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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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되자 비비안느는 별다른 기대 없이 1층으로 향했다. 외출하겠다고 사용인들에게 말해 두었으니 운전기사가 저택의 현관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문밖으로 나간 그녀는 이곳에서 만나리라 예상치도 못한 사람을 발견했다.

    뤼드빅 렉스가 그의 차에 기대어 메르고빌가 운전기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뤼드빅의 시선이 비비안느에게로 향하고 눈길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그는 피우던 담배를 땅에 던져 구둣발로 뭉개었다. 비비안느는 의아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약속은 내일이라고 했었잖아요. 오늘은 매디슨 일행을 만나서 청첩장을 전달하기로 선약이 있다고.”

    “생각이 바뀌었어.”

    뤼드빅은 알고 있다는 듯 답했다.

    “어차피 우리 결혼식인데, 친구한테 청첩장 주는 게 네 선약이면 내가 못 갈 게 없지 않나. 그러면 나도 너를 내일 만날 때까지 굳이 기다릴 필요도 없고.”

    “그러니까, 태워… 주시겠다고요?”

    뤼드빅은 대답하는 대신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비비안느는 운전기사와 그를 번갈아 보다가 어색하게 차 안에 탔다.

    뤼드빅이 문을 닫고는 걸음을 옮겨 금방 운전석 자리를 채웠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는 아시는 거죠?”

    비비안느가 묻자 옆자리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메이브리엄가 86번지.”

    제 의아한 눈빛을 의식했다는 듯 뤼드빅의 시선이 차창 밖 운전기사에게로 향했다.

    “네 운전기사가 마침 이야기해 주더군. 가는 방향도. 내가 아는 건물 근처에서 조금만 더 가면 돼.”

    “네.”

    “…….”

    “고마워요.”

    어쨌든 상대는 그녀가 택한 사람이었고, 결혼식이 끝나면 평생을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 것이므로, 이 사소한 노력에 존중을 보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비비안느는 뤼드빅이 엘레노어 카스터의 일을 계기로 조금이라도 바뀌어 보려고 하는 게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비비안느의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듯한 뤼드빅의 옆얼굴에 그녀는 결국 다른 쪽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 뒤로 어색한 공기 속에서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시선은 곧 거리 쪽으로 향했다.

    거리는 잠잠했다.

    뤼드빅에게 다시 프러포즈를 받았던 날에는 캐롤리나 러셀라의 추종자 사건에 대한 재수사를 요구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때가 2월이었었는데 벌써 4월이구나.’

    시간이 빠르다는 걸 새삼 느꼈다.

    ‘아버지가 적어도 결혼식에서 잡음은 없겠다고 한 게 이걸 두고 말하는 거였어.’

    최근에 메르고빌 후작이 외출하고 돌아온 뒤에 남긴 감상이었다.

    그 또한 저와 똑같은 거리를 본 모양이다. 그러니 그 말은 이를테면 뤼드빅에게 쏟아지던 대중의 공분이 결혼식에 방해가 되지 않을 거라는 냉정한 평가인 셈이었다.

    그러게 이토록 조용한 세상인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단 말일까.

    시선을 내리자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제 손이 보였다.

    캐롤리나 러셀라 추종자 사건에 대해 생각하자 그 일의 배후에 있던 에드문드가 떠올랐고, 그가 수하를 통해 배우의 추종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사진을 보내왔던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사진들을 불태웠었으나 그와 비슷한 것이 오늘 저에게 배달되지 않았나.

    때마침 뤼드빅이 핸들을 돌림과 동시에 저 멀리에 익숙한 하숙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비안느는 자세를 바로 하고는 차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곧 차 시동을 끈 뤼드빅이 먼저 내려 비비안느가 탄 쪽 문을 열어 주었고, 비비안느는 ‘86’이 양각된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흘긋 제 옆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뤼드빅을 훑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 따라오겠다는 말이었구나.’

    그쯤 생각할 때 비비안느가 노크하기도 전에 하숙집 문이 벌컥 열렸다.

    경쾌한 목소리가 그녀를 맞이했다.

    “비비안느!”

