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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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비안느는 현관 앞에 준비된 웨딩 카를 타고 예식장으로 향했다.

    원래 계획은 대성당에서 식을 치르는 것이었지만 어제 석간지를 본 교구의 주교가 정중히 결혼식 장소를 옮겨 주십사 부탁한 탓에 그녀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성당이란 성당은 모두 같은 이유로 장소를 빌려주는 걸 거부해 비비안느는 할 수 없이 낡은 예식장을 택해야만 했다.

    동시에 결혼식에 못 오겠다는 사교계 인사들의 연락이 빗발쳤다.

    ‘그래도 이 와중에 렉스가에 연락이 닿아서 다행이야.’

    그녀는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

    원래는 즐겁게 하객들과 사진을 찍어야 하겠지만 그녀는 혼자 이곳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후작 부부는 결혼식 한 시간 전까지 렉스가에 연락이 닿지 않아 직접 의장 관저를 찾아가 상황을 파악해 보겠다고 했고, 라이너스는 경시청에서 연락을 받고 자리를 비웠다.

    물론 그들 모두 본식이 시작하기 전까지는 도착하겠다 일렀지만 그들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시녀들을 데려올까도 생각했으나 그들은 하루아침에 결혼식장이 뒤바뀐 탓에 일이 가중되어 모두 바빠 보였다.

    결국 비비안느는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전화기 앞을 맴돌았다.

    그 순간 전화기가 울려 그녀는 재빨리 수화기를 집어 들어 귀에 대었다.

    “여보세요?”

    - 비비안느!

    이상하지.

    1년 전, 요원 행세를 하던 에드문드의 빌라에서는 그토록 기다렸던 매디슨의 전화가 지금은 실망감만을 남겼다.

    비비안느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답했다.

    “…아, 매디슨 너구나.”

    - 당연히 나지. 아까 네 저택으로 전화했는데 사용인이 신부 대기실로 연결해 주더라고. 그게 다름이 아니라, 다니엘 기억하지? 데인체스터 부인께서 후작 부인 편으로 청첩장을 되돌려 주었다 하더라고 하던데, 본인 뜻이 아니었다고 사과드리고 싶다고 말해서.

    “아, 말해 줘서 고마워.”

    아무래도 장교니까 복잡한 일에 연관되어서는 안 되겠지.

    그녀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매디, 너도 곤란하다면 안 와도 괜찮아.”

    - 아냐. 상관없어. 넌 아무 잘못 없다는 거 다 아는데, 뭐. 내가 피치 못한 사정이 있는 다니엘 대신 2인분 하겠다고 말하고 싶었어.

    “…응, 고마워. 그러면 이따 신부 대기실에서 볼래?”

    - 그래. 이따 봐. 바쁜데 이만 끊을게.

    “으응.”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그러자마자 다시 전화기가 울려 비비안느는 매디슨이 무언가 더 말할 게 있는 모양이라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매디슨.”

    - …아닌데.

    어딘가 잠겨 있는 목소리에 비비안느는 안도감에 숨을 깊이 내쉬며 눈을 감았다.

    제 약혼자였다.

    - 왜 전화를 안 받지?

    “미안해요. 친구랑 잠시 통화를 하느라고….”

    - 그럴 여유가 있었다니 다행이군.

    “신부 대기실에 혼자 남겨진 건 저예요. 여태껏 연락 한 통 없었던 그쪽이 아니라요. 우리 서로 잘해 보자고 했었잖아요. 그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어요?”

    - 잘 들어, 메르고빌.

    그제야 비비안느는 그의 숨이 거칠다는 걸 느꼈다.

    그 순간 그녀의 등골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 내가 사저로 옮겨 두었던 자료가 사라졌어.

    “…….”

    -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님도 전부.

    비비안느의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분명 미란다가, 그러니까 어머님 개인 비서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요. 식을 원래대로 진행할 거라고.”

    - 연막을 쳐 놓을 생각이었겠지. 그들이 완벽히 망명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 줄 시끄러운 이벤트는 계속 진행되어야 할 테니까.

    “뤼드빅.”

    - 놀란 건 알아. 그래도 내가 여기 있잖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너는 이렇게 싫어 죽을 거 같은 남자랑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입 맞출지나 고민하고 있어야지. 내가 다 해결할게.

    “…….”

