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14)

❖ ❖ ❖

[…그리고 여기까지가 로잘리 양께서 제과점에 도착하면 할 일이에요. 어렵지 않죠?]

[네.]

비비안느는 제과점 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과는 달리 아직까지 돈을 벌기 위해 몸을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생소하긴 했으나 차츰 적응될 문제였다.

직원은 열심히 받아적고 있는 그녀에게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

[벌써 두 시간이 지났네요. 원래는 이쯤에서 얼추 마무리 짓고 보내 드릴 텐데, 로잘리 양은 한 번도 제과점에서 일해 본 적 없다고 하니 오늘은 옆에서 제가 일하는 걸 보고 배워 보는 게 어때요?]

[아, 네. 좋아요.]

그때 마침 전화기가 울려 직원이 [잠시만요.] 하고 말한 뒤 자리를 비웠다.

그는 금방 돌아와 비비안느에게 말했다.

[매디슨이라는 분이 로잘리 양을 찾으시는데요.]

비비안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점원을 따라 전화를 넘겨받았다.

“매디슨.”

- 비비!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제 본명을 불렀다는 사실에 흠칫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점원은 계산대 앞에 서서 쇼윈도 너머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비비안느는 고개를 돌린 뒤 말을 이었다.

“으응. 제과점에서 교육받느라 늦을 것 같다니까. 혹시 저택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 별다른 건 아니라, 어떤 남자가 불쑥 찾아와서 네가 여기 있냐고 물어서. 널 알고 있다는데 좀 의심스러워서 말이지. 네 본명을 언급하면서 너를 찾더라고.

수화기를 잡고 있는 손이 일순 차가워졌다.

“그래서 뭐라고 말했는데?”

- 없다고 했고, 그런 사람은 모른다 했지. 정말 이상한 건 그 사람이 얼핏 보기에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는 거야. 군인이나 암살자 부류. 경찰에 신고할까?

“아냐.”

황급히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러다 후작저로 돌아가는 일이 생길까 봐 무서웠다.

“나 일이 여섯 시쯤 끝날 것 같은데 그때 데리러 와 줄 수 있어? 여기가 어디냐면….”

비비안느는 주소를 천천히 읊어 주었고, 매디슨은 받아 적었다.

- 꽤 길게 있네?

“아. 열두 시까지는 보고 배우는 거고 여섯 시까지는 내가 직접 일을 해 보는 거라 했어.”

- 그래, 알았어. 그때 갈게.

“응. 걱정하지 말고.”

- 너나 걱정하지 마.

매디슨의 목소리에 비비안느는 큭큭 웃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저를 찾아왔다는 의문스러운 이는 기껏해야 제 행방을 쫓던 에드문드의 사람 아닐까.

‘매디슨은 아예 모르쇠로 일관했다고 하니까 굳이 제과점으로 찾아오지도 않겠고.’

그렇게 생각하고는 점원에게로 향해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을 열었다.

[통화하게 해 주셔서 고마워요. 혹시 여섯 시쯤에 친구가 가게 앞에서 기다리는 건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흔쾌히 돌아온 답에 호응하듯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쇼윈도 너머를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잠시간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아냐. 내가 잘못 본 거겠지.’

환상을 본 게 틀림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로잘리 양, 괜찮으세요? 안색이 갑자기 새하얘져서.]

[괜찮아요. 그런데 저… 잠시만 밖에 나갔다 돌아와도 괜찮을까요. 자꾸 부탁만 하게 되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네. 그럼요. 첫날이니 편하게 하세요. 열두 시 전까지만 돌아오시고요.]

그 말에 튕기듯 가게 밖으로 나간 비비안느의 발걸음 뒤로 딸랑-, 하는 벨 소리가 따라붙었다.

그녀는 가게 건너편에 멈추어 선 리무진을 흔들리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앞좌석에서 운전기사가 내려 상석의 문을 열어 주자 곧 익숙한 사내가 차 밖으로 나와 이쪽을 훑었다.

에드문드.

환상을 보는 거라며 그녀는 재빠르게 움직여 제과점으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보석상으로 향했다.

[찾는 보석이라도 있으신가요?]