    “매디슨.”

    뤼드빅의 차가 오는 걸 창문으로 보고 바로 달려 내려왔는지 매디슨의 얼굴이 옅게 상기되어 있었다.

    “오늘 귀족 아가씨가 식사 대접한다길래 딱 맞춰서 기다리고 있었지!”

    그러던 매디슨은 비비안느의 정적인 표정을 보고는 시선을 옮겨 그녀 옆의 뤼드빅을 훑었다.

    “제 약혼녀의 좋은 친구라고 들었습니다.”

    뤼드빅이 매디슨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매디슨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조금의 불편한 기색도 없이 그의 손을 쥐고는 인사했다.

    “오늘의 운전기사님이시군요. 말로만 듣고 만나 뵙는 건 처음이에요, 매디슨 파커입니다.”

    분명 훈훈한 장면이었으나 비비안느는 뤼드빅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폈다.

    그는 농담이라도 제 아랫사람이나 사용인쯤으로 여겨지는 걸 싫어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뤼드빅의 낯에는 불쾌한 기색은커녕 근사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예. 오늘 파커 양께 식사를 대접해 드릴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가 정중하게 답하자 매디슨이 눈을 반짝이며 물어 왔다.

    “그런가요? 비비안느가 식사 장소는 말을 안 해 줬는데, 어디인지 살짝 흘려 주실 수 있나요.”

    비비안느는 숨을 죽였다. 뤼드빅은 운전기사와 대화를 나누었으니 제가 예약한 곳이 별 볼 일 없는 레스토랑인 것을 파악했을 것이다.

    이 식사 자리만큼은 부모님이 돈을 지원해 주지 않아 제가 가진 적은 현금으로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 사실이 뤼드빅의 입을 통해 비하적인 투로 전달될까 봐 걱정하고 있을 때,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있는 매디슨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매디슨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와. 그 레스토랑이라면 예약만 세 달은 족히 걸리는 데다가 아무나 갈 수 없는 데잖아요?”

    그 말에 비비안느는 미간을 살짝 구기고는 뤼드빅 쪽을 바라보았다.

    그다음 목적지가 어느새 바뀐 걸까.

    혹시나 뤼드빅이 이대로 내빼서 저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건 아닐까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때 매디슨의 등 뒤로 사람 하나가 천천히 가까워졌다.

    ‘데인체스터 소위네.’

    매디슨은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던지고는 다시 뤼드빅을 보며 말했다.

    “맞다. 얘도 같이 가도 되나요? 메르고빌 후작 부인께서 데인체스터 부인께 청첩장을 주긴 했다는데, 이쪽 친구 몫은 깜박하신 것 같아서 동행하기로 했었거든요.”

    매디슨이 언급한 후작 부인의 행동은 누가 봐도 깜박한 게 아니라 고의였겠으나 그녀가 굳이 그렇게 표현한 건 비비안느와 다니엘의 면이 상하지 않도록 해 주려는 것이었다.

    비비안느는 그 배려에 감사했다. 어머니는 데인체스터가 양자의 혈통을 문제 삼으며 그의 초대장만 또 쏙 빼놨을 게 분명했다.

    “물론입니다. 타시지요.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뤼드빅은 다니엘을 한번 훑고는 뒤돌았다. 매디슨과는 달리 다니엘에게는 악수도 청하지 않은 채로였다.

    그래도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아 다시 조수석으로 향하려 했을 때, 뤼드빅이 저를 앞서가 자동차 문을 열어 주었다.

    비비안느는 놀란 채 제 약혼자와 열린 차 문을 바라보았다.

    “레이디께서도, 타시지요.”

    이건 또 무슨 꿍꿍일까 싶어서 잠자코 조수석에 탄 그녀는, 뤼드빅이 문을 닫아 주고는 제 맞은편 자리를 채우는 걸 바라보았다. 뤼드빅의 날카로운 시선이 창밖의 다니엘에게로 향했다.

    …설마 이 인간이 유치하게 구는 건 아니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약혼자가?

    비비안느는 제가 본 걸 의심하며 눈을 깜박였다.

