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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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비안느의 기대와는 다르게, 에드문드는 정보국의 도움을 받아 그녀가 황실 시녀 자격으로 샹프니야에 입국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위험하겠는데요.”

    자료를 넘겨 보던 이카로스가 읊조렸다.

    “…하필이면 샹프니야라니.”

    의장이 그곳으로 망명했다는 사실을 의식한 말이었다.

    “의장의 위치 파악은.”

    “렉스 일가 망명을 처리한 사람들에게 추적을 지시했지만 성과가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정보국 요원을 투입하거나 황실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

    “우선은 수상 각하를 통해 황실에 연락하여 영문을 물으심이 어떻겠습니까. 일단 정보국에 따르면 비비안느 영애께선 황실 시녀 자격으로 샹프니야에 입국했다 했으니까요.”

    “내 레이디께서 황실에 연을 두고 있는 모양이지?”

    “예. 2황녀를 잘 알고 계시는 듯하니, 이번 일에도 그분이 관련되어 있을 겁니다. …하나 직접 물으셨을 경우 2황녀 전하께서 비비안느 영애께 알릴 가능성이 있겠군요.”

    에드문드는 대꾸하는 대신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샹프니야에 있는 어느 저택의 주소를 말하며 연결을 부탁하자, 금방 신호음이 들리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이제 제 말에 귀 기울일 생각이 드셨나 보네요, 백작님.

    “카스터 양.”

    엘레노어의 목소리를 들으며 대답하자, 웃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가 매끄럽게 이어졌다.

    - 왜일까요. 모든 게 백작의 계획대로였을 텐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라도 있나요?

    “메르고빌 영애가 샹프니야로 향했더군요.”

    - 저런. 그래서 제게 부탁하고 싶으신 게…?

    “카스터 일가는 외식업으로 이름난 가문이지요. 최근 카스터 양께서 오래 기획하셨던 제과점 사업을 론칭했다고 들었습니다만.”

    - 그렇죠.

    “메르고빌 영애가 샹프니야의 수도에서 멀리 가지 않았다면 카스터 가문 산하의 레스토랑이든 카스터 양의 베이커리든 한 번쯤은 갈 겁니다. 귀족 영애 식성은 안 바뀌니까.”

    - 세상만사에 무심해 보이더니, 메르고빌 영애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는군요.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깔끔히 무시한 에드문드가 입을 열었다.

    “…만약 그 여자가 카스터가 소유의 음식점에 가면, 제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엘레노어는 웃었다. 한참 동안 깔깔거리던 그녀가 숨소리를 갈무리하는 듯 보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 죄송해요. 영애의 식성도 이렇게 잘 파악하고 계시고, 이렇게 전략적으로 움직이시는 게.

    잠시의 정적 이후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꼭 사냥이라도 하시려는 것처럼 보여서요.

    “협조해 주시겠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괜찮겠습니까.”

    - 왜요. 이제 저를 즐겁게 해 줄 렉스가 차남도 세상에 없을 텐데.

    “투자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시작한 제과점 사업에, 꽤 많은 돈을.”

    - …….

    “카스터 가문의 가주께 유능한 딸로 보여서 나쁠 것 없을 텐데.”

    - 고작 그거면 돼요?

    “이왕이면 비비안느 영애의 안전까지도 보장해 주시면 좋겠군요.”

    - 제가 당신 같은 암흑가 보스가 아니라 그것까지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아버지 소유의 레스토랑이나 제 베이커리 체인을 덫으로 쓰겠다는 것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그걸로 충분할 겁니다.”

    - 좋아요. 거래 성립이에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에드문드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보스.”

    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십니까.”

    수상 앞에서 당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초조함. 예민함. 강박이 묻어나는 얼굴은 참담해 보였다.

    비비안느.

    에드문드는 멀게만 느껴지는 그 이름을 곱씹어 보았다. 그가 그녀를 불렀을 때 자신을 돌아보던 수많은 표정들이 떠올랐으나 이내 흐릿해졌다.

    왜 하필이면 샹프니야일까.

    공허감이, 이 상황을 상상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근원적인 공포가 온몸을 잠식했다. 앞으로 그녀가 영영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면 그때 저는….

    그녀가 안전하다는 걸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죄어든 숨통이 트일 것만 같았고, 살아서 내각의 그림자 노릇을 할 이유가 생길 것만 같았다. 제 아버지가 손수 적은 결혼 허락 편지라도 그 고운 손에 쥐여 주고 믿어 달라는 말을 입에 올리고 싶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그녀를 구하는 게 아니라 저를 구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니 그녀가 입에 올렸던 그 빌어먹을 사랑이라는 게 사라지기 전에 움직여야 할 텐데.

    초조한 마음과는 달리 그는 처음으로 무력하게 자리에 앉아 누군가의 소식을 잠자코 기다려 보았다.

    지금 당장 원하는 결과를 받아 보는 방법도 물론 있었으나, 선택지에 두지 않았다. 그녀가 놀라서 더 먼 곳으로 도망치지 않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정보국 요원을 보내는 방법은 오히려 악감정만 불러일으킬 것이고, 2황녀에게 행방을 묻다가 비비안느가 오히려 의장의 손아귀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렇게 희망 고문을 하며 전화기 앞에서 고통스럽게 닷새를 더 보낸 뒤에서야, 그는 샹프니야에서 기다렸던 연락을 받았다.

    정말로 비비안느 영애가 머핀이 설치된 덫에 걸린 것이었다.

    5일 전, 눈뜨자마자 집 앞의 우체통을 살피러 나갔던 비비안느는 놀란 얼굴을 했다.

    초심자의 운이었는지 그녀가 구인 광고를 보고 보낸 편지에 대한 답이 와 있었다.