숨을 고르고 있는 그녀의 등 뒤로 점원이 친절하게 말했다.

[아….]

비비안느는 어색한 낯을 했다. 보석을 살 돈이 없다는 걸 자각해서는 아니었다.

정말 모든 걸 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했고, 귀족으로서 체면을 버리고 기존의 삶을 버리기 위해 일을 하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막상 콜트 백작 앞에서는 ‘제과점 점원이 아닌 보석을 사려는 비비안느 영애’로 비치고 싶어서 이곳으로 몸을 던졌다는 사실이 실감되어서였다.

그녀가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문에 달린 벨이 딸랑-, 하고 다시 한번 울렸다.

비비안느는 떨리는 시선으로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찾는 보석이라도 있으신가요?]

점원이 사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방금 제게 한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사내는 저를 둘러싼 진열장의 온갖 화려한 보석들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저만을 뚫어져라 쳐다본 채 입을 열었다.

[예.]

그는 능숙한 샹프니야어로 답했다. 그가 콜트가의 도련님이자 수상 아들로서 받았을 교육을 생각해 보자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마침 여기 있군요.]

기어코 목소리를 듣고서야 비비안느는 제가 아까 길 너머에서 본 것이 에드문드가 맞았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찾는 건 제가 했으니 굳이 찾아 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질세라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그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시선은 저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계속 말은 점원에게 거는 식이었다.

[잠시 자리를 비워 주시겠습니까? 보석이 도난당할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곳에 있는 걸 제가 다 살 테니.]

[그럴 필요가 있나요? 제가 나가면 될 텐데.]

그렇게 내뱉으며 문밖으로 향하려 하자, 에드문드가 백지 수표에 서명하고는 보란 듯이 점원 앞 진열장 위로 올려 두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그들이 처음 만났을 적, 옷을 사러 갔던 때가 생각났다.

괜히 자존심을 세우고 싶어진 비비안느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퉁명스레 내뱉었다.

[보석은 다음에 보러 올게요.]

“그러게, 마침 일하는 제과점에서 멀지도 않으니 들르기도 편하지 않겠어.”

손잡이를 잡았을 때, 등 뒤로 내리꽂히는 에드문드의 말에 신경질적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남자가 그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여긴 왜 오신 거죠?”

질린다는 표정이 드러났는지 에드문드의 표정이 굳었고, 이내 곧 냉소가 어렸다. 그의 등 뒤로 보석상 내부의 세공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점원이 자리를 비켜 준 모양이었다.

“토끼야.”

그때 그가 나직이 제 별칭(이라고도 부르기 싫은 것)을 입에 올렸다.

“…내가 너 보러 왔게?”

“네. 맞는 것 같은데요.”

경계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상대는 세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어딘가 갈라졌지만 오만한 목소리가 나직이 이어졌다.

“난 엘레노어 카스터가 새로 론칭한 제과점 사업에 투자를 하러 왔는데. 네가 그 지점 중 하나에서 일하고 있을 줄은 몰랐지.”

그 말에 얼굴에 화기가 느껴졌다. 질세라 비비안느는 그에게 따졌다.

“그러면 제집에 찾아온 그 남자는 누군데요. 당신이라면 매디슨이 알아봤을 테니까, 백작님은 아닐 테고. 백작님 사람인 거죠?”

“아니.”

그는 여유롭게 답했다.

“내가 네 위치를 알고 있는데 굳이 그쪽으로 사람을 보낼 이유가 없지 않나.”

“…….”

맞는 말 같았다. 저 제과점이 정말로 엘레노어가 새로 시작한 사업이라면, 에드문드는 그녀를 통해 저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을 테니 이곳으로 바로 왔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널 구하러 온 것 같기도 하고.”

그가 한 걸음 더 가까이 와서 속삭이듯 말했다.

“네가 보고 싶어서 온 것 같기도, 하고.”

기만자.

저 남자의 말은 영영 믿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과는 달리 저를 해치려 하는 제삼자 같은 건 없고, 이것 모두 저 사람의 농간이라고 생각하며 비비안느는 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다.