    죽을병에 걸린 건 아닌 것 같은데 참 이상했다.

    ‘다행이야.’

    아무튼 주위가 시끄러우니 잠시 에드문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저녁 내내 비비안느가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숙집 현관에서 데인체스터 소위와 뤼드빅이 미묘한 신경전을 벌인 것이 걱정이 되었으나 매디슨이 끼어 있어 차 안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와, 그래서 두 분 2주 후에 결혼하신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뤼드빅이 답하자 매디슨이 말을 이었다.

    “두 분께서 언젠가 식을 올릴 거라 짐작하긴 했었는데, 이렇게 직접 전해 듣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그러고 보니 2월에 있었던 선상 파티가 약혼자나 부부 동반이던데. 그날 비비안느를 만났을 때 같이 인사드릴 걸 그랬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파커 양께서도 선상 파티에서 동행이 있으셨던 모양이군요.”

    “아뇨. 저는 제 동료 기자랑 사귀는 척하고 들어갔었거든요. 뭐, 그래도 데인체스터 소위와 재미있게 놀았으니까 그걸로 충분했지만요.”

    뒷좌석에 앉은 매디슨은 대화를 잘 이끌어 냈고, 적절한 화젯거리를 던졌다. 그러다 운전하기 까다로운 곳에서는 입을 다물고 뤼드빅이 길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뤼드빅은 그가 언급한 내로라하는 레스토랑으로 매디슨과 일행을 데려갔고, 직원은 문 앞에서부터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을 특실로 안내했다.

    그곳에서도 매디슨의 입담은 빛을 발했다. 그녀는 제 옆자리에 앉은 다니엘을 가리키며 말했다.

    “…뤼드빅 렉스 씨, 이쪽은 데인체스터 소위예요. 아까 차에서 한번 말씀드렸었죠? 비비안느는 기억을 잘 못 하지만 어렸을 때 제가 같이 놀던 친구예요. 어렸을 땐 밤톨만 했는데 지금은 훤칠한 공군 장교가 되어서 덕 보려고 제가 이렇게 챙긴다니까요?”

    “그렇습니까.”

    뤼드빅이 답하자 매디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었다.

    “네. 종군 기자로 일하다 보니 전투기를 얻어 타는 일도 드물게 있는데, 언젠가는 도움을 받을지도 몰라서요.”

    그때 잠시 데인체스터 소위를 훑은 비비안느는 에드문드와의 옛 기억을 떠올려 냈다.

    “왜, 만나 보니까 나보다는 아까 그 공군 장교가 눈에 들어오셨나.”

    “…….”

    “네 다니엘이 그 종군 기자랑 같이 헬기라도 태워 준다고 해서? 자유 좋아하는 아가씨니까 환기도 될 테고 기분 전환도 되고.”

    “아뇨. 당신 때문이잖아요.”

    “…….”

    “그리고 네, 그러면 좋겠네요. 다니엘이 제게 친절을 베풀어서 매디슨이랑 같이 헬리콥터도 한번 타 볼 수 있었으면.”

    괜히 그날의 생각이 나서 비비안느는 다니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데인체스터 소위는 그러면 지금은 조종 장교가 아니신 건가요?”

    정말 드물게도 그녀가 입을 연 것이라 테이블 위에 있는 세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녀는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봐 뒤의 말을 덧붙였다.

    “…매디슨이 언젠가 도움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미래의 일처럼 이야기하길래요. 그리고 조종 장교가 근사해 보이기도 하고요.”

    그 말에 다니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답했다.

    “정식 조종 장교가 되려면 아직 경력이 부족하기도 하고, 통과해야 할 시험도 많아서 매디슨이 그렇게 말한 것 같습니다만… 그 말을 들으니, 여기 저를 챙기는 소꿉친구를 위해서라도 끝까지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눈에 굳센 의지가 엿보이는 걸 보면, 매디슨이 이 레스토랑에 그를 데려온 게 정말 감사한 모양이었다.

    그 말에 매디슨이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다니엘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웃었다.

