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14)

❖ ❖ ❖

같은 시각, 세노윅 영지.

“…….”

역시 공작저의 사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우선 전화기를 내려놓은 뒤 담배를 문 세노윅 공작부터가 그랬다. 그의 옆에 앉은 공작 부인이 닦달하듯 물어 왔다.

“무슨 일인데 그러죠?”

남편의 호탕한 성정을 알고 있는 그녀는 그가 대답 대신 담배만 뻑뻑 피우고 있는 이 상황이 심상찮다는 걸 알았다. 공작 부인은 남편을 날카롭게 힐끔거렸지만 재차 묻지는 못한 채 신경질적으로 찻잔과 소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인상과 닮은 듯한 작은 찻잔은 금박이 곁들여져 호화로웠지만 낡았고, 소서와 부딪힐 때 좋지 않은 소리를 냈다.

그녀의 참을성이 거의 다 닳으려 했을 때 공작이 입을 열었다.

“에드문드 놈 아비한테서 전화가 왔어. 아들이 세노윅 저택으로 출발했으니 늘 그랬듯 잘 좀 부탁한다고 그러더군.”

“잘된 거 아녜요?”

공작 부인은 샐쭉한 얼굴로 말했다.

“가장 아끼는 조카가 온다는데, 기뻐하셔야지요. 물론 요즘 당신을 살뜰하게 챙긴 건 킹슬리지만요….”

“메르고빌 영애랑 함께 온다고 했어.”

그 말에 공작 부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녀가 들고 있던 찻잔이 차분히 테이블 위에 놓이고 못마땅한 눈이 더 말해 보라는 듯 남편에게로 향했다.

“아니, 그 영애랑요? 왜요.”

“둘이 결혼을 하겠다는데, 내가 그 애 대부인 만큼 내 허락과 축복을 바란다지 뭐야.”

“당신 조카가 원하는 게 비단 그것뿐이겠어요? 실상은 이제부터 작위와 영지를 이만 이어받아 경영하겠다는 거겠지요. 그거야 당신이 바라던 일이지만, 생각 잘해요, 여보.”

“…….”

“그 메르고빌 계집이 아무리 무고하다고 한들 잔악무도한 뤼드빅 렉스의 호텔을 들락날락했다던 탕녀예요.”

그 말에 공작의 미간에 골이 크게 파였다. 공작 부인은 아랫입술을 쭉 빼고는 이었다.

“속되게 말해, 그 호텔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지 누가 알아요? 무슨 사업을 하는지도 모르는 에드문드, 그 한량이 냉큼 이 세노윅을 받아 간다는데 그 애 신붓감 정도는 당신 마음에 꼭 들어맞는 아이로 고를 수 있어야 마땅하죠.”

그쯤 말한 공작 부인이 작은 종을 흔들자 대기하고 있던 시녀장, 루이제가 들어와 공작 부인 옆에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얘, 이것 좀 치우렴.”

공작 부인의 눈초리가 루이제에게로 향하자, 그녀가 주인마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레 티 테이블 위의 것들을 쟁반 쪽으로 옮겨 갈무리했다.

“그러게 그 순진한 메르고빌 계집애 방에서 당신이 아끼는 조카 허리띠가 나왔다고 말했었잖아요.”

공작에게 한 말이었지만 꼭 루이제더러 들으라는 듯한 목소리였다.

“이런데도 제가 당신이 아껴 마지않는 조카를 모함한다고 하실 텐가요? 제가 잘못 본 거라고.”

공작 부인은 에드문드가 위험한 사람이라며 호들갑을 떤 것으로 저택에 정평이 나 있었다.

그녀는 늘 에드문드가 이 저택과 세노윅 공작의 재산을 차지하려 들 거라 떠들어 댔고, 그가 벗어 놓은 베스트 안주머니에서 피 묻은 너클이 있는 걸 봤다며 강력히 주장했다.

루이제는 특히 에드문드에게 호의적이라 이 이야기를 당사자에게 직접 전하곤 했었다. 쟁반을 들고 방을 조용히 떠나는 루이제의 뒷모습에 내리꽂히는 공작 부인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보다 못한 공작이 쓴웃음을 머금고는 응수했다.

“…메르고빌 영애가 여길 떠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영애가 집에 잘 도착했고 백작과는 별일 없었을 거라는 말을 그 애 약혼자한테서 들었다고 당신이 전하지 않았었나.”

“당신이 그 말을 듣고 싶어 할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보세요. 누가 옳았는지.”

“그래. 두 젊은 남녀가 불이 붙었던 모양이지. 그런데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에드문드가 그렇게 못된 애는 아니야.”

그 말에 공작 부인은 한쪽 입매를 끌어 올렸다. 공작은 자존심이 세기로는 남부럽지 않은 데다가 고집불통이니 이런 치기 어린 수는 분명 먹힐 것이다.

“그래요. 그러면 당신이 그토록 믿고 아끼는 그 애더러 고르라 하세요. 이만큼 그 애를 생각해 주는 당신인지, 아니면 메르고빌 계집인지.”

“…….”

“그 요망한 계집애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공작 부인이 후회한다는 듯 혀를 쯧 찼다. 때마침 집사가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게나.”

공작의 말에 집사가 모습을 드러내고는 고했다.

“각하, 에드문드 도련님과 메르고빌 영애께서 저택에 도착하셨습니다.”

“만나 보겠다고 전하게.”

공작이 비뚜름한 얼굴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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