진열대 위에 놓인 백지 수표를 생각하니 작년에 집을 나왔을 때 저 남자가 제게 값비싼 옷들을 턱턱 사 줬던 게 생각났다.

그때, 그가 이토록 쉽게 쓰는 돈이라면 어머니가 말하는 가문의 빚을 모두 상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에드문드는 자신의 근원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돈을 써 주는 대신 제 환심을 사기 위해 썼었다.

‘그렇게 다정한 요원인 척하면서 내가 뤼드빅에 대해 발설하려는지 시험하려는 거였겠지.’

배려에 설레면서도 그 본질을 깨달으며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 보석들을 사서 그가 얻는 게 무어란 말인가? 그런다고 제 삶이 얼마나 나아질 거란 걸까.

저 남자는 여전히 돈 쓰는 방법을 몰랐다.

비비안느는 뒤돌지 않고 걸음을 옮겨 제과점 쪽으로 향했다.

제과점 체인들의 대표가 엘레노어라는 걸 깨닫고는 지금이라도 못 하겠다고 말할까 고민하다가 아랫입술을 꼭 물고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차피 에드문드가 알아 버렸는데 이제라도 아닌 척 점잔 떠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였다.

점원은 해맑게 웃으며 저를 반겨 주었다.

[오셨네요! 제가 마침 계산할 때 참고할 수 있게 여기 빵 그림 밑에 이름을 써 봤어요.]

[그래요? 고마워요.]

파일철을 받아 들고는 각각의 빵의 이름을 눈여겨보았다.

점원이 특징을 살려서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라 잘 알아볼 수 있었다.

[오늘 제가 여섯 시까지 같이 있어 드릴 테니까, 일 천천히 배우시고 그래도 감이 안 잡힌다면 당분간은 일찍 나오셔서 제가 하는 걸 보셔도 괜찮아요.]

[네.]

비비안느는 그의 연이은 배려에 감사를 표현해 보였다.

[고마워요.]

하지만 그 감정도 잠시, 다른 생각이 머릿속에 치밀었다.

그러고 보니 저는 가명을 대고 근로 계약서도 쓰지 않으며 현금으로 일당을 받아 일하겠다고 했는데, 이 점원은 어떻게 제가 여기서 일하게 됐다는 걸 엘레노어에게 고해바쳤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에드문드가 또 나를 속이려 하는 거겠지.’

저택에 불쑥 찾아왔던 제3의 세력으로부터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제 수색에 대한 변명을 댄 게 틀림없었다. 매디슨이 말했던, 저택에 찾아온 이도 에드문드가 보낸 것이겠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겁먹을 것도 없었다.

이만 일에 열중하자고 생각하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기분 탓만은 아니었는지 제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치고는 눈에 띄는 사람이 가게에 찾아오는 일도 없었고, 에드문드가 거창한 경호원들을 보내는 일도 없었다.

바쁘게 점원을 따라다니며 이것저것을 하다가 손님이 찾아오는 것도 한풀 꺾였을 때 점원이 머리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고는 말했다.

[오늘따라 유독 손님이 많네요.]

[그런가요?]

[네. 가게가 부촌 근처에 있어도 요즘 경기가 좋지 않아서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많이 오지는 않거든요. 이게 다 비비안느 영애 덕일까요?]

[아….]

에드문드가 제 안전을 확인한답시고 사람을 보내서 이렇게 손님이 많다는 걸까….

그녀가 한참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점원이 태연한 낯으로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어머니가 이래서 저 대신 로잘리 양 같은 직원을 구하고 싶어 하셨나 봐요. 다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예쁘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번쯤 얼굴을 비친 게 아닐까요?]

그런 이야기였구나.

안심한 비비안느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어머니요?]

이 사람은 어머니와 그런 이야기도 하는구나. 엄격한 후작 부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어느새 미소는 쓴웃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점원은 쇼원도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고 보니 말을 안 해 드렸었구나. 어머니께서 이 제과점의 점장이시거든요. 제가 로잘리 양을 쓰기로 했을 때 어느 정도 눈치챈 줄 알았어요.]

[아, 네. 그럼요.]

비비안느는 제가 손에 물 한 번 안 묻혀 봐 그쯤도 짐작할 수 없었던 고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티 내지 않으려고 그 일을 이미 알고 있는 듯 답했다.