    저들끼리만 아는 이야기가 있는지, 다니엘이 ‘아, 하지 말라고.’ 하면서 매디슨에게 낮게 속삭였다.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다니엘이 단정하게 말하자 비비안느는 웃으며 축하 인사에 답해 주었다.

    “고마워요.”

    그러면서도 비비안느는 잠시 씁쓸한 감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언젠간 에드문드를 만나면, 데인체스터 소위는 아직 정식 조종 장교가 아니라 헬기를 태워 줄 수 없다며 쏘아붙일 생각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를 만날 일이 영영 없을 것 같았다.

    “이제 청첩장 드려야지.”

    때마침 뤼드빅이 비비안느에게 시선을 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비비안느는 고개를 끄덕이며 클러치를 뒤져 곱게 접힌 봉투를 꺼냈다. 시선을 위로 올리니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데인체스터 소위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청첩장이 두 사람에게 차례로 하나씩 건네어졌다.

    봉투에 적힌 식 날짜를 훑는 매디슨을 잠자코 바라보던 비비안느가 입을 열었다.

    “더 일찍 드리지 못해서 미안해요. 식이 2주 뒤라, 조금 빠듯한 감이 있지만 그래도 두 분이 와 줄 수 있다면 정말 감사할 거예요.”

    “난 갈게.”

    매디슨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서는 다니엘을 훑고는 말했다.

    “이쪽은 군인이라 아무래도 그때 바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내가 얘 몫까지 2인분으로 축하해 줄게.”

    “…그래도 최대한 갈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두 분 얼굴을 결혼식장에서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비비안느의 말을 끝으로 새로운 코스 요리가 나오기 시작해, 분위기가 환기되었다. 매디슨이 눈을 반짝이며 접시를 비우기 시작했고, 다니엘은 매디슨을 보고 피식 웃고는 뤼드빅과 대화를 나눴다.

    대화 주제는 라디오에 자주 오르내리는 엠머하임 공화국에 대해서였다.

    비비안느는 정치는 몰라서 잠자코 들었는데, 다니엘의 말에 의하면 요즘 엠머하임 공화국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군부에서는 다들 그들을 유심히 주목하고 있다고.

    그의 말에 따르면 엠머하임 공화국, 베릴당의 한 정치인이 나날이 득세하고 있다 한다.

    그가 패배주의에 물든 공화국을 자국민 중심주의적 사상으로 물들이고, 그런 이유로 그의 당이 나날이 우세해지고 있으며, 몇몇은 그들의 목적이 전쟁이 아닌지 의문을 품었다.

    엠머하임 공화국은 현재 끔찍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이 마침 세계적인 전쟁이지 않겠냐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어 요즘은 다들 그 이야기뿐이라 했다.

    뤼드빅은 주류 기득권들이 으레 말하듯 ‘그놈들 신경 쓸 것 없다.’라며 대화를 일축했다.

    그러고는 비비안느의 시선을 느꼈는지, 다니엘의 말에 공감해 주려는 듯 “물론 걱정은 되시겠지만 말입니다.” 하고 나름대로 상냥하게 덧붙였다.

    그 뒤로도 몇 번 대화는 오갔고, 식사가 끝났을 때 뤼드빅이 직원에게 수표를 건네자 매디슨이 손뼉까지 치며 고마워했다.

    그렇게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저녁 식사 모임은 얼추 마무리되었다.

    “파커 양은 동승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택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뤼드빅은 매디슨을 하숙집에 데려다줄 걸 권했으나 그녀는 손사래 치며 트램을 타고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니엘이 매디슨을 바래다주고 들어가겠다고 깔끔히 답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떠나고 나서 비비안느는 뤼드빅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바깥은 밤이라 쌀쌀했는데, 비비안느가 제 양팔을 감싸 쥐자 그녀를 두어 번 훑던 뤼드빅이 무려 그녀의 어깨에 재킷을 걸쳐 주었다.

    얼떨떨하게 식당가의 불빛을 훑던 비비안느가 뤼드빅을 쳐다보자 그는 걸음을 옮겨 조수석 문을 열고는 그녀에게 턱짓했다.

    “잠시 걸을래요?”

