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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문드는 매일같이 비슷한 시각에 색다른 꽃을 사 들고 비비안느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온 건 비비안느가 제국을 떠난 날 밤이었다. 후작저 사용인이 혼란스러운 저택 상황을 에드문드에게 보고한 것이다. 아가씨가 사라졌다며.
이 갑작스러운 상황의 단서라 할 만한 것은 그녀가 베개 아래에 숨겨 두었던 편지 한 장.
그곳에는 저택을 떠나겠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어디로 간다는 설명은 없었다.
다행인 건 비비안느 같은 부류의 행동반경은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과감한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니 국내에 있을 것이다. 제도만 뒤지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았다.
“오늘 교도소에 면회 간 뒤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더군.”
에드문드는 저택 응접실에 모습을 드러낸 제도의 지부장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후작저 사용인들이 교도소 정문 인근 행인들에게 인상착의를 제시하며 물어봤는데도 다들 본 적이 없다고 하고. 그래서 네가 대신 비비안느 영애를 찾아내 줬으면 하는데.”
“예. 그런데 그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이곳으로 모실까요?”
지부장이 말을 고르고 있어서 정중하게 들릴 뿐 결국엔 납치해 데려오겠다는 말이었다. 에드문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마.”
“예? 그러면 어떻게….”
그가 말끝을 흐리며 에드문드의 의사를 묻는 표정을 해 보였다.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속이 시커먼 놈들이 접근하려 하면 치우고, 쓸데없이 해외에 나가지만 못하게 해. 엠머하임 공화국은 안 되고, 메칼렌티아도 위험해.”
“예.”
“그리고 무엇보다도, 샹프니야도.”
“메칼렌티아는 파시스트 독재자가 집권하고 있으니 위험하다 쳐도, 샹프니야는 위험요소가 없는 다아트로의 우방 아닙니까?”
“그곳으로 의장이 망명했어.”
“그렇군요.”
“아무리 매정한 아버지라도 아들의 사형 선고를 전해 들었으면 속이 편하지 못하겠지. 처음에는 완벽한 도피처 같아 보였던 샹프니야행에 대한 환상도 지금쯤이면 끝났을 테고. 마침 비비안느가 제 발로 그곳에 걸어갔는데 그 야심가가 복수할 수 있다는 유혹을 뿌리치긴 힘들 테니까… 위치 파악해서 다치지만 않게 해.”
“알겠습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에드문드는 문 뒤의 사람에게 응접실로의 출입을 허가했다.
그러자 뜻밖의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등장했다.
라이너스 메르고빌.
작년에 비비안느를 저택으로 데려다주던 날 그를 본 적 있었다.
라이너스를 이곳으로 안내해 준 여인이 예를 표하고는 종종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그는 비비안느의 오빠라며 자기 자신을 소개하지도 않고 제 할 말을 빠르게 늘어놓았다.
“소식은 들으셨을 거라 믿습니다. 후작저 사용인들 태반이 당신 사람이니, 오늘도 저택 소식을 전했겠지요.”
“…….”
“제국 국제공항에 가 보았는데도 그 애가 오늘 비행기를 탄 기록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에드문드는 안도했다. 라이너스는 바쁘게 말을 이었다.
“그러면 국내에 있다는 건데… 그 애가 알고 지내는 친구의 하숙집에 가 보니, 하숙집 주인이 말하길 그 애가 차를 얻어 마신 뒤 친구인 매디슨과 어디론가 향했다 하더군요.”
“…….”
“비비안느가 이곳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 말에 라이너스의 표정에는 절망이 서렸다. 에드문드는 저 목석같던 사람도 얼굴을 일그러트릴 수 있다는 걸 보았다.
곧 라이너스가 마음속의 감정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부모님께서는, 이번에도 일을 키우려 하지 않을 겁니다.”
“…….”
“이 꼴이 났는데도 또 다른 렉스가가 되어 줄 혼처를 찾고 있으니까요. 어차피 그 애가 금방 돌아올 거라 믿고 오히려 딸의 이름이 암흑가의 피해자로서 오르내리는 상황을 즐길 겁니다.”
“…….”
“도와주십시오.”
눈빛은 매서웠고 고개를 숙이는 태도에는 절도가 있었다.
경시청의 소문난 에이스라더니만 동생을 위해서라면 부모님의 거래 상대인 뤼드빅이 처리당하는 걸 눈감고, 제 앞에 와서 부탁을 할 줄도 아는 모양이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에드문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제가 아까 후작 내외께서 아직도 혼처를 찾고 계시다 들었던 것 같은데, 맞습니까?”
“…예.”