[직접 전해 듣고 나니까 새삼 그렇구나 싶어서요.]

직원은 별다른 말 없이 마주 웃어 주었다.

다행히 그 뒤로도 별다른 문제 없이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매디슨은 약속한 대로 여섯 시쯤에 그녀를 데리러 왔다.

‘거기까지는 참 좋았는데….’

비비안느는 계산대에 서서 쇼윈도 너머의 풍광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어슴푸레 내려앉기 시작한 곳에 봄 코트를 근사하게 걸치고 있는 매디슨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와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도대체 에드문드가 왜 매디슨과 같이 있는 거지?’

그녀가 무어라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어라 답했다.

‘그건 둘째 치고.’

저 남자를 피한답시고 샹프니야까지 왔는데도 둘이 같이 있다는 게 이상하게도 신경 쓰였다.

비비안느의 미간이 패고 있을 때 마침 누군가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손님인 줄 알고 그녀가 인사를 하려 했으나 옆에 서 있는 점원의 목소리가 빨랐다.

[아, 마감을 도와줄 사람이 마침 와서 이만 가 봐도 좋아요. 로잘리 양.]

[네.]

[저쪽은 제 형이에요. 이름은….]

비비안느는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했지만 시선이 자꾸만 창밖으로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후 일이 할 만했냐는 질문, 내일은 몇 시에 나올 거냐는 이야기가 오간 뒤 그녀는 일당을 받아 포셰트 안에 넣어 챙겼다.

가방의 체인을 들고 바깥으로 향하자 두 사람의 시선이 제게로 향했다.

매디슨이 대화 상대였던 에드문드를 두고 제 쪽으로 가까워졌다.

“비비… 아니, 로잘리!”

그녀를 사이에 두고 에드문드와 제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매디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무래도 아침 일이 걱정되어서 백작님께 연락했는데, 마침 사업차 샹프니야에 와 있다는 거 있지!”

“…그래, 정말 대단한 우연의 일치네. 그치.”

비비안느는 에드문드에게로 시선을 고정한 채 냉소했다.

“매디. 신경 써 준 건 정말 고맙지만, 말했잖아. 지금은 나랑 백작님하고는 완전히 정리됐고, 네가 콜트 백작님과 더 어울리는 일이 없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미안. 네 안전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었는데, 네가 이렇게 놀랄 줄은 몰랐어.”

“안전?”

비비안느의 목소리가 사뭇 가라앉았고, 동시에 기억 속 에드문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내가 널 구하러 온 것 같기도 하고.”

그 말은 믿지 않을 생각이었다.

“집에 낯선 이를 보낸 원흉이 백작님일 수도 있는데, 안전이라니. 매디.”

언젠가 매디슨에게 때가 되면 모든 걸 설명할 거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지금이 적기일지도 모른다며 비비안느는 집 방향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턱짓했다.

“가자. 집에서 다 설명해 줄게. 내가 왜 다아트로를 떠났는지, 아니, 정확하게는 누구로부터 도망쳤는지.”

“아냐.”

매디슨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 집에 찾아온 그 사람, 이상하게 엠머하임 공화국의 말로 인사했었단 말이야.”

“…….”

비비안느는 놀라서 에드문드 쪽을 다시 한번 훑었다.

그의 조직하에 다양한 국적의 갱들이 속해 있다는 건 사실이나, 그중 엠머하임 공화국이 연관되었다고는 들어 본 바 없었다.

에드문드의 진짜 정체를 의식하고 생각해 보아도 낯선 방문자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 전혀 연관이 없는 제삼자였다.

‘매디슨은 단순히 국적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렇다고 구해 주러 왔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생각은 없었다.

에드문드는 이쯤이면 한마디 했을 법도 한데 대화에 끼기는커녕 도로 쪽을 유심히 바라보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 말을 걸어 보려 했을 때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뛰어왔다.

“보스!”

아는 얼굴이었다.

‘그때 백작저 1층에서 에드문드와 이야기를 나누던 이방인이야. 다이아몬드 반지 자금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는데.’

