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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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시각, 뤼드빅의 사무실.

    “레이디 메르고빌께서 오늘 황궁에 타고 가신 마차입니다. 여러모로 화제인 모양입니다.”

    뤼드빅 렉스의 책상을 가로지른 건 신문이었다. 상류층의 가십을 다루는 것으로 보이는 신문사 1면 헤드라인에는 제 약혼녀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경마장에서 비비안느와의 언쟁을 떠올리던 뤼드빅은 눈을 질끈 감았다. 관자놀이를 누르자, 그의 참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근래 무리하셨습니다.”

    “…괜찮지 않아도 지금은 일을 끝내는 게 먼저야.”

    그 말과 함께 뤼드빅이 담배를 물고는 불을 붙였다.

    “내 약혼자와 결혼하기 전에는 이 일이 정리되는 편이 여러모로 좋을 테니.”

    “그 부분에 대해서 감히 조언을 올리고자 합니다만… 에드문드 콜트 백작의 정체에 대한 폭로를 결혼식 이후로 미룰 생각은 없으신지요.”

    그 말에 뤼드빅이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제 참모를 올려다보았다. 뤼드빅의 눈에는 당치도 않다는 듯한 비아냥이 서려 있어 위험해 보였다. 목청을 고른 그의 참모가 이어 말했다.

    “도련님께서 워낙 무리를 하고 계시는 데다가, 무엇보다도 만약 이 일이 잘못될 경우를 고려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희가 알아낸 자료로 보아도 백작은 보통내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자와 정면으로 맞서시는 데에 굳이 결혼식 같은 일정을 앞두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침 네가 이 헤드라인을 봤으니 설명이 쉽겠군.”

    뤼드빅의 손가락이 책상에 놓인 신문 1면을 조급히 탁탁 내리쳤다. 그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 마차, 어떤 돈으로 산 건지 아나?”

    “…도련님.”

    “우리 모두 지금껏 집요하게 에드문드 콜트의 현금 흐름을 쫓고 있어서 알고 있지 않나? 왜. 못 말하겠어?”

    “신대륙에서 백작의 사수였던 부르크너 씨를 매수하는 데 저희 측이 쓴 현찰이겠지요.”

    “그래. 다행히 지폐 일련번호로 알 수 있었지. 그런데 놈은 왜 다른 수단을 택할 수도 있었는데 이런 아마추어적인 실수를 해서 우리에게 이런 정보를 흘렸을까. 백작이 바보인가?”

    “아닙니다. 그 반대이면 몰라도, 말입니다.”

    “그렇지. 놈은 일부러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농락한 것이 틀림없어.”

    탁자 위의 신문 1면을 치는 뤼드빅의 손가락이 더더욱 조급해졌다.

    “우리가 그쪽을 쫓고 있는 걸 알기라도 한다는 듯 비웃으면서, 보란 듯이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지. 신문 1면에 난 마차 사진은 백작 측이 우리 쪽에 날린 우아한 야유였단 말이다.”

    “…….”

    “난 아직도 침대에 누워서 잠들 때마다 생각해. 이 새끼의 행동 동기가 무엇일지.”

    뤼드빅의 목소리가 사그라들자 그의 참모가 조심스러운 투로 물어 왔다.

    “그래서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셨습니까.”

    “…내 약혼녀.”

    그는 입술 새로 연기를 흘려보내며 읊조렸다.

    “그 외에 이 미친 짓을 설명할 방도가 있나? 그러니까 콜트 백작 나리께서 이왕 정체를 들키게 될 거, 제 명줄을 내 손에 맡겨 두고 내 약혼자라도 더 탐하시겠다는 거겠지.”

    “…….”

    “그런데 그 기만의 시간을 내가 부러 늘려 줄 이유가 더 없겠지. 누구 좋으라고.”

    그 말을 마친 뤼드빅은 이를 으득, 갈았다. 그의 참모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뤼드빅의 시선이 다시 한번 신문 1면으로 향하고, 동시에 그의 표정이 풀어졌다. 뤼드빅은 목 안으로 웃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도 사랑에 미친 백작 나리께서 황실과도 척을 져 주셨으니 다행이야. 일을 더 쉽게 만들어 주셨잖아.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야.”

    “예.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뤼드빅의 참모는 말했다.

    “렉스 도련님께서 이길 것이 확실하다면 굳이 시간을 벌 이유는 없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일해야지. 다아트로 제국에 입점한 오트 쿠튀르 브랜드 회장들에게서 소식 들어온 건 없나?”

    “여기 있습니다. 백작이 총기 유통으로 돈을 벌고는 이런 식으로 사업을 확장한 모양이더군요.”

    뤼드빅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료를 받아 보았다.

    그의 참모는 말을 이었다.

    “한때 대륙 곳곳에 가죽 수출 금지령이 내려진 적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다 각국 정부가 명품 의류와 가방에 사치세를 부과하기로 하니 오트 쿠튀르 브랜드의 회장들이 이 문제로 꽤 골머리를 앓았던 모양입니다.”

    “총 판 돈으로 한참 재미 보고 있었던 우리 백작 나리께서는, 그 건을 기회로 이제 더 큰물에서 놀게 되었고.”