    그녀가 차에 타는 대신 말하자, 뤼드빅이 차 문을 닫고는 그녀의 옆으로 와 걸음을 옮겼다.

    비비안느는 상류층들이 이용하는 번화가의 번쩍거리는 빛을 바라보며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탁 트인 곳에 오니 머릿속도 같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숨에서는 아까 테이블에서 간단히 마신 와인의 향이 조금 묻어 있었다.

    말을 먼저 꺼낸 것은 뤼드빅이었다.

    “그 소위가 너 좋아하던데.”

    시선을 옮기니 그가 고개를 제 쪽으로 살짝 튼 채 숙이고는 말을 이었다.

    “아까 식탁에서 그건 안 보였던가?”

    “데인체스터 소위요? 그럴 리가요.”

    그 말에 뤼드빅이 땅을 보고는 낮게 웃었다.

    “네 질문에 답할 때 ‘조종 장교가 꼭 되어야지.’ 하고 얼굴에 쓰여 있는 게 안 보였다고.”

    “소꿉친구를 위해서라잖아요.”

    “그래. 그랬겠지.”

    그가 순순히 물러나자 다시금 정적이 찾아왔다.

    몇 걸음 뒤에 비비안느는 조용히 물었다.

    “왜 그러셨나요?”

    뤼드빅이 저를 바라보자 비비안느는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당일에 저런 레스토랑 자리를 얻어 내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해 주셨는지 순수하게 궁금해서요.”

    “말했잖아, 살렌너 호텔에서.”

    건조한 대답이 밤의 차가운 공기와 어우러졌다.

    “이번 일만 끝나면 그린 듯한 약혼자처럼 굴어 주겠다고.”

    “…….”

    “미리 연습이라도 해 보려고.”

    “잘하고 계시네요.”

    비비안느는 그에게 희미하게 웃어 주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오래 훑었다.

    그때 그가 비비안느의 손을 쥐어 왔다. 그녀는 낯선 감촉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찔 떨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이건?”

    그가 물어 왔다.

    “이것도 잘하고 있는 건가?”

    비비안느가 답하지 않자 그가 손을 놓았다. 뤼드빅은 다른 쪽을 보고는 말했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

    “안 바래, 네 마음. 네가 날 안 좋아하는 것도, 난 널 미끼로서 쓰고 난 네 도피처가 되어 준다는 조건도 기억하고 있다고.”

    “놀라서 그래요.”

    비비안느의 손이 그의 손등을 위로하듯 톡톡 쳐 주었다.

    그가 다시 한번 그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비비안느가 어깨에 덮인 그의 재킷 라펠을 움켜쥐었다.

    “그래도 약속대로 작위만큼은 확실히 드릴게요. 양 가문에서 다들 당신이 이길 거라고 이야기하곤 하니까… 일이 잘 풀려서 제 작위를 가지고 정계 진출도 문제없기를 기도해 드리기도 할 거고요.”

    “그래. 그러면 나도 내 최선을 다해야지.”

    뤼드빅의 말에 비비안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보기에 그가 생각을 정리하는 낯이라, 비비안느는 그가 혹시 본론으로 들어가려는지 고민했다.

    역시 뤼드빅은 그녀의 고민거리를 언급하며 말했다.

    “백작이 네게 경고한 것에 대해서는 아버지께도 전달 드렸어. 당장 내일 찾아가 렉스 가문의 뜻을 전달하겠다더군. 결혼식은 문제없이 진행될 거야.”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걱정하지 마. 백작이 다시는 널 찾아오는 일이 없게 해 줄 테니까.”

    비비안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뒷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권력을 지닌 백작이라도 진실을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결혼식이 끝나면 뤼드빅은 이길 것이고 에드문드는 다시는, 다시는 저를 비참하게 아프게 하지 못할 테다.

    그러면 되었다.

    ‘뤼드빅을 암흑가의 책사처럼 보이게 하려 하더니만, 길거리가 잠잠한 걸 보니 잘 풀리지 않았던 모양이지.’

    비비안느는 더 바라는 것도 없이 이 쓰라린 평화라도 감사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결혼한 뒤에 네 앞으로 저택을 하나 선물할까 해.”