유능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말을 차분하게 이어 나가던 모습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었으나, 저렇게 놀란 얼굴로 급하게 뛰어오는 걸 보면 위급한 일이 닥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게 뭘까.’

생각을 해 보기도 전에 그자가 거친 숨이 섞인 목소리를 토해 내었다.

“말씀하신 대로 무선 전신을 도청해 보았는데, 결론은 이곳, 지금 당장입니다. 엠머하임 놈들이 이쪽으로 사람을 보낼 거라고 하더랍니….”

그 순간 인근 차도 쪽에 차 한 대가 천천히 멈춰 섰다.

그 뒤로는 모든 게 다 느리게 보였다.

“저 사람이에요! 오늘 집에 찾아왔다던.”

뒷좌석의 차창이 천천히 내려감과 동시에 매디슨이 목소리를 높였고.

“조심하셔야 합니다. 저치들 계획에 의하면 레이디 메르고빌부터….”

맞은편에서 뛰어오던 이방인이 에드문드에게 경고했으며.

문제의 차량 창문 틈에서 총구가 스윽 돌출되어 나오는 순간, 비비안느는 저치들이 자신을 노렸다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어둠 속에서 전조등을 맞닥트린 토끼처럼 놀라서 멀거니 그곳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있다고 들어 봤어.’

드라이브-바이 슈팅(Drive-by Shooting).

암살자가 차를 타고 나타나 타깃을 제거하는 행위를 뜻했다. 많은 암흑가의 단원들이 이렇게 처분되었다고. 장정들이 거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싸늘한 시체가 된 사진을 신문 1면에서 보며 숨을 죽였던 때가 떠올랐다.

이제는 제 사진이 그 빈자리를 채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숨이 턱 막히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때.

짙은 체향이 코를 스침과 동시에 누군가가 제 앞을 막아섰다. 귀는 먹먹했고 고개를 들자 보이는 건 에드문드의 든든한 뒷모습이었다.

이어진 총성에 비비안느는 눈을 감았다.

타앙-.

탕-.

다시 시야가 되돌아왔을 때 에드문드가 빼 든 권총을 차창에 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차에 타고 있는 그들은 재빠르게 도주해 버렸다. 멀어지는 차의 뒤쪽 유리로 축 늘어진 사내들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에 정확히 두 발. 에드문드는 저 대신 총에 맞을 위험을 정면으로 감수하고는 암살자들을 명중시킨 것이다.

“…에드문드.”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언젠가 그처럼 대단한 이가 제 손에 죽어 주겠다며 속삭였던 것도.

무방비하게 잠든 그가 같은 방에 남겨 둔 총에 장전해 둔 것이 실탄이었던 것도.

지켜 주러 왔다는 다정한 말도.

이 사람을 믿으면 돌아오는 건 상처뿐이라는 걸 그간의 일들로 학습되어 잘 알고 있는데.

그를 보스로 믿으며 따랐던 뤼드빅이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잘 알고 있는데도….

이제는 그의 모든 행동들이 다 가짜고, 위협이며 조작된 것이라 의심하기 점점 힘들어졌다.

“다친 데는.”

혼란스러워하는 저에게 그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 비비안느는 힘겹게 입을 떼었다.

“없어요. 덕분에.”

때마침 가게에서 점원이 걸어 나오자, 에드문드를 ‘보스’라고 불렀던 이방인이 그쪽으로 걸어가 무어라고 이야기했다.

비비안느가 다친 곳은 없는지 에드문드의 몸을 살필 때 그가 자리를 옮기려 했다.

그때였다.

“왜 그랬어요?”

숨을 몰아쉬며 그의 팔을 잡은 건 어떤 감정에서였는지 몰랐다.

그의 무모함에 화가 났었나.

두려웠었나. 그가 이대로 가서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였나.

애써 감추려 했던 마음이 표정에 드러났다.

“왜. 이제는 너한테 아무것도 아닌 새끼가 죽는다고 큰일 나는 거 아니잖아.”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비비안느는 그의 팔을 더 꽉 쥐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랬냐고 물었어요.”

“…….”

