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14)
  • ❖ ❖ ❖

    “이번 게임에서도 내가 이기겠지.”

    에드문드는 의장을 기다리며 제가 과거에 이카로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와 같이 테이블 위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목재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 든 걸 확인한 뒤의 이카로스는 그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내가 내 여자의 마음마저 다시 가져올 수 있겠나?”

    희부연 연기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고 그때,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자 이카로스가 정중하게 문을 열어 주었다.

    응접실을 천천히 훑은 의장의 시선이 에드문드에서 멈추었다.

    의장은 미간을 희미하게 일그러트리고는 걸음을 옮겨 두꺼운 손으로 의자를 당겨 내고는 자리에 앉았다.

    “내 요새 별 신기한 경험을 다 해 보는군.”

    의장은 맞은편에 앉은 에드문드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나를 보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젊은이라. 아주 신선하고도 재미있어. 자네의 아버지뻘 되는 의원들도….”

    국회에서 나를 보면 자리에서 일어나곤 하는데.

    그렇게 이어 갔어야 하는 말이었으나, 의장은 제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자네의 아버지뻘.

    그 말을 하다 에드문드 콜트의 아버지가 어떤 위인이었는지를 떠올린 탓이었다.

    제국의 관습법상으로는 귀족원의 의장인 제가 수상보다 높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귀족원의 위세가 예전 같지 않은 지금은 더더욱.

    의장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됐네.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아드님의 결혼식에 생길 수 있는 변수를 차단하러 손수 나서신 건 알고 있습니다.”

    에드문드는 여전히 담배를 끄지 않은 채 말했다.

    의장은 그 점이 거슬린다고 생각했지만 저 새끼가 제 말을 들을 놈이었다면 여기에서 이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있지 않을 걸 알아서 굳이 저지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제 아들놈 문제로 극성인 학부모 취급을 하는 저 태도는 담뱃불처럼 끌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러니 그 이야기부터 하는 게 좋겠군요. 마침 의장 각하께 드릴 결혼 선물도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에드문드는 목재로 된 문서 상자를 의장 쪽으로 스윽 밀었다.

    “제가 공을 들여 특별히 준비해 보았으니 직접 열어 보시지요.”

    의장은 에드문드를 한번 훑고는 상자를 조심스레 열었다. 그는 드물게도 망설이며 뚜껑을 들어 올렸으나, 그림자가 걷히고 드러난 상자 내부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시선이 상자에서 에드문드에게로 되돌아갔다.

    “…자네, 지금 나랑 장난을 하자는 겐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가 드리려던 선물이 그 안에 있었는데, 이제는 없는 모양입니다.”

    그 말과 함께 에드문드가 이카로스에게 턱짓하자 그가 걸음을 옮겨 의장 앞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신문이었다.

    그것도 종류가 아주 다양한.

    의장의 눈이 바쁘게 신문사의 이름을 차례로 훑어 나갔다.

    의장이 가장 상단에 있는 것을 집어 들어 바라보았다. 시선은 헤드라인보다는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는 사진에게로 향했다. 그건 여성의 손 글씨로 쓰인 편지였다. 정확히는 유서였다.

    ‘백작이 내민 저 목재 상자에 들어 있었다는 것이겠지.’

    아름다운 필체는 신대륙에서 유명세를 꽤 떨쳤다는 여배우의 이름을 담고 있었다.

    캐롤리나 러셀라.

    이것은 그 여배우의 유서인 것이다.

    “제가 위조한 건 아닐까, 생각하고 계실 겁니다.”

    할 말을 잃은 의장이 캐롤리나 러셀라의 손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에드문드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지 않은 이상 캐롤리나 러셀라가 뤼드빅 렉스를 암흑가의 수장으로 지목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셨을 테니까요.”

    “……!”

    의장의 핏발선 눈이 에드문드에게로 향하고, 그의 손이 신문지의 끝을 흉하게 우그러트렸다.

    “지금부터 왜 그 유서가 진짜인지 말씀드리려 합니다.”

    에드문드가 다시 턱짓하자 이카로스가 의장의 앞에 사진들을 내려놓았다.

    그 사진들은 총 다섯 장.

    첫 흑백 사진에 담긴 건 비비안느 메르고빌이었다.