“그럼 처남 되실 분인데. 말 편하게 하시지요.”
그 말에 지부장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라이너스를 훑었다.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할 때 에드문드가 말을 이었다.
“레이디는 제가 찾아 보호할 테니 이만 마음 놓고 복귀하셔도 좋습니다.”
라이너스가 경찰 제복을 입고 있다는 걸 의식한 말이었다.
뤼드빅 렉스의 판결 확정 이후 나흘, 세상은 조용한가….
메드윅가 3번지, 다아트로 총리 관저.
수상은 손에 들린 신문의 헤드라인을 바라보았다.
‘벌써 놈의 항소 기간이 끝난 뒤 4일이나 지났다고.’
책상 위에 놓인 뤼드빅 렉스의 교도소 면회 녹취록 쪽으로 눈길이 향했다.
놈의 판결이 확정되기 몇 시간 전, 메르고빌 영애가 그를 면회하러 교도소에 찾아왔다고 했다. 둘이 나눈 대화는 특별할 게 없었다.
행간을 읽자면 뤼드빅 렉스는 결과에 승복하기로 했고, 메르고빌 영애는 그를 두고 떠났다는 것 정도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녹취록에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거대한 헤드라인 아래의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다아트로의 암흑가를 지배한 ‘뤼드빅 렉스’. 그는 1급 살인죄로 최고형을 선고받았다.
콜트 내각이 부패 척결과 암흑가 세력의 철퇴라는 핵심 공약을 이행한 것이다. 이후 내각에 대한 지지율은 출범일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달성했고(87%), 이대로라면 콜트 수상의 연임이 유력해 보인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것이 과연 ‘평화’인지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엠머하임 공화국의 내각이 완전히 신뢰를 잃고, 파시즘과 극단적인 민족 우월주의 사상을 내세우는 베릴당이 인기를 얻으며 다음 총선에서는 그들이 집권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잇따른다.
반면 우리 다아트로의 재정 상태는 역대 최악이며 1차 세계 전쟁 이후로 무기 산업은 쇠퇴하여 생산 라인에는 먼지가 앉았다. 다아트로는 이 단편적인 ‘승리’에 도취해 국제 정세를 외면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닐지….
수상은 피로한 눈을 감았다. 그러자 황제를 알현한 날,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정도 무기라면 신대륙 최강국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 생각하네. 그리고 자네 아들은 사업에 재능이 있어. 아주 영리한 인재이지.”
그건 그 자신도 익히 알고 있었다. 이 정세를 몇 년 전부터 읽어 오고, 이날만을 위해 차곡차곡 준비해 왔다면 제 아들은 미래를 볼 선구안이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돈을 이렇게 효과적으로 불릴 수 있다니.
금지된 약을 유통하지도 않았고, 포주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일에 손을 뻗으려던 갱들을 아들은 차근차근 짓밟으며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참 깨끗하게 장사했다 싶었다.
머릿속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네가 이번 일로 연임하게 된다면 또 다른 6년의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해.”
“폐하.”
“그러니, 차라리 이용하는 건 어떤가?”
모든 갱 보스들의 꿈이 사업을 합법화하는 것이었으나 그 과정은 주로 평생에 걸쳐 이루어졌고, 그렇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로 그쳤다.
하지만 제 아들은 그걸 고작 채 한 달도 되지 않는 시간 내에 이루었다.
다아트로 제국의 군주 또한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나라면 이 자료들을 누가 무슨 이유로 보냈는지 생각하는 데 시간을 쓰겠네. 그리고 자네의 아들을 회유할 방안을 고민하겠지.”
수상은 정보국의 일급 기밀을 보관하는 문서 보관실에 놓인 서류들을 생각했다.
정황을 추적해 보았을 때, 그것들은 뤼드빅 렉스가 만든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걸 정보국에 보낸 것은 그가 아니었다.
‘뤼드빅 렉스는 그 자료들로 진짜 보스의 정체를 폭로하려다, 되려 제가 암흑가의 보스라는 누명을 쓰고 폐기된 거겠지.’
오히려 누군가가 이 상황을 예측하고 고의로 자료를 흘렸다는 것이 더 설득력 있었다.
이 상황에서 가장 크게 득을 본 사람이 누구인지에서부터 생각을 해 보면 간단했다.
그러니 정보국으로 자료를 보낸 ‘익명의 제보자’란….
똑똑똑.
때마침 들려온 노크 소리에 콜트 수상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들어오게나.”
그는 문 뒤에 있는 상대가 수석 보좌관일 것이라 생각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다른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더 젊고, 더 수려하며 저를 닮은 얼굴을.