“말마따나 죽을 수도 있었잖아요. 꼭 지금이 아니라도 말이에요. 저들이 엠머하임 공화국의 사람들이라면 고작 일국의 암흑가 보스로서 가진 힘으로는 대적하기 역부족일 거고….”

아니더라도 이건 당신 아버지 귀에 들어갈 수도 있는 일일 텐데.

왜 굳이 잡음이 날 일을 감수하느냔 말이었다. 그의 진짜 정체에 대한 실마리나 단서가 될 수도 있는 일을.

그때 에드문드가 제가 과거에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내 손에 죽는 건 어떨지 알아서 두렵다고 했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게 차가웠다.

“나는 반대야. 네 손에 죽는 게 어떨지 몰라.”

“…….”

“그래도 너 없이 사는 것보다는, 네게 죽는 쪽이 덜 끔찍하겠다는 생각은 여전해. 뭐든 네가 없는 것보다는 나아.”

“…….”

“이제 이 말을 믿어 줄 생각이 좀 드나?”

어제와 같이 그는 악명 높은 암흑가의 보스일 뿐이었는데, 더 이상 그가 두렵지 않은 이유는 뭘까.

“그러고 보니 나도 궁금한 게 있었지.”

에드문드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푸른 눈동자가 시선을 꿰뚫었다.

“너는 날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렇게나 싫고도 미웠다면서, 나를 걱정하는 이유가 뭐지?”

그 말에 비비안느는 실소했다.

“뭐라고요?”

“그렇잖아. 네가 처음 집을 나왔을 때 내가 사 준 옷은 마다했으면서 제과점 점원이 건네는 빵은 기쁘게 받은 것도.”

에드문드의 적선이 싫었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에게 동정받는 게 싫어서였다.

…그를 처음 만났을 당시에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는 특별했기에.

자존심을 세웠던 건 제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를 내심 좋아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게만큼은 고귀하고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고집을 부린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제과점 점원이 건넨 빵은 감사히 받을 수 있었고 그가 사 준 옷들은 마냥 기쁘게 받을 수 없었다.

적선의 대상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좋아하는 사람을 상대로는 누구나 그러지 않겠는가.

“공작저에서 나를 죽이겠다고 고백한 것도.”

그가 그저 수상의 아들이라 믿었을 때 그에게 암흑가 보스를 죽이겠다고 고백한 건, 암흑가의 보스가 요원을 앗아 간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불가능한 목표인 걸 알아도, 복수하겠다고 다짐하지 않으면 차마 견딜 수가 없어서.

요원을 만나 자유를 찾겠다는 목적을 잃고 공허해진 삶에 그럴 만한 명분이라도 있어야 살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어이 암흑가의 보스를 죽이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그 요원을 그만큼 절박하게 사랑했기에.

“그 대단한 절차 운운한 것도.”

그와 배를 맞대고, 결혼하는 데 있어 절차를 지켜 달라 부탁한 건 제가 빈껍데기 귀족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아서였다.

작위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는 시기에, 겉으로 보이는 격식이나 품위에 집착하지 않으면 제게 남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반면 그는 모든 걸 가졌다.

그 사실을 의식할수록 제가 얼마나 하잘것없는 신세인지, 어머니가 말했던 메르고빌 가문의 현 위치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절차를 논했고 고집했다.

그가 언제든 원하는 대로 침대에 이끌고 갈 수 있고, 그의 막대한 재력으로만 쉬이 얻어 낼 수 있는 신부라는 인상을 주기 싫었다.

“그래 놓고선, 레이디의 뜻대로 절차 지켜드리겠다니 기겁하며 그 중요한 품위 내던지고 샹프니야로 도망친 것도.”

그를 신뢰하지 못해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를 죽일지도 모르는 그를 해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아서였다.

그래서 저를 구성하던 이 화려한 빈껍데기와 허례허식을 버리고 그를 떠났다.

이제는 별것 없어 보이는 기존의 답답한 삶보다 그를 삶 속에서 지우는 게 더 값진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언젠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함께 행복해지는 걸 차마 두 눈으로 볼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만큼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제가 가진 것들을 놓아 버림에 미련이 없었다.