    별장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홀에 쓰러진 꼴이었는데, 사내 하나가 그 옆에서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의장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캐롤리나 러셀라의 추종자였다.

    두 번째 사진은 캐롤리나 러셀라 그리고 자넷 왓킨스가 노천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을 포착했다.

    그걸 본 의장은 이를 갈았다.

    자넷 왓킨스가 이 사진을 근거로 자신이 캐롤리나 러셀라를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자신을 폭행한 뤼드빅이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건 불합리하며, 뤼드빅의 정부였던 캐롤리나 또한 저와 똑같은 대우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폭로를 했다. 그 결과로 사건에 대한 논란이 재점화된 건 물론, 뤼드빅 렉스는 대중의 지탄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니 이 사진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사진 속 자넷은 지극히 여유로운 표정이었지만 캐롤리나는 아니었다. 캐롤리나의 낯빛이 새하얗다 못해 새파랬기에 대중들은 자넷의 말을 완벽히 믿었다. 죽기 전 마지막 모습으로 이보다 적합한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세 번째 사진.

    첫 번째 사진 속 남자 – 캐롤리나의 추종자 – 가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기괴하게 머리채를 잡히고, 팔은 포박된 상태로.

    비비안느를 해친 이유로 암흑가 세력에게 보복을 당한 것 같았다.

    다음 장으로 넘겼을 때, 첫 번째 사진에서 얼굴을 비춘 캐롤리나의 추종자는 세상을 잃은 듯한 절망적인 표정이었다.

    작업을 마친 정장의 사내들이 창백하게 질린 캐롤리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연출이었다.

    에드문드는 그 간결한 지시만으로 이 일을 벌이게 한 게 캐롤리나라고 그녀의 추종자에게 믿게 했으니 말이다. 그녀의 추종자는 배신당한 기분이었을 터였다.

    마지막 장.

    캐롤리나가 제 추종자의 시체 옆에서 떨고 있다. 그녀의 옆 벽에는 총알이 박혀 있다.

    추종자 남성의 시체로부터 흘러나온 피의 웅덩이 옆에 앉은 캐롤리나는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정황을 보아하니 암흑가 세력이 캐롤리나의 앞에서 추종자를 죽이고 이 사진을 찍은 뒤 떠난 모양이다.

    의장은 네 번째 사진 속 암흑가의 행동 대원이 캐롤리나에게 무어라 말했을지를 상상해 보았다.

    ‘보스가 시켜서 한 일이라 말했겠지.’

    정작 싸늘한 주검이 된 그녀의 추종자는 그 일이 캐롤리나의 작품인 줄 알고 죽었으니 그 사실을 영영 모를 것이다.

    ‘그리고 행동 대원들이 저들의 보스는, 에드문드 콜트가 아닌 뤼드빅 렉스라 했을 거고. 사유는….’

    의장은 급하게 두 번째 사진을 다시 바라보았다.

    자넷 왓킨스와 캐롤리나 러셀라가 함께 앉아 있다.

    에드문드의 느릿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사진에서 자넷 왓킨스가 캐롤리나 러셀라에게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뤼드빅 렉스가 얼마나 비비안느에게 미쳐 있는지를 손수 가르쳐 준 겁니다. 왓킨스가 말하길, 그녀는 비비안느 영애의 배 위에 피임약을 던진 걸로도 꽤 험한 꼴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추종자를 시켜 비비안느 영애를 계단에서 밀게 한 캐롤리나 당신은 어떤 취급을 당할 것 같냐고 물은 겁니다.”

    “…….”

    “캐롤리나 러셀라 양은 자신이 뤼드빅으로부터 보복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겠지요. 이후, 그녀의 추종자를 죽인 암흑가 행동대원들이 보스로 뤼드빅을 지목하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 거고요. 그래서 그 유서가 진짜인 겁니다. 캐롤리나 러셀라는 사진 속 일을 겪은 뒤 자신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자살이라는 강수를 두었으니까요.”

    “…….”

    “제국에서 행렬하던 수십만의 배우 팬들은 이 서명이 진짜라는 걸 알아낼 테고, 캐롤리나의 증언대로 뤼드빅을 보스라 믿을 테니 이것이야말로 둘째 아드님의 완벽한 결혼 선물이 아니겠습니까.”

