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14)
  • ❖ ❖ ❖

    ‘에드문드.’

    역시 안내받은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에드문드는 저를 훑고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뒤 소파에 기댄 몸을 일으켰다. 저절로 경계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수작이에요.”

    “글쎄, 쪽지가 바꿔치기 된 모양이지.”

    에드문드는 여유롭게 답했다.

    “넌 지금 황녀를 바람맞힌 셈이고.”

    “아뇨.”

    비비안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쪽지가 바꿔치기 된 게 아니라, 그걸 건네준 직원이 가짜였어요.”

    “똑똑하네.”

    에드문드는 한쪽 입매를 끌어 올려 근사한 미소를 지었다.

    “네 약혼자가 내 뒷조사 한 내용을 봤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어렵지도 않겠지. 대륙 너머에서 총을 밀수해 오는 것에 비하면 이곳 직원 옷 하나 구하는 건 상대적으로 쉬웠을 테니까.”

    역시 짐작했던 대로였다. 비비안느는 시선을 피하며 그에게 질문했다.

    “케이터링 서비스가 예약되었다는 건 진짜고요.”

    이 와중에도 저 남자 손에 달린 제 체면 걱정하는 상황이 수치스러웠지만, 그래도 알아야만 했다. 만일 그 가짜 직원이 한 말마저 모두 끔찍한 거짓이라면 저는 렉스 부인의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에드문드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내가 그 정도 돈도 없이 내 사람더러 알맹이 없는 거짓말을 시킬 리가 없잖아.”

    그 대답에 비비안느가 안심할 틈도 없이, 에드문드가 이어 말했다.

    “놀이를 하자는 것 같은데 그럼 이제는 내가 묻지, 우리 레이디께서는 아까의 직원이 가짜라는 건 어떻게 아셨는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의장 부인이 어디에 앉아 있고, 어떻게 생겼는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게, 전부. 로열 더비는 자유 좌석제니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모순이 눈에 보이죠.”

    “그래. 그런데 정확한 이유는 틀렸어.”

    에드문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비비안느가 뒤로 걸음을 옮겨 닫힌 문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등을 보이지 않은 채 문손잡이를 잡기 위해 손을 뻗자, 에드문드가 제 손으로 덮고는 문을 철컥 잠갔다.

    그의 손은 그녀의 손등을 녹일 듯이 뜨거웠다.

    에드문드가 비비안느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널 더 다치게 할 수도 있는 일을 할 때는 신중해야 하니까. 그래서 2황녀의 쪽지를 몰래 바꿀 생각은 못 했을 거야.”

    “그럴 능력이 없었던 건 아니고요? 로열 더비는 황실 행사니까 암흑가가 감히 개입할 수 없는 성역이잖아요.”

    “아니. 수표 몇 장에 충성을 바칠 직원이야 많아.”

    그 말과 함께 에드문드가 비비안느의 턱을 움켜쥐었다.

    “널 상석에서 조금이라도 더 잘 보려고, 내가 2황녀의 초대까지 마다하지 않았는데 고작 직원 하나 이용하는 건 얼마나 쉬울까. 그런데 쪽지를 바꿔치기하는 식으로 황녀를 바람맞히면 네게도 역풍이 올 테니 2황녀가 네게 케이터링 서비스를 선물하게끔 유도하는 쪽이 더 재미있지 않겠어. 그 사실을 알려 줄 가짜 직원 하나를 만들어 움직이고.”

    “…….”

    “안녕, 비비안느.”

    그가 때늦은 인사를 건네 왔다.

    비비안느가 고개를 비틀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하자,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

    “어쩔 생각이신데요.”

    “그러게. 웨딩드레스를 입은 널 보기 전에 이대로 널 한 번 더 품을까.”

    “제가 거절한다면요?”

    “그럼 내 죽은 말 값이라 쳐.”

    “그건 이미, 그때 백작저에서…!”

    “대금을 치르는 건 후불이었던 모양이지.”

    그 말과 함께 에드문드가 비비안느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비비안느가 애써 그를 밀어내려 하자, 그의 혀끝이 그녀의 들썩이는 목을 쓸어 올렸다.

    “그러면 네 약혼자와 대화하러 가게 둘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가 흰 피부를 강렬히 빨아들여 그녀는 정신이 아찔했다.

    온몸이 그를 기다렸다는 듯 전율했다.

