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114)
  • ❖ ❖ ❖

    “후회하진 않으십니까.”

    날씨는 비가 올 듯 흐렸다.

    이카로스는 고개를 돌려 멀찍이 떨어져 앉은 에드문드에게 말했다.

    먹구름이 만든 그림자가 오묘하게 섞인 보스의 옆얼굴은 수심에 잠겨 있었다. 그의 뒤에 난 널찍한 차창이 탁하고도 암울한 거리를 담았다.

    움직이는 차량 안에 다시 한번 정적이 스미어들자 이카로스는 말을 이었다.

    “가로챈 자료를 오늘 아침 정보국 측에 보내라 지시하신 것 말입니다.”

    그는 보스가 고민하고 있는 이유가 그것이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론해 보았다.

    “의장의 망명을 인질 삼아 자료를 받아 내셨으니, 그대로 폐기하셨어도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에드문드는 기다렸다는 듯 ‘익명의 제보자’라는 이름 뒤에 숨어 그걸 정보국 측에 보냈다.

    이카로스는 보스가 그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후회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정보가 드러나길 원하셨더라면 뤼드빅 렉스가 그걸 직접 정보국에 가져다 바치게 두시는 방향이 더 온건했을 겁니다.”

    “그러면 자백이 아니게 되잖아.”

    “죄가 들통나는 것보다는 자백을 하는 편이 보스께 더 유리하긴 하겠지요. 자료 정리는 모두 뤼드빅 렉스가 해냈으니 수고는 더셨겠고요. 그런데 왜 굳이 그러셨습니까?”

    그러다 이카로스는 이 차의 목적지를 떠올리고는 읊조렸다.

    메르고빌 저택이었다.

    “설마, 비비안느 영애의 마음을 돌리려 하신 건 아닐 테고요.”

    “맞아.”

    그 말과 동시에 리무진이 한적한 길가에 멈춰 섰다. 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 주자, 에드문드는 바깥으로 향했다.

    이카로스는 그의 발걸음을 시선으로 좇았다. 에드문드가 다가간 곳은 화원이었다. 그는 매대에 놓인 색색의 꽃을 눈여겨보더니 흰 장미를 한 송이 샀다. 다시 차 문이 열렸을 때 비 오기 전 눅눅한 공기가 밀려들고, 보스가 산 꽃과 함께 되돌아왔다.

    아마 미리 사 두었던 오페라 티켓과 같이 건넬 생각인 모양이었다.

    ‘비비안느 영애가 어릴 적 해외에서 오페라를 본 추억이 있고, 클래식을 좋아한다지.’

    그의 뒷배경이 그녀를 놀라게 한다면 이렇게라도 제가 가진 걸 제 손수 와해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며 진심을 호소하려는 것이다.

    취지는 정말 좋았다. 정말로.

    그런데 아직 판결이 나지도 않았는데, 그가 자백을 해 상황을 뒤집으면 어쩌자는 말일까.

    오페라는커녕 비비안느 아가씨와 뤼드빅 렉스까지 함께 구치소에서 시간을 보내겠다는 건 아닐지 이카로스는 심히 우려되었다.

    그 속내를 읽었다는 듯 에드문드가 이카로스에게 말했다.

    “이건 자살행위가 아니야. 도박이지.”

    “…살아남을 확률이라는 게 있다는 말입니까?”

    이카로스는 영 미심쩍은 낯이었다. 에드문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연했다.

    “정의가 이기면 내가 지고, 실리가 이기면 내가 살겠지. 아버지께서 자료를 확인하셨을 텐데 지금까지 아무런 이야기가 없는 걸 보면 얼추 내가 살아남은 모양이로군.”

    동전은 던져졌고, 저의 보스는 언제나 그랬듯 확률 게임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진실을 밝히기보다는 내 재산을 이용하기로 결심하신 모양이지.”

    “아니, 이렇게 될 거라는 걸 다 예측하고 계셨단 말입니까?”