    수도 부촌에 있는 어느 카페에서 보낸 것이었는데, 메뉴를 다아트로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기겠다는 답신이었다. 또한 매일 그곳으로 와 호객용 입간판에 화려한 필체로 메뉴를 각각 다아트로어와 샹프니야어로 써 달라는 요청이 이어졌다.

    닷새 사이에 그녀를 찾는 곳은 점점 더 많아졌고, 비비안느는 우체통을 살필 틈이 없이 방에 놓아둔 책상 앞에 붙어 있었다.

    오늘은 꽤 유명한 레스토랑의 총주방장이 의뢰한 대로 그곳의 메뉴 카드를 완성해 가야 했다.

    분량은 총 100매.

    동이 터 오름과 동시에 비비안느가 99개의 똑같은 메뉴 카드 위에 마지막 카드를 올려 두었다.

    부푼 잉크가 잘 마르라고 후후 입으로 불어 주고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밤을 꼬박 새웠지만 이상하게도 정신은 말끔했다. 본가에 있을 때보다 성취감이 들어 그녀는 어느 때보다 살아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가볍게 몸을 씻고 나온 뒤, 옷을 입고 챙긴 가방에 메뉴 카드를 소중히 집어넣으니 오전 6시였다.

    그녀는 매디슨을 깨우지 않고 조심스레 집을 나섰다.

    상쾌한 공기를 느끼며 삼십 분 거리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해 발을 들였다. 마침 웨이터가 그녀를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 오셨군요!]

    [안녕하세요.]

    비비안느는 샹프니야어로 인사하며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메뉴 카드 백 장이 들어 있어서 두께가 꽤 도톰했다.

    [오늘은 총주방장님께서 같이 안 계시네요.]

    웨이터가 메뉴 카드를 확인할 때, 그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총주방장은 이곳의 가장 높은 이로, 메뉴 카드를 직접 검토한 뒤 급여를 주곤 했었다.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페이는 제가 직접 전달 드리기로 했으니까요. 총주방장님께서 레이디의 실력은 익히 알고 있으니 그렇게 해도 괜찮다 하더군요.]

    [그런가요?]

    비비안느는 벅차오르는 마음을 숨기고 종이봉투를 만지작거렸다.

    ‘인정받았어.’

    한참 그 감각에 취해 있을 때, 웨이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 저번에 총주방장님 부인께서 이곳에 오셨을 때 메뉴 카드를 보시고 아주 세련되었다고 하시더군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로잘리 양. 더 큰 레스토랑이 연락해 오면 저희에게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비비안느는 인사를 하고 나와 길거리를 걸었다.

    ‘로잘리 양.’

    더 이상 쓰지 않는 그녀의 미들 네임이었는데 그렇게 불리는 게 썩 좋았다.

    ‘사람들도 나를 알아보는 것 같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야.’

    이곳은 샹프니야이니 다아트로 제국의 소식에는 다들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설령 렉스 가문의 둘째 아들 약혼녀까지 속속들이 알 만큼 타국 정치에 관심 많은 사람도, 주로 라디오를 통해 소식을 접했을 테니 제 얼굴을 보고 이름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으리라.

    최근에 다아트로 언론이 조명한 것도 그녀가 아니라 뤼드빅 렉스의 얼굴인 만큼, 비비안느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더 큰 레스토랑이면 수도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카스터가의 레스토랑 체인일 텐데.’

    어차피 그곳은 갈 일이 없을 테니 쓸데없이 에드문드가 알던 이와 엮이지 않는 셈도 되겠고.

    신난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좋은 냄새가 나서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여덟 시가 빵 나오는 시간이구나.’

    매디슨이 매일 아침 산책을 하며 식사로 먹을 빵을 사 오던 걸 기억하고는 쇼윈도 쪽으로 다가갔다.

    빵 나오는 시간까지 20분이면 된다는 생각에 그녀는 잠시 기다릴까, 고민하다가 집에 가서 쉬기로 했다.

    그때 딸랑- 하고 벨이 울리고 누군가가 밖으로 튕기듯 튀어나왔다. 비비안느는 의아한 눈빛으로 점원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 하고 자신을 훑더니 서두르는 투로 입을 열었다.

    […호, 혹시 신문에 난 구직 공고 보고 오셨나요? 이곳 점원 구한다는 거요.]

    [구직 공고요?]

    최근에 신문을 보며 구직 공고를 오려 내었으나 제과점 점원을 구한다는 것은 없었던 걸로 기억했다.

    ‘그새 생겼나.’

    비비안느는 가볍게 넘기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데 제가 지원해도 될까요?]

    식당의 메뉴를 번역한다거나 메뉴 카드를 제작하는 일은 밤에 해도 되는 일이었다.

    복잡한 머릿속 생각을 떨쳐 버리는 데에 몸을 움직이는 것만 한 게 없을 것 같아, 그녀는 충동적으로 그 빈자리에 관심을 가졌다.

    [네, 그럼요. 물론이죠.]

    직원이 화색이 된 것을 보면 이곳의 일이 고되긴 한 모양이다.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길 때 의장 부인이 언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암흑가 사업과는 관계가 없는, 수많은 레스토랑 체인을 거머쥔 카스터 가문의 딸이라 하니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겠죠. 샹프니야에서는 꽤 이름난 집안이고요.”

    그때 엘레노어의 가문이 베이커리 체인을 소유하고 있단 이야기는 없었으니까, 문제없겠지.

    엘레노어 카스터가 제가 가지지도 않은 많고 많은 베이커리 체인 중 하나, 그것도 수도 외곽에 있는 지점에서 제가 일하고 있다는 걸 알아챌 확률은?

    극히 적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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