에드문드 콜트.
제 아들이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수상은 황제와의 알현이 끝난 때부터 지금까지 제 아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언론이 보도하는 제 승리가 영원하기 위해서라면 그의 협조가 불가피했으므로.
심사숙고한 뒤 불러내려 했던 상대가 제 발로 이곳에 걸어 들어왔다. 그 과감한 움직임에 수상은 긴장하며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제 추론에 의하면 그 문서를 정보국에 보낸 ‘익명의 제보자’는 제 아들일 테니까.
그는 자신의 정체를 제 손으로 폭로하고도 살아남을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수상은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또 축하라도 하러 온 셈인 게냐?”
“글쎄요.”
에드문드는 속 모를 미소를 지으며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언론이 말하는 승리란 아버지의 것이 아니라 제 것일 텐데, 누가 누구에게 축하를 드린다는 말입니까.”
그 말에 수상의 표정이 굳었다. 상대도 이 비가시적인 기류를 모른 척할 생각이 없다는 의사였다.
“원하는 게 뭐냐.”
탐색전은 끝이 났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수 있게 해 주어서 참 다행이라 해야 하나.
오랜만에 본 아들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그와 낭비할 시간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수상은 그제야 생각했다.
‘가만, 내 아들이 그간 무엇을 하고 있었더라.’
미행을 붙이면 의심을 살까 봐 그의 주위를 살피지 않았다.
그때 온 다아트로를 속인 야심만만한 아들이 입을 열었다.
수상은 긴장하여 마른침을 삼켰다.
제 아들이 바라는 건 뭘까.
정치를 하고 싶다고 할까? 빈 귀족원 의장 자리를 노린다는 걸까. 아니면 황제의 부마가 되고 싶다고 하는 건 아닌지. 이미 돈과 권력은 차고 넘치게 가진 이가 바라는 건…?
“비비안느 영애와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
“허락해 주십시오.”
그 패기 어린 말에 수상은 그대로 굳었다. 아니, 그러니까 무려 그 다아트로의 ‘진짜’ 보스가 제 정체를 제 손으로 폭로하며 목숨을 거는 도박을 한 뒤, 나타나서 하는 말이.
고작 가진 건 혈통뿐인 집안의 별 볼 일 없는 영애와 결혼을 하고 싶다는 거라고?
“결혼이라면 두 사람만 좋다면야 스스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일 텐데, 굳이 내 허락을 얻겠다고.”
“레이디 메르고빌의 부모님께서 원하셨습니다.”
허어.
수상은 혀를 내둘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게다가 제 레이디께서 절차를 워낙 중요시하는 귀족이셔서 말입니다.”
“…….”
그러니까, 정말 나라의 명운이 달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 결혼 허락이라는 것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것인가?
“그래. 하거라, 결혼.”
이건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라 다른 선택지란 없는 제안을 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또.”
아, 이번 것이 진짜인 모양이었군. 앞의 것은 고작 제 경계를 늦추려는 것일 테고.
수상이 자세를 고쳐 앉자 에드문드가 말을 이었다.
“레이디 메르고빌의 전국적인 수색을 요청합니다.”
“…….”
“정보국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말과 함께 그의 책상 위에 무언가가 스윽 내밀렸다.
그건 바로 치안총감의 아들 토미가 미라볼타 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사람을 폭행해 죽음에 이르게까지 하고, 살인을 은폐한 건에 대한 증거였다.
경시청은 그 사건을 기소하지 않았고, 그 기념비적인 사건은 자신이 이 자리에 서서 썩어 빠진 다아트로 경시청을 개혁하겠다고 다짐하게 했다.
하지만 황실 기소청을 세워 경시청의 기소권을 빼앗고 감독하거나, 내무부 장관이 진두지휘하는 특별 조사 위원회로 경시청을 털기에는 증거가 부족했다.
그 사건이 부당하게 묻혔다는 증거가 있어야 했다. 증거가…!
그리고 그 증거가 이곳에 있었다.
한때는 암흑가 세력이 이 증거를 손에 넣고 경시청을 마음대로 주물렀다고 들었다.
그 대가로 암흑가의 보스는 경시청에 렉스 가를 먹잇감으로 넘겨주며 그들을 추켜세워 주는 듯하더니만, 이제는 그 경시청마저 한꺼번에 무너트릴 수 있는 단서를 제게 넘기고 있었다.
고작 귀족 영애 하나 때문에.
오만한 작태, 자만심은 한층 누그러들어 있었고, 대신 그녀를 되찾아야겠다는 열망과 설명할 수 없는 회한이 서려 있었다.
