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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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날, 샹프니야로 향하는 전용기에 오른 에드문드는 비비안느에게 했던 말을 생각했다.

    “내 전용기가 있는데 왜 그놈 헬리콥터를 타.”

    손에 들린 파일철을 한번 훑다가 맞은편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언젠가 이 전용기에 태워 주겠다고 했는데 그녀가 택한 것은 그의 곁이 아니라 샹프니야의 변두리 제과점 카운터였다.

    선택의 이유는 그녀가 친히 알려 주어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죽을 만큼 두렵다고 했다.

    “그런데 당신 손에 죽는 건 어떨지 알아서 너무나도 두려워요, 에드문드.”

    결혼식 날, 치를 떨며 우는 모습이 머릿속에 선연했다.

    비비안느는 정말 저를 미워하게 된 걸까?

    그게 아니라면, 그깟 품위를 지키겠다고 제 약혼자의 곁에 그 긴 시간 동안 남았으면서 제 곁에는 못 있을 이유가 뭘까.

    고작 제과점 점원의 적선은 기쁘게도 받아 챙기면서 제가 선물처럼 건넸던 모든 건 그리도 수치스러워할 게 뭐냔 말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무엇 하나 건넬 때조차 목숨값 운운하며 당위를 찾아야 했었다. 모든 선물은 적선이 아니라 맞교환이어야 했고, 그래야 그녀는 만족을 했다.

    그게 아가씨 자존심 지켜 주는 길이었고, 격을 맞춰 놀아 드리는 일이었으니까.

    굳이, 살인 청부를 해 뤼드빅 렉스를 제거하고 그녀의 가문을 압박하지 않은 것도 그 대단한 절차를 위해서가 아니었나.

    그런데 그토록 체면 중시하시던 귀족 아가씨께서 마음을 바꾸어 노동자 계층처럼 일을 하게 된 이유는 하나처럼 보였다.

    그만큼 제가 싫어졌기 때문에.

    끔찍했기 때문에.

    그녀가 분명 제게 희미하게 웃어 주었던 순간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머릿속에 그릴 수조차 없었다.

    그러니 애초에 그녀가 저를 사랑한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었다.

    그래.

    그녀가 저택을 나와 저를 둘러싼 잔인한 세상으로부터 도망쳤을 때 그 선한 본성으로 누군가를 원망할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다만, 미워할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었을지도.

    그 사람으로는 그녀의 삶에 끼어든 제가 적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가 주는 것들은 받을 수 없었던 것이고, 저에게 그렇게 쌀쌀맞게 대했던 것이다.

    그가 요원의 죽음을 위장하고 백작 신분으로 그녀의 앞에 나타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암흑가의 보스를 제 손으로 죽일 거라고 말했다.

    그 목표가 비현실적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역시 같은 이유로 미워할 사람이 필요할 뿐이라서.

    그리고 제 정체에 대한 모든 게 밝혀지고, 뤼드빅 렉스는 되고 저는 안 되는 이유도.

    그녀에게 그는 미워할 만한 사람이었기에 그런 게 아닐까.

    이 모든 게 명백해졌고, 그녀의 감정을 완벽히 이해한 지금에도 그는 그녀를 구할 생각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비비안느의 불행을 외면하는 법은 몰랐으니까.

    그녀에게는 자신의 존재가 기만 그 자체일지라도 그는 아주 욕심이 많아서 기어이 그녀의 구원이 되기를 바랐으니까.

    그러니까 이 사실이 그녀를 만나고 명백해져도.

    그녀의 웃음을 흐릿하고 희미하게라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에게 거절당하고 거절당해 제 삶이 비참함으로 가득 차더라도.

    저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뻔뻔하게 그녀에게 다가가 결혼 허락을 받아 왔노라 속삭이고, 그녀가 알 틈도 없이 위협을 치워 낼 것이다.

    그녀가 미워할 사람이 필요로 하고 있다면 이제는 그가 그녀의 잔혹하디잔혹한 삶을 등지고 그녀의 앞에 있을 테니.

    그녀는 해 왔던 대로 저를 원망하면 될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도 많으니 참으로 쉽지 않은가.

    모든 걸 잃을 각오로 제 정체를 드러내는 도박을 한 것도, 아버지에게 고개 숙인 것도.