    비비안느는 에드문드의 행실이 아닌 그를 기억하고 있는 제 몸의 감각이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이러지 말고 대화해요, 살렌너 호텔에서처럼.”

    정신이 아득해지려는 순간 비비안느는 입술을 달싹여서 겨우 말했다.

    직접 듣는 제 목소리 끝이 기묘하게 달아올라 있다는 게 신경 쓰였다.

    “네 몸은 다른 대화를 하고 싶다는 것 같은데.”

    그의 손이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 내리고, 찬 공기 속에 드러난 흰 살결에 고개를 묻고는 숭배하듯 얼굴을 비볐다. 에드문드는 비비안느가 아침에 바른 향유와 살 내음을 만끽한 뒤 다시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볼 것 같았어.”

    그의 손가락이 비비안느의 볼을 톡 치며 말했다.

    에드문드는 걸음을 옮겨서 소파 쪽으로 향했다.

    “어차피 오늘 건드릴 생각도 없었고. 레이디께서 대화를 원하시면 따라 드려야지.”

    “여기서면 충분해요.”

    비비안느가 에드문드의 팔을 잡으며 이야기했다. 한 겹의 셔츠를 사이에 두고 맞닿은 피부가 태연한 그의 말투와는 달리 달아올라 있어 그녀는 어색하게 손을 떼었다.

    곧 자신이 결혼할 상대인 뤼드빅이 자꾸만 에드문드의 비교 상대가 된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아까 관람석에서 뤼드빅의 팔을 잡아끌었을 때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왜 에드문드를 이렇게 불러 세울 때는 다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비비안느는 애써 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그에게 차분히 말했다.

    “제가 백작저에서 백작님을 쏘지 못한 걸 두고 착각을 하고 계신 건가 해서요.”

    “…….”

    “제가 그날 총을 쏘지 못한 건 피를 보는 게 무서워서예요. 백작님을 좋아해서라든가 일말의 연민 때문도 아니고요.”

    거짓말.

    그랬으면서 정작 공포탄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확인하지 못한 주제에.

    비비안느는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다행히 목소리는 떨리지 않는 걸 보니 그에게는 완벽한 냉정을 유지한 채 말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귀족 영애로서 오랜 시간 동안 교육받아 온 그녀는 제가 말할 때 어떻게 보이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 확신이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비비안느는 에드문드와 시선을 맞추며 이었다.

    “들으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최근에 황실 마구간에서 피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날 이후로 저택에서 요양해야 할 정도로 힘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제 손으로 백작님을 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

    “모든 사람이 백작님 세계에 속한 사람들과 같지는 않아요. 우리가 사는 삶이 다르고 세계가 다른 만큼….”

    비비안느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제 입 안으로 그의 엄지손가락이 슥 밀려들어 왔기 때문이다.

    담배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짭조름한 손가락이 혀를 헤집고는 입천장을 쓸었다. 짧은 탐색을 마친 그는 땅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나를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어도, 나랑 자는 건 좋았나 보네. 레이디 비비안느 메르고빌.”

    순수한 광기 같아 보여서 비비안느는 흠칫 몸을 떨었다.

    “매번 너랑 뒹굴 때 네 입 안이 얼마나 뜨거운지, 네 숨이 얼마나 단지 알아보고 움직였으니까. 이제 그쯤이면 네가 나를 원하는지 아닌지는 네 입 안에 손가락만 넣어 봐도 알아.”

    그 말에 누구보다도 부정하고 싶었으면서도 비비안느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비비안느는 오랫동안 그의 부재 속에서 제 삶을 버텨 냈고 지친 몸은 그가 주는 강렬한 자극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가 마차를 내어 준 날 아침, 그녀가 제 방에 갇혀 바랐던 해갈은 하늘에서 내릴지도 모르는 빗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가 주는 타액을 통해서일지도 몰랐다.

    그러다 그녀는 이 충동이 저를 어디까지 몰아붙였는지를 생각했다.

    경마가 시작하기 전까지도 그녀는 의장 부인의 아랫사람들이 저와 백작 간의 관계를 논할까 봐 겁에 질려 있지 않았나.

    뤼드빅이 아무리 저를 ‘고급 미끼’라고 칭해도 그녀는 에드문드에게 먹히고 싶지 않았다. 저를 위해서도, 서로를 위해서도 이 관계는 독이다.

    원초적인 본능을 꾹 눌러 놓은 채 비비안느는 에드문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요. 다 거짓말이었어요.”

