 작년에 제가 비비안느 영애에게 접근했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는 숨을 죽이며 얼마 남지 않은 글을 마저 읽어 내렸다.

감정을 인정하지 않은 채 고작해야 아랫것의 여자일 뿐이다, 라고. 그때는 당연하게 유리 너머 테라스에 웅크린 그녀를 보며 생각했었다.

비비안느 메르고빌은 당시 뤼드빅 렉스의 약혼녀로 이름이 나 있었고, 뤼드빅 렉스는 암흑가의 보스로 세간에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제 자랑스러운 조카, 에드문드 콜트가 그 잔악무도한 뤼드빅 렉스의 상사라는 건 또 무슨 이야기일까.

이 모든 게 사실이 되려면 제 조카가 위장한 요원을 처리하고는, 그 요원인 듯 나서서 비비안느 영애에게 접근했어야 했다. 거기다 제가 부리던 뤼드빅 렉스를 재판정에 내몰아 자백을 강요해 대중의 몰매를 맞게 하고, 모든 일의 막후에 숨어서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는 건데….

공작은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고는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결국 서로를 갉을 첫 만남에 그 정도의 변명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그러던 그는 제 아내가 줄곧 하곤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에드문드가 이 저택과 재산을 차지하려 들 거라고… 그 애가 벗어 놓은 베스트 안주머니에 피 묻은 너클이 있는 걸 봤다고 했었지.’

그러고서 그녀는 정 그 애한테 이곳을 넘겨줄 거면 지금 당장이라도 넘겨주고는 한적한 별장에서 여생을 보내자고 말하지 않았나.

그렇게 말한 제 아내는 꽤 눈썰미가 좋은 편이었다. 그러한 섬세함은 이 저택에 놓인 그림을 고르는 안목에서도 드러났다.

공작은 아까 사저의 응접실에서 제 아내가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러게 그 순진한 메르고빌 계집애 방에서 당신이 아끼는 조카 허리띠가 나왔다고 말했었잖아요.”

이 글에 적힌 에드문드의 ‘그녀’가 비비안느라면, 이곳에서 보였던 두 사람의 정염이 모두 설명이 되었다.

책망하는 듯한 아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이어졌다.

“이런데도 제가 당신이 아껴 마지않는 조카를 모함한다고 하실 텐가요? 제가 잘못 본 거라고.”

그래. 에드문드는 제가 아껴 마지않는 조카였다….

그런 저를 비웃듯 올해 에드문드가 비비안느를 데려왔던 날에 제가 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네 아버지가 최근에 이상한 소리를 하시더구나. 작년 겨울, 네가 영지에 있었던 게 정말 맞냐고.”

이제 공작은 그 질문에 대한 새로운 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작의 황급한 걸음이 저벅저벅 에드문드의 책상 쪽으로 향했다.

그쪽에 전화기가 있을 것이다.

현재의 자신과는 다르게 호쾌한 듯한 그의 과거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그건 왜 묻느냐고 물었지. 처음에는 또 네가 사업한답시고 돌아다니는 일에 또 으름장을 놓으려고 그러는 줄 알았어. 그런데 이번엔 제법 심각하더구나. 요원이 임무를 수행했을 그 특정한 기간 동안, 네가 이곳에 있었던 게 맞느냐고 묻더군.”

“그래서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내 조카를 의심하는 거냐고 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순수 제국인 혈통, 거기다 내 가문의 피가 섞인 청년 아닌가!”

공작은 그쯤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걸 멈추고 싶었다.

그 뒤에 자신이 한 말을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서였다.

달칵- 수화기를 들어 올림과 동시에 머릿속에 제 목소리가 이어졌다.

“무려 해밀턴 스쿨을 수석 졸업하고 알프레드 황립 대학을 나온 엘리트란 말이네! 의심도 그런 의심을! 아니, 사회에 불만 있을 것 같은 건 딱 봐도 렉스 의장이 데리고 다니는 그 사생아 아닌가. 그 막강한 후보군을 두고! 무려 내 훌륭한 조카를! 정신이 나갔지. 하여간 평민들이란….”

이어진 회상 속 제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현재의 적막과 대조되어 더한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너털웃음이 섞인 공작의 목소리가 상념 속에서 이어졌다.

“머리는 똑똑할지라도 그 썩어 빠진 이방인 핏줄을 반이나 가지고 있는 놈이 암흑가 사업 배후에 있겠지, 아니냐?”

