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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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문드는 이곳에 처음 왔을 때처럼 비비안느를 응접실로 바로 데려가는 대신, 저택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집사를 시켜 공작 부처에게 기별을 넣게 했다. 비비안느는 그 이유를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저번 방문에서 응접실로 바로 갔을 때는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온 킹슬리의 악담을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어 버렸지.’

    그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해 주는 것일 터였다.

    비비안느는 자신이 과대 해석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현관의 유리창에 쳐진 커튼으로 어른거리는 사내의 실루엣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에드문드는 평소처럼 담배를 태우고 있는지 실내로 희미한 타바코 냄새가 흘러들어 왔다. 차가운 밤바람이 섞여 전혀 불쾌하지 않은 향이었다.

    “아가씨.”

    옆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비비안느는 흠칫 놀라 집사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공작 각하께서 두 분을 보시겠답니다. 제가 모셔다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녀가 긴장하고 있는 것이 무색하게 아주 정중한 투였다.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에드문드를 차기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데다가, 잘 따르는 것 같으니까.’

    이곳의 시녀장 루이제가 자신에게 건넸던 호의적인 미소들이 떠올랐다. 집사 또한 저택의 사용인으로서 저를 귀하게 모시려는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환대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네. …아, 에드문드는 저 밖에 있는데 제가 가 볼게요.”

    “예. 말씀 편히 하십시오.”

    집사의 말에 비비안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가 손을 뻗기도 전에 집사가 현관문을 열어 주었고, 밖으로 향하는 그녀의 등 뒤로 문이 닫혀 바깥에는 단둘만 서 있게 되었다.

    에드문드의 시선이 비스듬히 비비안느에게로 향하자, 그녀는 다시 한번 긴장을 하게 되었다. 그의 머리 위로 겹쳐 보이는 새까만 하늘 위의 흰 보름달이 문득 묘하고 신비해 보였다.

    “에드문드.”

    그간 비비안느가 그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심경의 변화를 거친 것과는 달리, 그와 사적으로 단둘이 이야기해 볼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왠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녀는 괜히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고는 이어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도 좋다고 해서요.”

    그녀는 제 말 한마디로 깊어진 그의 눈을 쳐다보다 시선을 피했다. 그때 그에게서 지독히도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어디에?”

    그 말에 답지 않게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대게 되었다.

    비비안느는 문 쪽을 일별하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응접실 안으로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앞장서 문 뒤로 사라졌다.

    ‘어딘지 알면서도 왜 굳이 물은 걸까.’

    그 뒷모습을 보고 그녀는 그를 따라가기는커녕 잠시 자리에 서서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아직 그에 대한 탐색이 끝나지도 않았음에도 본능적으로 그를 원한다는 마음이 앞서는 게 두려운 걸까. 자연히 머리가 행동에 제동을 걸었다.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가씨. 일교차가 커서 바깥 날씨가 춥습니다.”

    결국 집사가 저택 현관문을 직접 열어 준 뒤에야 비비안느는 실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저만 괜히 이 애매한 기류를 의식하는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공작 각하, 에드문드 도련님과 비비안느 아가씨를 모셔 왔습니다.”

    이번에 집사가 그들을 안내한 곳은 저택 사저에 있는 응접실이었다.

    이곳은 말로만 들어 왔던 ‘크림슨 룸’으로 붉은 인테리어와 진홍색 벽지가 잘 어우러졌다. 앤티크한 목제 벽난로 위에 올려져 있는 촛대라든가, 벽에 따닥따닥 붙어 있는 액자 모두 금빛으로 장식되어 화려함을 더했다.

    비비안느의 시선은 방 정면의 가장 큰 액자로 향했다.

    인물화가 한참 인기였을 때 그린 듯한 공작 부처의 모습이 담겨 있다.

    공작은 품에 아기를 안아 보며 – 아마 조카 중 하나인 듯하다 – 기쁘게 웃고 있었고, 공작 부인은 훨씬 더 젊은 모습으로 우아하게 웃으며 부채를 펴 들고 있다.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자 호전적인 불독처럼 입주름이 진 공작의 얼굴과 여전히 심술궂은 가젤 같아 보이는 공작 부인이 보였다.

    마침 공작 부처는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는지, 공작 부인은 얇은 나이트가운을 걸친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왔냐.”

    역시 제 감정을 있는 대로 드러낼 줄만 아는 공작은 심통이 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부께서는 강녕하셨습니까.”

    “네 외숙모한테나 물어라.”

    “외숙모님.”

    에드문드가 부드럽게 공작 부인에게로 인사하자, 그녀가 의외로 다정하게 에드문드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어서 와요. 오는 길은 불편하지 않으셨는지.”

    “예. 걱정해 주신 덕에 잘 도착했습니다.”

    “다행이네요. 아가씨 측이 애라도 뱄으면 운신에 주의를 보통 기울여야 하는 게 아닐 테니까요.”