    그러면 보스가 이 문제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면….

    그때 메르고빌 저택의 대문이 가까워지는 게 차창 너머로 보였다. 에드문드가 후작저에 심어 둔 사용인들은 착실히 그 문을 열어 주었고, 차는 꽃들이 만발한 전원을 지나쳐 현관 앞에 멈춰 섰다.

    ‘보스께서 걱정하고 계신 건 이러고도 비비안느 영애에게 용서받지 못할 것 때문이었나.’

    곧 이카로스가 보고 있는 차창 너머의 풍경에 에드문드가 나타났다. 그는 꽃을 든 채로 비비안느의 저택 문을 두드렸다.

    곧 비비안느의 시녀가 걸어 나와 그에게 무어라 말했다. 모시는 아가씨가 그를 볼 생각이 없다고 했는지, 에드문드가 손에 들린 꽃과 오페라 티켓이 담긴 봉투를 건네려 했지만 시녀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이카로스는 차 안에 있어 대화 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그게 받을 수 없다는 말인 것쯤은 추론할 수 있었다.

    결국 보스는 제가 한 일에 대해서 비비안느 영애에게 한마디도 전하지 못한 채 차로 돌아와야 했다.

    차 문이 열렸다 닫히자 이카로스는 제 옆을 바라보며 물었다.

    “후작 부부께서 아가씨를 부러 못 만나게 하려는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리가.”

    에드문드는 한 번도 내비치지 않은 감정을 얼굴에 담고 있었다.

    “그랬더라면 후작 부처 눈을 피해 나를 만날 방법은 많았을 테니까. 저 저택에 내 사람들이 깔려 있는데 금방 들킬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테고. …그냥 나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사람들은 소중한 이를 위해 가장 값진 것을 쉽게 포기해 버리고는 한다.

    에드문드가 그날 포기한 것은 제 정체였다.

    하지만 정작 그가 자신을 여태껏 지켜 주던 비밀을 내걸고 그녀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을 때, 그녀는 그 자리에 없었다.

    7일 후, 뤼드빅 렉스 재판 당일.

    그날도 수상은 황제를 알현하러 황궁으로 향했다.

    그는 황실 측에 폐하를 평소보다 더 일찍 찾아뵐 수 있겠냐며 물었는데, 곧 흔쾌한 허락이 돌아왔다. 그래서 알현은 다행히도 뤼드빅 렉스의 재판 전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수상은 황궁의 복도를 걸으며 마주치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려 노력했다. 걸음걸음마다 보이는 황실 사용인들이 저를 영웅처럼 대하는 것이 자못 거북했기 때문이다. 그들을 피하며 발걸음을 서두르다 보니 어느새 황제의 응접실 문 앞이었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시종이 그에게 말하며 문손잡이를 당기자 응접실 실내가 드러났다. 수상은 걸음을 옮겨, 황제의 옆에 놓인 의자로 향했다.

    “…황제 폐하.”

    예를 표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목소리는 저번에 황제를 알현했을 때와는 훨씬 더 가라앉아 있었다.

    “요청할 게 있다며 나를 일찍 만나길 청했다고 들었네. 그대의 공이 이리도 큰데 못 들어줄 것도 없지. 무엇인가?”

    황제는 인자하게 물어 왔다. 흥미롭다는 듯한 태도는 용건이 무엇일지 짐작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수상은 제 부탁이 그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임을 의식하며 무거운 입술을 떼었다.

    “다아트로의 총리직에 대한 사의를 표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도록 황제 폐하께서 윤허해 주시기를 요청 드립니다.”

    “이제 할 일을 다 했으니 물러나겠다는 건가? 연임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지금?”

    “아닙니다.”

    “그러면.”

    가죽 파일철 하나가 황제에게 공손히 내밀렸다.