    쓰레기 같은 약혼자를 상대로도 거짓말은 하지 않으려 했고, 친한 친구인 매디슨이 곤란한 질문을 해 와도 사실을 말해 주었다.

    하지만 에드문드에게만은 거짓말을 거듭했었다.

    천성을 거스를 정도로 그에게 제 진심을 숨기고 싶었고, 감정을 보이지 않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걸 알아 비비안느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렇게 된 당신이 불쌍하다는 것도.”

    “…….”

    “딱하고 가엾다는 보잘것없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저겠죠.”

    “…….”

    “백작님께서는 이런 저를 진짜 귀족으로 만들어 준다고 하셨지만, 글쎄요. 그깟 마차와 무도회로 귀족 놀이를 시켜 준다고 제가 뭐라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목이 메고 눈시울이 뜨거웠지만 비비안느는 무너지지 않은 채 또박또박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부모님께 뺨을 맞았을 때도, 약혼자가 다른 여자와 뒹굴었을 때도 저는 이미 가장 고귀한 가문의 세습 귀족이었어요, 백작님.”

    “…….”

    “그런데 이제 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리 비싼 옷들로 몸을 휘감아도, 무도회장의 가장 주목받는 여자가 되어도, 마차를 타도… 백작님 옆에 있으면 있을수록 역설적으로 하잘것없는 제 본질을 마주하는 기분이에요. 그러니까 안 돼요, 제가 아무리 원하더라도 자제하려 할 거고요.”

    “…거기까지가 네 입장인가?”

    에드문드는 잠긴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손가락 끝이 비비안느의 턱을 들어 올리자, 비비안느는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그의 손이 제 턱을 움켜쥐는 게 더 빨랐다.

    “그런데 그건 변명이 안 돼, 비비안느. 네가 말한 것들 전부 다.”

    “저는 변명하겠다는 게 아니라…!”

    “난 네게 선택의 기회를 줬고, 그 시간을 헛되게 날려 보낸 건 너일 텐데. 나랑 대화를 하려면 사랑한다고 귀엽게 재잘거리면서, 그러니까 꺼지라며 네 입장만 늘어놓을 게 아니라 내가 진심으로 싫다고 총질이라도 했어야지. 그래야 내가 납득하지. 이제는 내가 네게 선택의 기회란 걸 받아 낼 차례야.”

    “…….”

    “6일.”

    그가 그녀에게 준 시간이 여섯 시간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꽤나 지독한 처사였다.

    빠르게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6시간과는 달리 6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녀는 몇 번이고 흔들리고 고민하게 될지도 모를 테니까.

    에드문드가 말을 이었다.

    “그 안에 결정을 내려. 결혼식을 취소할 건지, 아니면 강행할 건지. 그리고 결과에 따른 선택은 이제 내가 해. 말했지만, 네 선택의 시간은 이미 끝났으니 지금부터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

    “꺼지라 하시니까 말씀대로 지금 당장은 꺼져 드릴 테니.”

    그 말을 남긴 채 그는 그녀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비비안느는 그 자리에 혼자 남겨진 채 숨을 골랐다. 그의 발걸음 소리조차 멀어졌을 때 그녀는 힘없이 문을 잠그고서야 바닥에 털썩 무너질 수 있었다.

    눈물이 새어 나오지는 않았다. 잔디 정원의 귀부인들이 저를 기다리며 제 표정을 훑을 것이었다. 그 모임이 끝나면 뤼드빅과 대화하기로 했으므로 눈이 부어 있으면 안 되었다.

    렉스 부인의 사람들은 제가 2황녀와 친한 줄 알고 있고, 지금도 저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 이해하고 있을 것이므로 의무적으로라도 행복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비비안느는 숨죽여 미소를 지어 보려다 몸을 웅크리며 숨을 헐떡였다. 불행은 이러한 증상만큼 익숙해 그녀는 금방 평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미소를 입에 걸어 보았다.

    지금은 서투르지만 잔디 정원에서는 완벽한 웃음이 되어 있을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오직 에드문드 백작만이 꿰뚫어 볼 수 있는, 제 가면이자 본질이었다.

    비비안느는 잔디 정원에 도착한 뒤 티 나지 않게 2황녀를 찾았다. 렉스 부인의 사람들은 자신이 황녀와 대화를 나누러 간 줄 알고 있으니, 황녀가 이곳에 있으면 꽤 민망해질 것이다.