    “지어내지 마. 콜트 수상이 두 사람이 결혼할 거라고만 했지, 그게 저 아가씨가 임신해서라고는 안 했어.”

    공작이 아내에게 퉁명스럽게 일렀다. 공작 부인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랬죠. 그런데 난 두 사람이 결혼을 유독 서두르기에, 거기에다 레이디 메르고빌이 두 사람의 충동질은 사내 쪽의 가벼운 호기심이었다고 손수 말해 줬던 게 기억나서 그리 말했죠.”

    “그랬습니까?”

    에드문드가 비비안느를 쳐다보았지만 말은 공작 부인이 이었다.

    “그래서 난 그 말을 믿었는데. 얌전한 메르고빌 양이 이렇게 나를 기만하고 내 손길을 잔혹하게 내친 거였을 지는 몰랐지. 두 사람 사이가 아무것도 아니라더니, 이제는 결혼까지 한다고 하고. 우리 축복까지 거저 바라는 게… 아주 맹랑하네?”

    “그때는….”

    비비안느가 애써 해명하려 할 때 에드문드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레이디께서 그렇게 말했었습니까? 제가 고작 레이디의 충동질 상대였다고.”

    공작 부인이 옳다는 듯 대답 대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렇다면 레이디를 헷갈리게 만든 제 잘못입니다.”

    에드문드가 손을 뻗어 비비안느의 손을 잡아 왔다.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는 비비안느를 책임질 생각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

    “마침 외숙부께서는 이만 제게 세노윅 저택의 경영을 일임하고 별장에 내려가 쉬고 싶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에드문드의 시선이 공작에게로 향했다.

    “제가 결혼한다는 조건이었죠. 마침 레이디께서는 유서 깊은 가문의 귀족 영애로, 하우스 세노윅의 훌륭한 귀부인이자 사용인들의 주인마님이 되어 줄 겁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사형수의 약혼녀였는데도요?”

    공작 부인이 정곡을 찔렀다. 에드문드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그 순결한 약혼녀의 맞바람 상대였으니 레이디를 책임지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외숙모님.”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정말 애라도 배게 했나 보죠?”

    “아닙니다만, 후계를 원하시는 거라면 당장 오늘이라도 메르고빌 영애와 같은 방을 쓰겠습니다.”

    에드문드가 태연하게 말한 그 순간 비비안느는 그의 손끝이 뜨겁다는 걸 의식하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공작 부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를 본의 아니게 혼전 임신시킨 걸로 아버지 체면 떨어트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건 아니고요?”

    “글쎄요. 아버지의 대단한 체면 떨어트릴 방법이 세상에 하고많은데, 외숙모님께서 말씀하신 것보다는 덜 시시해야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마친 에드문드가 기묘한 낯을 하는 걸, 비비안느는 옆에서 잠자코 바라보았다.

    제게 보여 줬던 오만한 면면은 인간적이라 보이게 할 만한 작태였다.

    ‘낯설어.’

    공작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잠시 제 조카를 이방인 보듯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네가 언젠가 만나는 여자를 꼭 소개해 주겠다더니. 부끄러운 성정이라던 귀족가 영애가 레이디 메르고빌이었냐.”

    “예, 외숙.”

    “뭐, 그래. 킹슬리 말대로, 네가 학창 시절에 만났다던 평민 여자보다야 낫겠지. 저들끼리 좋다는데 우리 늙은이들이 더 왈가왈부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어.”

    그 말에 공작 부인이 당치도 않다는 듯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개의치 않은 채 빈 잔에 버터스카치(butterscotch) 위스키를 따라 마신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메르고빌 영애가 세노윅 영지의 안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지는 내가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야. 그런 이야기를 하기엔 시간이 너무 늦은 듯하니 너희들도 이만 가서 쉬어라.”

    공작은 벽에 붙어 서 있는 풋맨에게 손짓해 말했다.

    “레이디 메르고빌에게는 저번에 내어 드렸던 손님방으로 안내하도록.”

    “사용인은 필요 없습니다. 제가 레이디를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에드문드의 말에 공작이 눈에 쌍심지를 켰다.

    아무래도 아까 했던 말이 ‘결혼은 너네들 마음대로 하든가 말든가, 대신 작위는 받을 생각 마라.’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공작의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면서 에드문드는 태연히 말했다.

    “말씀드렸듯, 어떤 일이 있어도 결혼할 상대를 외간 남자와 단둘이 두고 싶지 않아서요.”

    “네 뜻이 그렇다면 작위 문제는 내일 킹슬리를 불러 같이 이야기를 해 보는 게 좋겠다.”

    “그럼 저는 공작 각하께서 결정하실 때까지 비비안느와 함께 기다리겠습니다.”

    에드문드는 웃으면서 짐짓 다정하게 인사를 해 보이고는 비비안느의 어깨를 감싼 채 뒤돌았다.

    안내하는 사람도 없으니 꼭 이곳을 침탈하러 왔다 통보를 하러 온 사람들이 된 것 같은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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