표정에 드러난 긴장감은 그녀를 당장에라도 찾고 싶다는 조바심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 모든 상태를 도합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미쳐 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그러고 보니 제 아들은 2황녀와 비비안느 영애가 맞붙었다는 날에도, 죽었다던 제 경주마나 2황녀는 안중에도 없고 비비안느 영애가 괜찮은지부터 묻지 않았나.
“…레이디 메르고빌을 찾은 지 며칠이나 흘렀지?”
“나흘입니다.”
참을성이 다 닳은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상은 제 아들의 약점을 이제야 간파해 여유를 되찾고는 말했다.
“그간 잘 쥐고 있었던 치안총감의 목줄을 가져다 바친 걸 보면, 여태까지의 수색은 무의미했던 모양이군.”
“…….”
에드문드는 대답 대신 미간을 희미하게 찡그렸다.
아무리 제 아들이라지만 저토록 완벽한 이가 여자 하나 앞에 무너진다는 게 참 신기했다.
“제국 밖으로 나간 거라면, 저 혼자서는 데려오지 못할 거라는 점이 우려됩니다.”
아들의 잠긴 목소리가 힘겹게 새어 나왔다.
그는 완벽한 압도 우위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제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자신을 낮추며 대화를 이어 갔다. 자료를 통해 보았던 협상의 귀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정말 제 아들답지 않은 태도였다. 오직 비비안느 영애를 상대로 그는 달라졌다.
“원하는 건, 비비안느 메르고빌 영애의 무사 귀환 하나뿐입니다.”
“그러면 넌 날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지?”
수상은 흡족해져서 물었다.
아들의 답은 역시나 상상을 초월했고, 그의 기대를 뛰어넘었다.
“이 땅에서는 야당을 그림자 내각이라 부른다지요.”
뒷짐을 지고 서서 아들은 나직이 입을 열었고, 수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
현재 다아트로의 제1 야당은 제 아들과 강한 유착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이라 들었다.
“제가 아버지의 그림자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야당과 여당처럼 상호 배타적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상호 보완적인 관계.
빛과 그림자.
제가 빛 속에 있다면 그 뒤에서 제가 영원한 승리자가 될 수 있도록 저력을 바쳐 돕겠다는 것이었다.
머지않아 수상은 암흑가의 보스를 잡아낸 데다가 경시청의 부패를 청산하고, 엠머하임 공화국이 침략해 온다면 그 암흑기에도 훌륭하게 대비해 낸 지도자로 역사에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영광의 이면에는 제 아들이 그림자처럼 있어 저를 더 빛나게 해 줄지니….
그가 이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황제가 조언했듯 그는 사냥꾼이 아니라 정치인이었으므로.
모두 제 아들이 제 손으로 문서를 정보국에 보내며 계획한 대로일 테다.
그렇게 비비안느 메르고빌 영애의 추적이 시작되었다.
샹프니야.
그곳의 수도에 한밤중에 도착했을 때, 비비안느가 헬리콥터에서 내려다보는 땅은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어둠 속에서 빛이 반짝이는 모습은 닷새가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여운을 남겼다. 집안 사정이 좋았을 어렸을 적 외에 일평생 제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았던 그녀에게는 그 순간이 마치 해방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그 남자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아무리 에드문드 콜트가 다아트로의 암흑가를 지배한다고 해도, 그의 힘은 국경을 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그가 저를 찾으려 한다 해도 결국 제 사람들을 움직여 다아트로를 구석구석 뒤지는 것에 그칠 뿐. 그 일마저도 수상의 눈을 피해 가며 해야 할 테니 흐지부지될 게 뻔했다.
제가 샹프니야에 입국했다는 정보는 더더욱 얻지 못할 것이니 추적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이곳에서 열심히 살아 볼 생각이었다.
그와의 기억을 곱씹을 틈도 없이 스스로를 몰아붙이면, 그가 점점 지워지겠지. 에드문드 또한 저를 잊고 살다가 2황녀의 마음을 받아 주게 될지도 몰랐다.
제 계획을 아는지 화기애애한 낯을 하던 2황녀가 쉬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다아트로 황족의 시녀들은 비자 없이도 샹프니야에 머물 수 있어. 이쪽은 내 고모야, 넌 형식적으로 내 고모의 시녀 자격으로 입국한 셈이고.”
그렇게 2황녀의 소개에 따라 그녀의 고모 저택에 매디슨과 이틀간 머무르다, 전 약혼자와의 반지를 전당포에 맡기고 작은 집을 월세로 구했다.