    하지만 워낙 공터가 넓은 데다가 사람도 많아서 시선은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 위를 소득 없이 배회했다. 뤼드빅이 자신을 잔디 정원 초입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영영 일행을 찾지 못했을 뻔했다.

    뤼드빅은 걸음을 옮기며 말을 꺼내지 않았고, 그건 비비안느 또한 마찬가지였다. 2황녀를 찾는 걸 포기한 비비안느는 경치에 집중했다.

    잔디는 봄의 생기를 머금어 푸르렀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몇몇은 담요를 깔아 놓고는 그 위에 앉아 과실주를 마셨다. 또 다른 사람들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애프터눈 티를 또는 가벼운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저들끼리 깔깔거렸다.

    걸음을 옮길수록 비비안느의 표정도 천천히 풀어졌다.

    이내 그녀는 뤼드빅의 안내에 따라 렉스 부인이 앉은 테이블에 합석할 수 있었다.

    케이터링 서비스에 대해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테이블 위는 가장 값비싸고 귀한 음식들로 채워져 있었다.

    귀부인들의 입맛을 고려한 요리도 있었고, 이때 티타임을 가지곤 하는 저를 위해 준비한 각종 디저트와 티 세트도 있었다. 은으로 만든 듯한 삼단 트레이에 가득 채워진 마카롱과 스콘, 각종 머핀과 페이스트리가 탐스러워 보였다.

    마침 경마장 직원이 다가와 의자를 뒤로 빼 주어서, 비비안느는 자리에 앉았다.

    뤼드빅이 그녀의 옆자리를 채우고는 그제야 제 앞에 놓인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요리는 아까 들은 대로 연어 요리였는데, 싱싱한 붉은 살점이 상당히 맛있어 보였다. 비비안느가 뤼드빅이 식사하는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고 있자 경마장 직원이 그녀 옆에서 목청을 골랐다.

    비비안느가 고개를 돌려 그를 훑자 경마장 직원이 말했다.

    “음식이 금방 준비되어 나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식전주로 목을 축이고 계실 의향이 있다면, 내어 오겠습니다. 빈티지 샴페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내 약혼자는 대낮에 술 안 마셔.”

    뤼드빅이 대답을 가로채자, 비비안느는 뤼드빅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아니요. 그것도 황녀 전하의 호의일 테니 기꺼이 받아야지요. 마실게요.”

    “예, 금방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뤼드빅이 별일이라는 시선을 잠시 보냈으나, 황녀가 내어 주는 것이므로 받아들이겠다는 이유가 납득이 된 듯 제 음식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비비안느는 미약한 허기를 느끼며 제 잔을 들어 샴페인을 홀짝였다. 술에 대해서라면 뤼드빅의 말이 옳았지만 지금은 가라앉은 기분을 이렇게 억지로라도 끌어올리고 싶었다.

    렉스 부인과 그 무리들은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고 식사를 계속했다. 그러다 귀부인 몇이 자신에게 황가나 2황녀 전하에 대해 물어 왔지만, 비비안느가 짧게 대답만 했기 때문에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금방 음식이 나오자 비비안느는 식사에 몰두했고, 제가 마지막 연어 조각을 먹었을 때 뤼드빅이 손등을 툭툭 쳐 왔다.

    그러고는 몸을 기울여 ‘일어나자.’ 하고 속삭였고, 비비안느는 잠시 삼단 트레이를 한번 훑고는 시선을 갈무리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뤼드빅은 경마장에 제 차를 몰고 왔다. 그래서 돌아가는 길에 비비안느는 조수석에 탔고, 그는 운전을 했다.

    뤼드빅은 여태껏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단둘이 있을 시간을 낸 걸 보면, 평생 저렇게 입을 다물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항상 그의 가문 운전기사가 모는 랭스턴 리무진에 셋이 있는 것에 익숙했던 비비안느는 이런 분위기가 꽤 껄끄러웠다.

    그의 말문이 트인 건 ‘백작의 구역’이라며 언젠가 그가 소개한 거리 인근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마침 비비안느가 앉아 있는 곳도 1년 전 백작이 운전했을 때와 같이 조수석이라 그녀는 괜한 향수에 사로잡혀 거리를 바라보았다. 에드문드와의 관계는 바뀌었는데 골목은 그대로였다.

    그녀가 빵을 샀었던 가게, 그녀가 그와 함께 처음 옷을 골랐던 곳, 전파상. 비비안느의 시선은 거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잠시 후 차는 언젠가 뤼드빅과 함께 걸으며 그들의 미래를 이야기했던 골목에 다다랐다.