    그는 수상을 한번 훑고는 파일철을 열어 보았다. 그 안의 자료는 정보국장이 방대한 정보를 요약해 놓은 것으로, 진짜 암흑가 보스가 누구인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자네 아들 때문이겠군.”

    그가 다시 수상 쪽을 바라보았을 때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그래서 장관들은 뭐라 말하던가?”

    “정보국과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진실을 은폐하자는 쪽이겠군.”

    “예. 내각의 신뢰도가 현저히 떨어질 거라 하더군요. 진실을 밝히고 총사퇴를 감수하기에는 국제 정세가 혼란스러운지라 우려가 많았습니다. 뤼드빅 렉스도 자백을 한 지금 우리가 먼저 나서서 그 파일을 공개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의견이 주류였습니다.”

    “그런데 자네는 왜 이곳에서 내게 그만둔다는 말을 하는 것이지?”

    “그 파일에 적힌 이의 이름이 남의 이름이었으면 저도 쉽게 내각의 뜻에 동의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건… 제가 그자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폐하.”

    “…….”

    “내각과 정보국의 결정이, 아들을 감싸고 싶다는 제 사사로운 감정에 대한 변명이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제게는 아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책임이 있기도 합니다.”

    “그렇군.”

    “그러니 저는 폐하께 사실을 고백하고 이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 드리려 합니다.”

    “꼭 그래야 하나?”

    그 말에 수상은 놀란 낯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가 정치적인 견해를 드러내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한 말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자네가 이토록 청렴결백했기에 암흑가 보스를 잡기 위한 적격자가 된 것은 아네. 하지만 자네는 사냥꾼이 아니라 제국의 수상이야. 그리고 자네가 할 일은 정치가 아닌가?”

    “…….”

    “이 정도 무기라면 신대륙의 강국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 생각하네. 그리고 자네 아들은 사업에 재능이 있어. 아주 영리한 인재이지.”

    “…예.”

    “당장 10년 안에 엠머하임 공화국이 세를 키워서 선전 포고를 하게 된다면 우리 다아트로는 어떻게 될 것 같나? 이미 총기 제작을 금한다는 정책으로 문 닫은 국내 공장의 생산 라인은 구식이라 기술은 한참 밀릴 테고, 나라는 더한 빈곤에 시달리겠지. 하지만 자네 아들이 가진 군수 업체와 신기술을 빌릴 수 있다면 상황은 한참 나아질 것이네. 무기를 얻기 위해 우방국에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될 거고, 국고 지출을 혁신적으로 줄일 수 있겠지.”

    수상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실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였기 때문이다.

    황제는 말을 이었다.

    “자네 아들이 하려는 일을 보면 감히 미래를 예측하려 했던 것 같은데, 나도 동의하네. 자네가 이번 일로 연임하게 된다면 또 다른 6년의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해.”

    “폐하.”

    “그러니, 차라리 이용하는 건 어떤가?”

    그 말에 수상은 황제와 시선을 맞추었다.

    “나라면 이 자료들을 누가 무슨 이유로 보냈는지 생각하는 데 시간을 쓰겠네. 그리고 자네의 아들을 회유할 방안을 고민하겠지.”

    “감사합니다, 폐하.”

    “시간이 다 되었군. 결정은 자네가 하는 것이니 더 할 말은 없겠다만,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라네.”

    황제가 의자 옆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종을 흔들자 시종이 안으로 들어와 수상을 밖으로 안내했다.

    ‘에드문드 그 녀석이 2황녀를 상대로 배짱을 부리더니,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랬었군.’

    차에 탄 수상은 뒷좌석에 실려 있는 문서 상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앞좌석의 운전기사가 그에게 물었다.

    “법원으로 모셔다드리면 되겠습니까?”

    “…정보국으로 가겠네.”

    그렇게 문서 상자는 기밀문서를 보관하는 곳에 놓였고, 그날 뤼드빅 렉스는 1급 살인죄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항소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7일이 지나, 그가 항소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밝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