    “예. 제국 내에서 쓰고 있던 유통망을 동원하여 대체제 유통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상류층의 인맥들을 늘리고, 건설 자재부터 담배 유통까지 더 큰돈을 벌어다 주는 사업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

    “반면, 배곯는 다아트로 내국인들에게는 구호 식품들을 제공하고 불법으로 수입해 온 석탄 가스들을 보급해 빈민가의 등을 켜게 해 주었다더군요. 노동자들의 마음을 그렇게 쉬이 얻어 갔다죠.”

    “…그다음에는 흘러넘치는 돈으로 교구 경찰들 주머니를 채웠다. 이거, 내 약혼녀만 끼어들지 않았어도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았을 거였잖아?”

    뤼드빅은 피식 웃었다.

    “부나방 새끼.”

    그는 제 참모가 이 정보들을 정부 기관보다 더 빨리 얻어 올 만큼 유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여태껏 그는 에드문드 콜트가 뿌린 먹이를 야금야금 집어 먹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허세 부리다 타 죽기나 하지.”

    그는 그렇게 일에 매진하며 비비안느에 대한 생각을 습관적으로 억죄고는, 그녀를 공식적으로 만나 볼 수 있는 로열 더비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제 어머니가 저더러 로열 더비에 엘레노어 영애와 동행하라 지시해 비비안느를 망신 주려 한다는 의도를 내비치기 전까지는.

    그런 고매하신 뜻대로 되게 두지 않겠다며 뤼드빅은 조소했다.

    결국 그가 제 고집을 꺾고 참모의 의견을 귀담아듣기로 한 이유였다.

    그렇게 로열 더비 날이 밝았다.

    로열 더비.

    그날 비비안느의 하루는 평소와 같은 날처럼 시작되었다.

    “아가씨.”

    마사가 세숫물을 가져다주기 위해 그녀의 방문을 노크했다. 오늘따라 유독 일찍 일어나 눈을 깜박이던 비비안느는,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들어와.”

    그렇게 말한 비비안느는 시계를 보았다. 7시. 애프터눈 티 타임 전에 시작하는 로열 더비에 가려면 지금 움직여야 했다. 문이 열리고 마사가 걸어 들어와 비비안느에게 물었다.

    “드디어 오늘이 결전의 날이네요. 여기 세숫물이고요.”

    비비안느의 무릎 위에 작은 테이블이 놓이고, 따뜻한 세숫대야와 마른 수건이 그 위에 자리했다.

    “…마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요깃거리가 필요하시면 제가 주방에 몰래 다녀올 수 있는데요. 그간 식단 관리를 철저히 해 오셨으니 오늘 아침에 조금 먹는다고 부어 보이지는 않을 거예요.”

    “아냐. 괜찮아.”

    비비안느는 따뜻한 세숫물에 손을 적시며 말했다.

    “그래도 마음만은 고마워.”

    “네에. 역시 아가씨께서는 오늘 정말 완벽해 보이셔야 할 테니까요. 엘레노어 카스터인가 뭔가 하는 것한테 밀리면 안 되죠! 우리 아가씨가 어떤 분이신데….”

    비비안느는 마사에게 웃어 보이고는 세수를 마쳤다.

    마사가 세숫대야를 치워 두자 비비안느는 화장 거울 앞에 가서 앉았다. 마사는 그녀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며 말했다.

    “시녀장님이 같이 안 오셔서 다행이에요. 분명 오셨다면, 그 딱딱한 얼굴로 ‘아가씨, 마님께서는 오늘 경마에서의 승리가 확실한지 궁금해하십니다.’ 하고 말했을 거라니까요?”

    마사의 성대모사가 시녀장의 목소리와 꽤 닮아서 비비안느는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어? 아가씨, 방금 웃으셨네요. 역시 다른 메이드들이랑 잘 연습한 보람이 있어요.”

    그렇게 말한 마사의 표정에 뿌듯한 기색이 어렸다.

    “또 한 번 해 드릴까요? 큼큼.”

    그녀가 목청을 골랐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가씨.”

    그러자 비비안느가 고개를 돌려서 마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거, 정말 시녀장 같았어. 어떻게 한 거야?”

    그때였다.

    “아가씨.”

    똑같은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와 두 사람의 시선 모두 문 쪽으로 향했다. 마사가 방금 두 번은 제가 아니었다는 듯 고개를 젓자, 비비안느와 마사가 시선을 교환했다. 마사가 비비안느만 들을 수 있을 법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들렸을까요? 그러니까 저기 문밖의 시녀장님께요.”

    비비안느는 고개를 저어 보이며 말했다.

    “들어와.”

    그러자 문이 열리고 시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뒤를 돌아 일렬로 서 있는 시녀들을 훑으며 말했다.

    “목욕 시중을 들 아이들입니다. 마침 마님께서 저택에 새로 들인 향유가 있는데 오늘 치장할 때 제격일 겁니다. 아, 그리고 마님께서는 오늘 경마에서의 승리가 확실한지 궁금해하십니다.”

    그 말에 비비안느가 웃음을 터트리고 마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시녀장은 의아하게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별것 아니야. 와 줘서 고마워들. 그리고 시녀장도.”

    비비안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녀들이 일제히 예를 표했다.

    그들을 훑던 비비안느는 시녀장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계획이 틀어지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승패에는 변수가 없을 거라고 어머니께 아뢰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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