시녀 자격은 상프니야에 체류할 수 있도록 빌린 형식적인 것뿐이라 신세를 지던 저택을 나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작은 집에 이것저것 들이고 꾸미는 데 하루, 길거리를 구경하며 여독을 푸는 데 하루, 일자리를 알아보며 신문에 난 구인 광고를 열심히 오리고 편지를 보내는 데 하루.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오늘은 타지에서 보내는 여섯 번째 날이었다.
샹프니야의 공기 속에서 눈을 뜨는 것이 문득 비현실적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자 따사로운 햇볕이 흰 레이스 커튼을 넘었다.
‘이제야 시녀들이 시중들러 오지 않는 게 적응이 될 것 같달까.’
슬리퍼에 발을 꿰어 넣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고 매디슨이 벌컥 문을 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허락을 받고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에도 이렇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어, 일어났네? 아무렴 역시 귀족이라 아침 예닐곱 시쯤에는 눈이 잘 안 떠지지?”
“그런 건 아니야, 매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을 했다. 매디슨이 빠르게 걸어와 침대에 걸터앉고는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흔들었다.
“난 네가 잘 동안 부지런하게 아침에 먹을 빵을 사 왔지.”
그녀가 씨익 웃으며 함께 들고 있던 작은 봉투를 비비안느의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이건 내 선물. 내가 매일 사 오는 딱딱한 빵들 말고 조금 더 번화한 데에서 비싸게 주고 사 온 마들렌이야. 티 푸드로 먹었으면 해서.”
봉투 안을 펼쳐 보니 조개 모양의 폭신폭신한 빵이 들어 있었다. 버터를 아끼지 않고 쓴 것인지 아주 노릇노릇해 보였다.
“고마워. 잘 먹을게.”
“뭘, 변두리라도 수도에 붙어 있으려면 당분간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텐데, 이 정도는 집들이 선물로 줄 수 있지.”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말에 비비안느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가문을 벗어났으므로 그 선택에 대한 책임 또한 뒤따르는 것이다. 그녀는 최대한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보려 노력했다.
‘몸이 바빠야 잡생각이 들지 않으니까.’
이를테면, 간헐적으로 드는 그 남자 생각이라든가.
‘손이 빠르니까 속기사나 비서 일을 할 수도 있을 거고, 아는 단어의 양이 많고 상류층다운 언어를 구사할 수 있으니, 통역이나 번역 일자리를 구하면 되지 않을까. 혹은 부유한 가문 안주인의 말벗이 되어 줄 수도 있고.’
비비안느는 거기까지 생각한 뒤 빵 봉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주방으로 가자. 네가 빵을 선물해 줬으니 차는 내가 탈게. 마들렌은 같이 먹고.”
“응!”
매디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섰다.
곧 찻주전자와 찻잔이 담긴 쟁반이 매디슨 앞으로 놓였다. 매디슨이 종이봉투를 찢어 마들렌을 집어 먹기 편하게 하자, 비비안느는 잠자코 지켜보다 새 접시를 꺼내 예쁘게 플레이팅 했다.
매디슨은 찢긴 종이봉투 위에 놓인 빵을 손으로 집어 먹곤 했지만, 왠지 이렇게 해야 성이 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이프와 포크를 테이블 양쪽에 놓고는 식기를 들어 마들렌을 잘라 먹고 있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비비안느. 그냥 2황녀 전하 고모님 별장에서 시녀로 일할 생각은 없어?”
“음, 왜?”
답한 비비안느는 포크 끝에 놓인 마들렌을 우물거리다 찻잔을 들어 홍차를 삼켰다. 그러자 매디슨이 그녀를 천천히 훑으며 말했다.
“더 어울려서. 보수도 그쪽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을 거 같고.”
…그러면 언젠가 그 남자가 2황녀와 맺어지게 되었을 때, 자신은 그 두 사람의 시중을 들고 있겠지.
“아냐, 괜찮아. 꼭 귀족 영애로서 할 수 있는 일 말고 다른 일도 해 보고 싶어서.”
그렇게 결국 고집처럼 쥐고 있었던 품위에 대한 집착을 내버리게 되었다.
‘저택에 머물러서 부모님의 뜻대로 사는 것보다는, 이 선택이 훨씬 더 나았다고 생각할 날이 언젠가는 올 거야.’
이러한 삶을 은밀하게 동경해 왔으니 자존심과 조금 타협하면 될 문제였다.
어차피 저를 아는 사교계 사람들은 이곳에 없으니 딱히 큰 문제가 되지 않기도 했고.
‘에드문드만 이 삶에서 지울 수 있다면.’
그렇다면 아무렴 상관없었다. 드디어 숨통이 확 트이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