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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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비안느는 교도소의 후문으로 나왔다.

    저택으로 향하는 정문의 랭스턴 리무진을 타기 전 숨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탁 트인 풍광을 본 비비안느는 잠시 고민했다.

    꼭 정문으로 가야 할까?

    이대로 걸음을 옮기면 트램을 탈 수 있는 곳으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정문으로 향해 집으로 돌아간다면 에드문드를 마주치리라. 근래 그는 후작저로 찾아와 할 말이 있다며 제 사용인을 통해 꽃과 편지를 전달하려 했으니 후작저 현관에 있을 게 틀림없었다.

    결혼식장에서 한 거절을 번복할 정도로 마음이 아물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를 볼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가 주겠다는 삶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또는 이전과 같은 삶도 마찬가지로.

    ‘에드문드가 주겠다는 삶도, 앞으로 이어질 귀족 영애로서의 일생도 모두 싫다면… C안은 어떨까?’

    선택의 기로에서 그녀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길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쪽으로 한 걸음 옮겼다.

    생각보다 처음 저택을 나왔을 때처럼 가슴이 강하게 뛰지는 않았다.

    다만 거대한 대문 밖의 세상에 자신을 던져 놓는 데서 느껴지는 일말의 긴장감. 제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뱃속 깊은 곳을 울렁이게 했다.

    ‘그래. 다시 한번, 이 삶에서 벗어나는 거야.’

    5월 초의 봄바람이 긴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고 길거리에 피어난 꽃들이 시야를 확 틔운다. 흐드러진 꽃잎들이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음을 덤덤히 알리는 듯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하나의 점이 되었다.

    관광 지도를 꼼꼼히 살피며 트램에 몸을 싣고는 메이브리엄 86번지로 가는 길을 눈으로 훑었다. 자리가 있었음에도 문이 열리고 닫히는 입구 가까이에 서서 바뀌는 거리 풍광을 보았다.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를 쥔 채 걸음을 옮기는 신사도 보고, 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이발소 점원도 본다. 덜컹거리는 차체 아래 철로가 햇볕에 반짝거리는 것도, 여학교 학생들이 무리 지어 걸음을 옮기는 것도 본다. 햇볕이 그들을 축복하듯 덮으며 이 평화 속에 어우러진다.

    이런 세상을 어떻게 모르고 살아왔을까?

    이 자유의 공기를 오랫동안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매디슨, 언젠가 네가 나한테 말했었잖아.”

    오늘에서야 비비안느는 매디슨이 머무르고 있는 하숙집 주인인 메이웰 부인의 차를 대접받을 수 있었다.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메이브리엄 86번가의 하숙집 식탁, 비비안느는 찻잔을 앞에 두고 매디슨에게 말했다.

    “응.”

    한 손으로 신문을 든 채 의자에 기대어 있던 매디슨이 고개를 들어 답했다. 오겠다는 말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인데도 그녀는 저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나, 이만 출가할까 해.”

    비비안느는 다시 시선을 옮겨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았다.

    그 아래에 있는 흰 식탁보의 딸기 무늬가 예쁘다고 생각하며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오 그래? 잘됐다. 집 구하는 거 도와줄까?”

    매디슨이 들고 있던 신문이 둥근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응. 그런데 다아트로에는 말고.”

    “그러면 어디?”

    “제국 밖으로 나갈 생각이야.”

    이곳에 있으면 어디로 가든 에드문드의 세력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난 샹프니야어도 하고, 메칼렌티아어로 일상생활 하는 데 문제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샹프니야에서 온 엘레노어는 에드문드와 결탁하긴 했지만, 그의 세력과는 완연히 무관한 집안의 딸이었다.

    ‘샹프니야는 에드문드의 세력이 장악한 땅이 아니라는 말이지.’

    그곳에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매디슨이 책상 위에 놓인 다과를 먹으며 물어 왔다.

    “잘됐네. 그럼 오늘은, 작별 인사하러 온 거야?”

    “아니, 그게 사실.”

    목소리 끝에 긴장감이 배어났다. 일평생 부탁이라는 걸 잘 해 본 적 없는 그녀였기에, 입을 떼는 게 쉽지 않았다.

    “네가 같이 가 줬으면 해서. 내가 자리 잡을 한 달 동안만이라도, 혹시나….”

    “그래.”

    대답이 너무나도 흔쾌해서 의아했다. 정말 이렇게 같이 떠나 주겠다고?

    “한 달이 아니라 이 주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마지막 취재 이후로 아껴 둔 휴가가 있어서 쓰면 될 것 같거든.”

    “정말?”

    비비안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매디슨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럼. 너도 자리 잡는 김에 나도 따라가서 잠시 숨 좀 돌리고, 좋지 뭐. 비행기 표는 내가 예약할까? 배편이 낫나?”

    “헬리콥터는 어때?”

    “응?”

    “…흔적이 남지 않는 편이 좋아서.”

    말끝을 흐리자 매디슨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많은 것을 묻지 않은 채 마음을 안심시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난 헬기도 나쁘지 않은걸? 그런데 누구 걸 타고 간다는 말이야?”

    비비안느는 초조하지만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계획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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