    - 자료도 어딘가에 있을 거야. 아버지가 소유한 별장과 저택, 성을 다 돌아보면서 찾고 있으니까 그중 하나에는 있겠지. 지금 제도야. 몇 군데 안 남았으니까….

    그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비비안느는 화들짝 놀라 등 뒤를 바라보았다.

    그게 누구인지를 확인한 비비안느는 소스라치게 놀라 수화기를 든 손을 천천히 내렸다.

    에드문드 콜트 백작.

    “예쁘네.”

    그가 문을 잠그고는 저벅저벅 걸어와 저를 훑어 내려갔다.

    “…드레스 잘 어울려.”

    “가세요.”

    비비안느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수화기 너머의 뤼드빅이 듣기를 바랐다.

    “청첩장, 받지 않으셨잖아요. 각하께서 나가기 싫으시다면 제가 나갈게요.”

    “대화는 우리끼리 했으면 좋겠는데.”

    그 말과 함께 에드문드가 비비안느의 손에 들린 수화기를 철컥, 하고 내려놓았다.

    동시에 비비안느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뤼드빅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정적이 맴돌았다. 에드문드의 차가운 시선이 닿는 순간 비비안느는 그 어느 때보다 비참해졌다. 그가 드레스 자락을 집어 들어 올렸다가 성의 없이 놓으며 말했다.

    “비비안느, 내게서 도망치려 했어?”

    그는 그렇게 제 속을 후벼 팠다.

    “귀족답게 살겠다고 내 곁을 떠나더니, 이런 게 귀족인가? 수선한 드레스를 입고 낡은 예식장에서 오지도 않는 약혼자를 기다리는 게.”

    “제게 대체 왜 이러세요.”

    비비안느가 꿋꿋이 그를 올려다보자 에드문드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내가 널 좋아하니까.”

    “…….”

    “네가 어떻게 밀어내든, 네 답이 내가 되게 할 거니까.”

    “아뇨. 당장 나가 주세요. 곧 여기에 제 약혼자가 오기로 했으니까요.”

    “어쩌지? 내가 네 말이라면 다 들어준다 해도 그것만큼은 못 해 줄 것 같은데.”

    에드문드는 그녀를 지나쳐 걸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에 대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시청에 뤼드빅 렉스의 위치 알아낸 것 같다고 전해. 예식장이라고.”

    상대측에서 전화를 끊자, 그는 제 팔을 잡고 저를 저지하려고 애쓰는 비비안느 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뒤 속삭였다.

    “이제는 네가 좋아하는 절차대로, 아버님 선택지가 하나 남게 되었네. 이제는 내 아버지께 결혼 허락을 받아 오기만 하면 조건은 성립하는 건가?”

    “…….”

    “고쳐 쓸 거면 널 위해서 이것보단 더한 걸 해 줄 수 있는 놈으로 고쳐 써. 뭐든 해 줄 테니.”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비비안느의 가슴이 뛰어 오기 시작했다.

    “사랑해.”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비비안느는 로열 더비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말했지만, 네 선택의 시간은 이미 끝났으니 지금부터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비비안느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해졌다.

    “…왜 대답이 없어?”

    에드문드가 물어 오자 비비안느는 고개를 돌렸다.

    그랬기 때문에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기색을 살피지 못했다. 에드문드의 큰 손이 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말을 기다리는 동안 그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예전에 그 말을 들었더라면 뛸 듯이 기뻤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비비안느가 힘없이 내뱉은 말에 에드문드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는 실소하며 내뱉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예요.”

    “넌 고작 뤼드빅 렉스의 신부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어. 더 나은 대우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고, 네가 다치는 걸 내가 못 견디겠으니까, 뭐든 하겠다고.”

    그 말을 내뱉는 동안 그의 목소리가 안달하는 기색을 잃고 점점 차갑게 물들어 갔다.

    “그런데 넌 기껏 케이지 안에서 사육당하는 애완동물이었나?”

    에드문드는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동시에 비비안느가 앙증맞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담배의 끝에 불을 붙이고는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널 학대하는 주인을 짓밟으니까 나한테 화를 낸 거고.”

    에드문드는 부러 비비안느를 자극하려 더 잔인한 말을 골라 말했다.

    제가 이겼는데, 그랬는데도 비비안느가 옆에 없을 거라는 상상은 생각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오직 이 시간만을, 지금 당장만을 기다려왔는데도 그의 환상 속에서 웃고 있는 그녀는 없었다. 남은 건 지저분하고 잔인한 현실뿐이었다.