    그녀가 웨딩드레스를 처음 입어 보았던 날, 이 거리는 아직 녹지 않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비비안느는 멍하니 지붕이 낮은 저택들을 훑었다.

    그때 뤼드빅이 말했다.

    “최근에 이곳에 다시 올 일이 있었는데, 거리에 꽃이 피어 있더군.”

    그 말에 비비안느는 저택 앞에 놓인 앙상한 나무들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말대로 나무에는 단단한 목련 봉오리가 올라와 톡 터져 흰 꽃들을 내보이고 있었다.

    “…네가 말한 ‘우리’ 생각이 났어.”

    그가 힘주어 발음하는 ‘우리’라는 단어를 마지막으로 쓴 건 비비안느였다. 그와 다른 경마장에서 언쟁하기 전에 그녀가 그렇게 말했었다.

    비비안느가 숨을 죽이자 뤼드빅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뭐가 중요한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더군. 네가 드레스 입은 모습을 귀부인들에게 보여 주던 날, 네게 여기서 하고 싶었던 말은 네 백작을 잡아 족치겠다는 게 아니었으니까.”

    말은 그의 성정답게 거칠었지만 그런 포장 안에 담긴 진실은 퍽 부드러웠다.

    “이 일이 다 네 옆에 서기 위한 일이고, 난 널 위해서 네 적을 치는 개새끼는 되어도 네 아버지처럼 널 때리는 괴물은 안 될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 그래서 일을 서두르기보다는 한 번쯤은 결혼 먼저 생각하자고 마음을 먹었어. 네가 이 말을 안 믿을 걸 아는데….”

    “믿어요.”

    “비위 맞추려는 건 귀엽지만 입에 발린 말은 답지 않은데.”

    “아뇨. 진심으로요. 뒷좌석에 있는 건 오늘 수상 각하에게 보여 주려던 콜트 백작에 대한 자료인 거죠.”

    “…….”

    “그걸 무기 삼아 엘레노어 영애를 떨쳐 내고 렉스 부인을 상대로 제 결혼에 대한 확답을 받아 내셨잖아요. 정치적 망명처로 쥐고 있을 수도 있었던 패도 저를 위해 내버리셨고요.”

    “당연한 것을. 넌 내 기분을 항상 이상하게 만들어.”

    “…고마워요.”

    비비안느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신경 써 준 것도. 배려해 준 것도.”

    에드문드는 비비안느에게 파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결정하라 했었고, 비비안느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이대로 에드문드는 뤼드빅의 손에 끝날 것이고 저는 그로써 에드문드로부터 영영 도망칠 것이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비비안느는 고개를 돌려 뤼드빅을 바라보았다.

    “제가 이런 말 하는 게 싫으면….”

    그녀는 금방 입을 다물어야 했다. 뤼드빅의 귓불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어서였다. 그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다른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날 위해서 한 일이야, 메르고빌. 내가 너를 가지려고 한 일이고 그래서 네 백작을 망가트리려는 거라고.”

    그가 읊조렸다.

    “…하긴, 너는 자비롭고 고귀한 아가씨니까.”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로 한 말인데요?”

    “좋다고.”

    “네?”

    “네가 그런 말 하는 거.”

    “…….”

    “미안했어, 그간.”

    그 말에 비비안느는 제가 꿈을 꾸고 있나 싶어서 허벅다리를 꼬집어 보았다. 아팠다. 그녀는 창문을 내려 바람을 쐤다. 머리카락이 봄바람에 휘날리고, 아까 마신 샴페인 때문에 괜히 마음이 붕 떴다. 기분이 전환되는 느낌이었다.

    뤼드빅이 말을 이었다.

    “내가 너만큼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메르고빌.”

    “…….”

    “그래도 널 가장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 줄 수는 있어.”

    비비안느는 시선을 잠시 옮겨 거리의 꽃봉오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네가 백작을 마음에 품고 있다면 그것도 한번 생각해 보라고.”

    “그래요.”

    그렇게 답하며 이대로 백작은 잊자고, 그녀는 다짐했다. 여태까지의 긴 긴 겨울이었던 그를 제 삶에서 지워 버리자고.

    그녀의 삶에도 저렇게 강한 생명력이 들어찬 계절이 올 수 있는 걸까.

    비비안느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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