    그녀가 저를 끔찍해하더라도 지쳤을 때 안겨 울 품을 내어 주기 위해서였으니 아무렴 상관없었다.

    의장은 일가와 함께 샹프니야 수도의 모 빌라에 은거했다. 탁자 위에 놓인 전신기 앞에 앉아 있던 그는 천천히 헤드셋을 내려놓았다.

    렉스 부인이 염려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의장이 마른 입술을 떼어 말했다.

    “에드문드 콜트가 샹프니야에 입국했다는군.”

    “그러면, 엠머하임 공화국 측이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었겠군요. 비비안느 메르고빌이 샹프니야에 있다는 말이 맞겠어요.”

    “엠머하임 공화국이라니요, 어머니?”

    한 청년이 읊조리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오자 렉스 부처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단정한 인상의 그는 두 사람을 마주 보고는 렉스 의장에게 말했다.

    “잠시 샹프니야에 정치적인 이유로 망명하는 거라고. 금방 고국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 하셨지 않습니까.”

    그는 렉스가의 유일한 적자이자 뤼드빅의 형이었다.

    “너는 나가 있거라.”

    의장이 탁한 목소리로 일갈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아들의 목소리는 집요했다.

    “아니요. 들어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무슨 생각이신지.”

    그 말에 의장은 그의 지난 행보를 돌이켰다.

    경관들은 제가 가족의 안위를 위해 한발 물러섰다고 단순히 알고 있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콜트 백작이 저를 협박하자 그는 묘안을 내었다.

    바로 뤼드빅이 만든 자료를 복제해 백작의 눈을 피해 은닉하고는, 자료를 엠머하임 공화국에 가져다 바치는 것이었다.

    극단적인 민족 우월주의적 사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베릴당원들이 원하는 게 전쟁이 맞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에드문드의 사업을 눈여겨볼 거라는 철저한 계산하에서였다.

    에드문드 콜트는 포섭할 수 없는 상대이므로 암살하여 싹을 없애 버리라 권했고, 베릴당 수뇌는 협조하겠다 일렀다.

    그 과정에서 서자인 뤼드빅은 백작의 시선을 분산할 희생양으로 버려졌다.

    ‘사형 선고를 받을 줄 예상하고 있었다만.’

    역시 아들은 아들이었는지 속이 쓰렸다.

    이를 갈며 뤼드빅의 자료를 손수 넘기러 샹프니야에서 엠머하임 공화국으로 넘어가려던 중 의장은 베릴당 측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들이 비비안느 영애를 주시하다 알게 된 사실인데, 그녀가 단신으로 샹프니야에 입국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베릴당 측에서 사람을 잘못 본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에드문드 콜트의 전용기가 국제공항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의장은 비비안느 메르고빌이 이 땅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네가 알 바는 아니래도. 이만 물러가거라.”

    의장은 아들에게 으름장을 놓고는 아내에게 눈치를 주었다. 금방 렉스 부인이 걸음을 옮겨 아들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정적이 찾아오자 의장은 다시 헤드셋을 썼다.

    베릴당 측에서 전신이 다시금 날아들었다.

    그들은 오늘 비비안느 영애를 먼저 죽여 없앤 뒤, 놈이 분노에 눈이 멀었을 때 유인해 마저 제거할 계획인 모양이었다. 하나 그것이 외교적인 문제로 번질까 우려한다는 뜻 또한 전달되었다.

    의장은 시가를 입에 물고는 고개를 돌려 제 서자가 유언처럼 남기고 간 자료들을 훑었다.

    그는 천천히 전보를 보내기 시작했다.

    「백작이 암흑가의 수장이라는 걸 증명하는 자료들이 있는데, 무엇을 염려하십니까.」

    눈동자에는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일이 끝나면 자료를 수상 측으로 전해, 콜트 백작은 암흑가 세력의 내부 분열로 인해 죽었다고 고하시지요. 수상도 저 자료가 세상에 드러나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 침묵할 게요.」

    의장은 습관처럼 시가를 자근자근 씹으며 그 전보를 보내는 걸 끝마쳤다.

    곧 때가 되어 베릴당의 세상이 오면 그때 그쪽에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아 낼 수 있겠지.

    그것만 한 복수가 없을 거라며 그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곧 답장이 돌아왔다.

    「메르고빌의 위치를 파악한 뒤 당장 처리하겠소.」

    그가 원하는 답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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