    화가 났다. 정확히는 비참했다.

    이제야 비비안느가 온갖 악담을 퍼부을 때의 감정을 이해할 것만 같았다.

    상대는 아무런 표정 없이 무심하게 바라보는데 저만 혼자 이렇게 절박해서.

    저만의 끓어오르는 감정에 눈이 멀어서 상대를 갉고 심해로 끌어내리고 싶었다.

    그녀가 모든 감정을 태워 버렸을 때가 되어서야 에드문드는 질투에 미쳐 이성을 잃고는 뇌까렸다. 어느 순간부터 음성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해 있었다.

    “자유를 주었다고 분노하는 여자는 사람인가. 아니면 짐승일까?”

    이런 모욕적인 말에도 여전히 무심하게 저를 쳐다보는 그녀의 낯을 보니 헛웃음이 났다.

    “제때 끼니 잘 챙겨 주는 주인을 쏜 날 물려고 하니까, 넌 고작 암캐인가?”

    “…….”

    “대답해, 비비안느 메르고빌.”

    “…….”

    “네 주인을 쏴서 기분이 나빴느냐고 내가 묻고 있잖아.”

    “…….”

    “내가 네 악몽을 끝내 주었다면, 너는.”

    “모르시나 보네요, 백작님.”

    잠잠했지만 악에 받친 목소리였다. 날이 선 눈빛이 에드문드를 선연히 찔렀다.

    “…당신이 내 악몽인걸.”

    비비안느의 볼을 가른 눈물이 유독 아팠다. 그는 땅에 피우던 담배를 떨어트리고는 구둣발로 자근 밟았다.

    비비안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떠나고 당신이 죽은 줄 알았을 때. 약혼 발표를 앞두고 뤼드빅에게 저를 죽여 달라고 말한 날에는 그냥 그렇게 생각했어요. 내일이 오지 않는 게 죽는 거라면, 썩 나쁘지 않겠다고.”

    “…….”

    “그런데 당신 손에 죽는 건 어떨지 알아서 너무나도 두려워요, 에드문드.”

    “…….”

    “당신, 이러다가 날 또다시 죽여 버릴 거잖아.”

    “…….”

    “세상에서 지우려고 했으면서, 그래서 사라져 주겠다는데 그게 당신한테는 왜 그렇게 못마땅한데요?”

    “달라질게.”

    눈앞에 보이는 그녀가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여 그는 힘겹게 말했다.

    “아뇨.”

    비비안느는 고개를 저었다.

    “안 믿어요, 백작님. 백작님이 뭘 하든.”

    그녀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렸다.

    “뤼드빅 렉스도 당신을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동아줄이라 생각했을 때가 있었겠죠.”

    “…….”

    “저도 그랬어요.”

    에드문드가 비비안느의 손을 잡으려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쳐 내며 냉랭히 말했다.

    “제 약혼자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아니까 당신이 제게 질렸을 때 제 미래가 어떨지는…. 놀랍지도 않네요.”

    비비안느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안녕히 계세요, 백작님.”

    “…내가 내 정체를 드러내고. 모든 걸 내던지고, 네 앞에 와서 구혼한다면 네 생각이 달라질까.”

    비비안느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몸을 돌리자 그의 목소리에 절박한 기색이 묻어났다.

    이제는 그가 자신에게 기회를 구걸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비안느는 돌아보지 않았다.

    “죄송해요.”

    비비안느는 한없이도 무심한 목소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말을 해내고서는 그를 떠났다.

    그 모습에 에드문드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당장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제 앞에 있는데 제가 영영 손을 뻗지 못할 곳으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잡으러 가야 하는데 한 걸음도 뗄 수 없는 이유는 뭘까. 그녀를 강압적으로 제 곁에 이끌고 와 봐야 돌이킬 수 없는 결과만 초래할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까.

    “보스께서는 무언가를 잃어 보신 적이 없어,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르시겠지만 말입니다.”

    아니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어서였을지도 모르겠지.

    그녀가 없는 공허했던 시간을 버텨 내려 무어라도 붙잡고자 그녀의 말에 집착적으로 매달리다, 결국 모든 게 의미 없는 일이었다는 진실을 마주한 지금의 자신이 우습고도 비참해서.

    그러면서도 기어이 현실을 외면하며 희망은 있을 거라는 자기기만마저 부수고 싶지 않아서.

    그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도 한참 그곳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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