    “곧 내 아들 뤼드빅이 암흑가 수장은 자네라는 물증을 들고 수상 각하를 찾아뵐 것이네. 이깟 가십이 아니라 장부에 기반한 진실을 들고서.”

    “그래 봤자 제국민들은 믿지 않을 겁니다. 호텔 살렌너에서 가장무도회를 연 것도, 화제의 선상 파티를 연 것도 렉스 재단을 관리하는 뤼드빅이라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그들은 오히려 진실을 은폐하려 한다며 강하게 반발하겠지요.”

    “…….”

    “뤼드빅 렉스의 잇따른 증거 불충분 석방으로 대중은 화가 날 대로 나 있습니다. 오히려 진실이 세간에 드러난다면 뤼드빅의 배후에 누가 있기에 이번에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지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

    “마침 제 아버지께서는 암흑가 세력을 척결하겠다는 분입니다. 그런데 뤼드빅이 지목한 게 저라면, 대중은 그것마저도 제 아버지를 무너트리려는 정치적 수라 받아들이겠지요.”

    의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드문드 콜트가 한 말들을 녹음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의장은 단신으로 와 이 자리에 있었다는 증거를 만들지 않았다.

    그게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다.

    “이미 석간지는 나갔을 것이니 언론계의 인맥을 동원해 막아 보려는 것도 무용지물일 겁니다.”

    에드문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장을 마주하며 말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의장 각하.”

    그다음 날, 에드문드는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조간지를 확인했다.

    그의 예상과 하등 다르지 않게 모든 신문사의 1면은 어제 석간지에서 공개된 유서의 진위를 확정 지은 뒤의 일을 다루고 있었다.

    어떤 신문에는 어제 제가 의장에게 보여 준 다섯 번째 사진이 담겨 있었다. 캐롤리나가 죽은 추종자의 옆에서 무력하게 떨고 있는 마지막 모습은 대중들을 강하게 선동했을 것이다.

    에드문드의 시선은 타블로이드지 쪽으로 옮겨 갔다.

    캐롤리나 러셀라의 열성적인 팬들이 유서 서명과의 비교 분석을 위해 그들이 소장하고 있던 배우의 서명을 제출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기사가 담겨 있었다.

    그는 천천히 다른 신문들을 살폈다. 모든 헤드라인이 기다렸다는 듯 뤼드빅 렉스를 암흑가 보스로 지목하고 있었다.

    특종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서두르는 신문사들의 모습에 에드문드는 낮게 웃었다.

    그는 제 적들의 최후를 신문 1면에서 지켜보는 데에 익숙했으나, 이번 승리의 과실은 더욱 달콤했다.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이 다가와 그에게 간단한 아침 식사를 준비해 올지 물었다.

    “아니. 그냥 위스키만.”

    곧 테이블 위에 위스키와 글라스가 놓이고, 목을 축인 에드문드는 오늘이 비비안느의 결혼식 날이라는 걸 다시 한번 상기했다.

    언젠가 이카로스가 했던 직언이 같이 떠올랐다.

    “…비비안느 메르고빌 영애의 환심을 상대와 이겨서 전리품처럼 따낼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

    “그분을 압도적인 공포심으로 굴종시킬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보스께서 가진 절대 권력으로 잡아 둘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러면서 사랑을 바라시면 후회할 일만 더 느실 겁니다.”

    비비안느와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린 에드문드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이번 일이 끝나면 그녀는 저번 로열 더비에서 봤을 때보다 더 저를 혐오하고 있겠지.

    비참해하겠지.

    그녀를 통해 결핍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닫게 된 순간 그녀의 미소를 잃어야 한다는 것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 이 결혼을 막아 그녀부터 잃지 않는 것이 최우선 아닌가?

    특히나 그 상대가 저를 마음에 품고 있고, 원하는 이상 더더욱.

    “그래요. 다 거짓말이었어요.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렇게 된 당신이 불쌍하다는 것도.”

    그녀가 이별을 입에 담기 전에 그렇게 말해 주었으니 이제는 그가 관계의 끈을 당길 차례였다.

    설령 그녀의 해방이 불건전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