“네 약혼자 뤼드빅 렉스는 되고 나는 안 되는 것도.”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은 사람과의 불행은 견딜 만하겠지만, 죽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의 감정이 식어 가는 걸 보는 건, 그 사람이 언젠간 총구를 제게 겨누는 걸 보는 건 지옥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랬기에 뤼드빅 렉스를 택했었다.

그러니 에드문드에 대한 제 감정은 늘 같았고, 이 사실은 틀림없었다.

처음으로 집을 나와 그를 마음에 두고 열병 같은 짝사랑을 앓았던 때도, 요원이 죽었다고 믿으며 복수를 다짐했을 때도, 그를 떠나기로 다짐하고 다짐했을 때도.

다만 사랑할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만큼 그가 주는 온기에 목말라 있었으니까.

‘좋아해요.’

비비안느는 그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의 굳어 가는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때마침 안면이 있는 어느 이방인이 에드문드의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보스. 곧 정보국 측에서 다아트로 대사관을 통해 차량을 보내겠다 합니다. 가장 가까운 헬리패드로 이동해 신속하게 귀국하실 수 있도록….”

에드문드가 그쪽으로 서늘한 시선을 보내자 이방인이 입을 다물고는 뒤로 물러났다.

정적 속에서 에드문드는 재킷 안주머니를 뒤져 구겨진 편지 하나를 꺼내 제 손에 쥐여 주었다.

“아버지께서 우리 결혼을 허락했다는 편지야.”

“…….”

“이렇게 절차를 지켜 드려도 대답은 여전히 싫다는 건가?”

“…….”

“결혼해 줘.”

“…….”

“결혼하자, 비비안느.”

“…백작님 저는.”

비비안느는 힘겹게 입을 떼었다. 그가 요원이었을 때, 저는 그에게 목숨값을 받곤 했다.

이제는 제가 반대로 그에게 목숨값이라는 걸 줄 때가 되지 않았나 싶었다.

제 고백을.

“처음부터 쭉 백작님이 좋았어요.”

그 말에 에드문드의 표정이 달라졌다.

꼭 뒤통수를 얻어맞거나 충격적인 사실을 접한 뒤의 멍한 얼굴이었다.

‘그럴 법도 하지.’

그가 선뜻 내어줄 수 있었던 값비싼 말과 마차도, 그의 재산과 가문 이름도 제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총을 두고 무방비하게 잠들어 목숨을 제 손에 맡겼을 때, 그리고 이렇게 무모하게 제 목숨을 내버리려 했을 때 그녀는 그의 애정에 갈등하다 결국 굴복했다.

제가 그토록 원해 왔던 건 오직 그의 진심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모든 걸 걸어 준 그에게 돌려줄 수 있는 건 이런 고백뿐이었다.

“이번만큼은 제 감정에 솔직할게요. 원망했을지언정, 당신이 제게 아무것도 아닌 적도 없었고 두려워했을지언정, 원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

“그래서였어요. 도망친 것도, 백작님과 결혼할 수 없었던 것도, 처음 만났을 때 괜히 퉁명스레 군 것도.”

“…….”

“이제 제 마음을 아셨으니 그 대단한 절차라는 걸 지켜 주지 않으셔도 전 백작님의 것이고, 절 매혹하려 하지 않으셔도 제 침묵을 이용할 수 있으실 거고, 절 죽이고 싶으시다면 지금 당장 하실 수 있으세요.”

그 말과 함께 바람이 불어와 치맛자락을 흔들었다.

“어떠세요?”

에드문드는 대답 대신 걸어와 이마에 경건히 입을 맞췄다.

“이미 늦었어.”

고개를 비껴 귓가에 가까이 온 그가 저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낮게 속삭였다.

“이미 그 대단한 절차라는 걸 지킬 생각밖에 없으니까.”

“…….”

“돌아가자.”

에드문드가 그 말을 남기고 제게서 멀어져 시선을 맞췄을 때, 비비안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물 한 방울이 그의 볼을 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차량이 도착했고 그가 뒤돌았기에 비비안느는 그 모습을 오래 눈에 담지 못했다.

그래서 그 순간은 제 눈을 의심할 정도로 꼭 신기루 같은 허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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