아니었다.

그건 진짜 암흑가의 보스였던 제 조카를 자극하기만 했을 말이었으리라.

“애초에 그런 출신 성분을 가졌으니 사업에 개입하기도 쉽지 않았겠냐는 말이다. 그 밑바닥 새끼들이 외부인에게서 뭘 믿었겠냐고. 핏줄이지 핏줄. 혈관에 답이 있는데도 굳이 멀리 나가서 고민하는 꼴이 참 웃기지.”

그래. 세노윅가의 핏줄이 섞여 있는 에드문드가….

그가, 어찌 그런 일을 저질렀겠는가.

설마.

그러면서도 공작이 침착하게 수상의 관저로 전화를 연결하기 위해 숨을 죽였을 때 발걸음이 가까워지는 소리가 났다.

제 조카일 것이다.

쾅!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유독 컸다. 공작은 되는대로 손에 들린 종이를 구겨서 제가 걸치고 있는 수면용 로브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어둠 속에서 에드문드가 걸어 들어왔다. 손에는 복도에서 찾아 들고 온 듯한 은촛대가 들려 있었다. 탁. 촛대가 공작 앞의 책상 위에 놓일 때까지는 무거운 정적만이 흘렀다. 마침내 저를 훑은 조카가 입을 열었다.

“…외숙.”

어둠 일부를 잔혹하게 삼킨 불빛이 조카의 얼굴을 반쯤 비추었다. 빛이 있는 곳은 한없이도 선해 보였지만 그림자로 가려진 쪽은 달랐다.

영혼의 창이라는 암녹색 눈은 그가 숨기고 있었던 이면을 드러내 보이는 듯했다. 문제는 저 얼굴의 이면까지 모두 조각이라고 칭해도 될 정도로 소름 끼치게 훌륭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만, 제게 개인적으로 하실 말씀이 더 있으셨습니까?”

공작은 평소와 같이 자신에게 반듯하게 구는 에드문드의 태도에 놀랐다. 그는 제가 깨달은 바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그랬지.”

공작은 기지를 발휘해 짐짓 태연하게 말했다.

“마침 아까 사저의 응접실에서 했던 말에 대해 더 이야기해 보려던 차였다. 레이디 메르고빌에 대해서 말이다.”

“예.”

에드문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 영애를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었는지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날카로운 눈빛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고, 완벽한 얼굴에 표정이 생겨 제 조카가 조금은… 인간적으로 보였다.

그제야 공작은 메르고빌 영애가 그의 ‘결점’이라기보다는 ‘고삐’쯤 된다는 걸 실감했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점잖게 말을 이었다.

“아까는 네 외숙모 앞이라 그렇게 말했다만, 사실 나는 네가 그 영애를 그리 좋아하고 있다면 두 사람의 사이를 반대할 생각이 없어.”

“그렇습니까.”

“그럼. 네가 그 영애의 순결을 앗아 간… 맞바람 상대였다면 책임져야 한다는 것도 맞다 생각하고. 저번에 네가 이곳에 왔을 때도, 메르고빌 영애가 내 말벗이 되어 주며 나를 살뜰히 챙기지 않았냐.”

“…….”

“나는 이만 네게 이 영지와 저택을 넘기고 작은 별장으로 가서 네 외숙모와 여생을 보낼 생각이야. 내일 날이 밝자마자 만찬회를 열어서 내 이 사실을 공표하마.”

공작은 말을 마친 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에드문드의 팔을 툭툭 치고는 웃어 보였다.

“잘 자라.”

그렇게 그를 지나쳐 걸어 나가려는 순간 에드문드가 고개를 돌려 정확히 종이가 있었던 곳, 책장이 늘어선 벽면의 위편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공작과 시선을 맞춘 뒤 싱긋 웃어 보이며 답했다.

“외숙부께서도 안녕히 주무시길.”

공작은 엉거주춤하게 고갯짓을 하고는 문을 닫고 나갔다.

아직까지도 손끝이 저릿저릿하게 아파 오며 떨리고 있을 정도로 그는 긴장해 있었다.

숨을 고르던 그는 자신이 램프를 방 안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카의 방에 다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조용히 어두운 복도를 걸을 뿐이었다. 사냥을 즐겼다만 깊은 숲속에서도 저렇게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짐승을 만난 바 없다.

새삼 저 무시무시한 걸 잘도 제 발밑에 오래 두었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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