    그 말에 비비안느는 놀라 뤼드빅을 바라보았다.

    그는 앞을 바라본 채 덤덤히 말을 이었다.

    “거기서 살면서 네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해도 되고, 네 기자 친구 불러와서 티타임을 가져도 상관없어. 어머니가 널 관저에 들여야 한다고 우기면 내 선에서 잘 처리해 줄게.”

    “…….”

    “그러니까 오늘처럼 앞으로 힘든 일이 생기면 나한테 말하라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뤼드빅 너머로 바쁘게 오가는 자동차들이 보인다. 그는 묵묵히 차도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이었다.

    “오늘 같은 일이 생겼을 때 나한테 먼저 연락하고 의논해 줘서 고맙다는 뜻이고.”

    완벽한 결혼은 아닐지 몰라도 그럭저럭 좋은 결혼일 것이다.

    비비안느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밤거리를 한참 동안 걸었다.

    이렇게 모든 일이 정리될 것만 같았다.

    그다음 날, 뤼드빅의 말대로 귀족원 의장은 에드문드 콜트 백작을 만나 대화를 해 보려 했다.

    약혼자 앞에서 제 서자의 기를 세워 주려는 건 아니었다. 이 일을 빌미로 백작의 동태를 살피려는 것이었다. 그 오만방자하게 구는 놈의 낯짝도 한번 보고, 그가 어떤 대단한 패를 가지고 있길래 작년부터 이런 배짱으로 더럽게 사업을 꾸리나 알고 싶기도 해서였다.

    작년 겨울에서부터 올해 총선까지, 단단히 어긋나 버린 악연.

    암흑가 세력은 건방을 떨며 저들이 렉스 가문을 부렸다고 생각하지만 의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필요한 대로 쓰고 버리려던, 암흑가 쓰레기들이 모시던 주인의 손을 문 것이다.

    의장은 그 복수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제 서자가 사무치게 고마웠다. 그러니 이건 암흑가 세력의 수장을 제 방식대로 결단 내 버리기 전, 최후의 회동일 것이다.

    일종의 전초전. 서로의 패를 맞교환하는 자리이자 백작 같은 인물이 왜 제 보잘것없는 며느릿감을 탐내는지 알기 위한 탐색의 시간일 것이다.

    물론 백작은 이 생각을 반기지 않을 것이므로 의장은 사전 연락 없이 백작저에 찾아갔다.

    제 비밀을 쥐고 있는 인물이 직접 움직였는데 그 젊은 보스가 어떻게 해서든지 응접실에 나타날 거라는 확신에서였다.

    하지만 에드문드 콜트는 언제나 제 기대를 나쁜 상식으로 상회하는 인물이었다.

    의장을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어느 이방인 변호사였다. 그는 의장에게 정중히 말했다.

    “죄송하지만 백작 각하께서는 지금 자택에 계시지 않아 나중에 다시 약속을 잡고 찾아오심이 어떻겠습니까?”

    의장은 수어 번 백작저를 찾았으나….

    “오늘은 바쁘십니다. 일찍 비즈니스를 위해 자리를 비우셨으니, 다음번에 다시 오시면 그때는 꼭 응접실로 모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똑같은 대답에 질릴 때까지 몇 번이고 반듯한 거절을 들어야 했다.

    그러던 백작이 먼저 의장 측으로 연락한 건 그의 아들 결혼식 날 하루 전이었다.

    - 그간 제가 의장 각하를 섭섭하게 해 드렸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에드문드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꼭 그 며칠간의 일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태까지 두 세력 사이에 쌓인 빚을 두고 언급하는 오만이었다.

    개새끼.

    의장은 입에 물고 있는 시가를 자근자근 씹으며 통화에 응했다.

    “그래, 이제 대화할 생각이 좀 드나?”

    - 예. 마침 그간의 정도 있고 하니, 각하께 드릴 둘째 아드님 결혼 선물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오셔서 직접 보시지요. 후회하시진 않을 겁니다.

    그 말에 의장은 수화기를 쾅 내려놓았다. 제 비서관에게 리무진을 준비하라 이르고는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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