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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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저택으로 돌아간 비비안느는 맨손으로 돌아온 벌로 방 안에 갇혔다. 더 끔찍한 건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는 물 한 모금도 주지 말라고 명한 것이었다.

    그녀는 백작과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항변했으나 돌아온 답은 가관이었다.

    “몸도 못 내주고 그 카스터가 계집을 렉스가로부터 떼어 내 주겠다는 언약도 못 받아 왔다고?”

    “네, 아버지. 이런 제 몸이 징그러워서 손대기도 싫다더라고요. 그러니 자중하시지 그러셨어요. 아버지가 이렇게 만들어 놓지만 않았더라도 다르지 않았겠어요.”

    진실과는 다른 말이었지만 그녀는 제가 가장 두려워하던 바를 아버지 앞에서 서슴없이 꺼내 놓았다. 제 아버지를 자극할 말이라는 걸 알아서였다. 아버지는 제 따귀를 올려붙이려 손을 올렸다가 물러섰다.

    언젠가 그의 사위가 될 뤼드빅 렉스 또한 똑같은 생각을 품으면 어쩌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곧 그가 방 밖으로 나갔고, 홀로 남겨진 비비안느는 쓰게 웃으며 제 방에서 시간을 죽였다. 돌아온 날 하루 동안은 백작이 자신에게 연락해 약속한 대로 제 경주마를 보내겠다고 말하길 기다렸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희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져만 갔다.

    그다음 날 비비안느는 극심한 허기를 느끼며 잠에서 깼다. 시녀들이 그녀의 시중을 들지 않아 그녀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다. 그녀는 목이 말라 잠시 꽃병 속의 물을 훑었지만 곧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해갈을 위해 하늘에서 비라도 오면 좋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선은 전화기로 옮겨 갔으나 아직까지 연락은 없었다.

    ‘정말 시녀들에게서 내 몸에 대해 전해 듣고는 그런 농담으로 어물쩍 넘어가려 한 건 아닐까.’

    비비안느의 어깨가 축 처졌다. 분명 그에게 겨눈 피스톨이 장전되어 있었다는 걸 알면서도 허기가 지니 생각은 부정적인 쪽으로만 흘렀다.

    비스킷 같은 게 방에 남아 있을지 찾아보려고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 덜그덕 소리가 나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비비안느는 방 안으로 밀려드는 빛에 눈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 누가 문을 열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마사?’

    그녀가 가정부의 열쇠를 가로채 저를 탈출시켜 주려는 것일까. 비비안느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마사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아가씨. 나와서 이것 좀 보세요. 이건 아가씨가 직접 보셔야 해요…!”

    그러고는 제 대답도 듣지 않고 방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비비안느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다시 되돌아온 마사가 아직 닫혀 있는 다른 쪽 문밖으로 고개를 쏙 내밀더니 말했다.

    “아가씨. 어서 오셔야 한다니까요. 빨리요.”

    그 말에 비비안느는 종종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고작 하루 동안 방 안에 전기 없이 갇혀 있었을 뿐이었는데도, 아침 햇빛을 보니 현기증이 치밀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앞 정원에 핀 꽃들에 싱그러운 아침 이슬이 맺혀 있는 풍광이나 특유의 아침 공기가 좋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소식을 가장 늦게 들은 사람이었는지, 저택의 정문에는 온 사용인들과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라이너스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가 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마당에서 본 것은 마차였다.

    그때 무도회에서 타고 온 마차.

    특이한 점은 마차를 이끌고 있는 네 마리의 백마 중 한 말만 까맣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쉬이 그 말의 이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헤게모니.’

    황녀의 말을 이겨본 적 있다던 유일한 백작의 경주마였다.

    흑마의 자태를 훑고 있던 비비안느와 마부의 눈이 마주치자, 그가 마부석에서 내려 비비안느에게로 다가왔다.

    “비비안느 메르고빌 영애 되십니까?”

    비비안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복식이 꼭 왕자님의 구혼 서류를 들고 온 시종의 옷차림 같아서 그녀는 속으로 작게 웃었다.

    이런 우중충한 시대에 저 화려한 마차를 끌고 제도를 가로질렀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제대로 끌었을 것이다.

    스모그로 잿빛이 된 하늘, 빳빳한 양복을 입은 채 굳은 얼굴로 제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과 포장된 도로 위를 달리는 마차라니. 그건 무도회 밤의 유희로 끝인 줄 알았는데.

    새삼 에드문드가 저를 진짜 귀족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말을 기억하고는 이런 사소한 것에도 신경을 쓰나 싶었다.

    “에드문드 콜트 백작 각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약속했던 대로 경주마 ‘헤게모니’를 내어 주시겠답니다. 마차도 마찬가지로요.”

    “…하지만 아가씨. 이 저택에는 마구간이 없는걸요.”

    저택의 가정부가 비비안느 쪽으로 걸음을 옮겨 말했다. 마차를 바라보고 있던 비비안느는 답했다.

    “걱정할 것 없어. 공작도 그걸 염두에 두고 마차까지 보내셨을 테니까.”

    “네? 그게 무슨….”

    “마사. 마부께 감사의 의미로 차 한 잔 대접해 주겠어? 내가 마침 전화를 한 통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예, 아가씨.”

    그렇게 말한 마사가 마부를 응접실로 안내하자 비비안느는 부모님과 라이너스에게 시선을 보내고는 위층으로 향했다. 자신의 방으로 향할까 잠시 고민하던 비비안느는 걸음을 옮겨 오빠인 라이너스의 방으로 향했다.

    책장에 오차 없이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두꺼운 책들, 지구본 모형 그리고 멀리 저 구석에서 자리를 지키던 모형 글라이더를 훑던 그녀는 그의 책상 위의 전화기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향해 수화기를 들었다.

    “네. 귀족원의 렉스 의장께서 머물고 계신 관저로 연결해 주세요.”

    곧 전신국 직원이 기다려 달라 말한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제가 누굴 찾는지 알고 있는 모양인지 전화를 받는 건 렉스 부인이었다.

    일이 잘 풀린다면 제 시어머니가 될지도 모르는 이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 이른 시간에 연락 주셨네요, 영애. 소식은 들었어요. 이제 와서 포기할 생각이라도 든 건가요?

    동시에 그녀는 인기척을 느껴 등 뒤를 바라보았다.

    제 오빠 라이너스가 문 앞에 서서 저와 시선을 맞추었다. 제 방에서 뭣 하고 있냐는 표정이었다.

    비비안느는 시선을 옮겨 다시 앞쪽을 보고는 통화에 응했다.

    “아뇨. 반대예요. 이제는 제가 제안을 드리러 전화했어요.”

    - 그런가요. 영애께서 내게 할 그 제안이라 함은….

    “마침 제가 쓸 만한 경주마를 하나 구했는데, 제 말과 렉스가 종마를 바꿀 생각은 없으신가 해서요. 정확히는, 귀부인의 둘째 아드님이요. 제 건 혈통 면에서도 훨씬 나으니 손해 볼 거래는 아닐 거라 생각하는데요.”

    - 영애. 만약 백작에게 도움을 청해서 그 경주마를 받아 낸 거라면,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해야겠어요. 그 말이라면 분명 경마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두겠지만 그 말이 내 이름을 걸고 로열 더비에 출전한다고 생각해 봐요. 영애와 백작에 대한 추문만 대중에게 각인시켜 주는 꼴이니 영 형편없는 꼴이 되지 않겠어요?

    “아뇨.”

    비비안느는 대답했다.

    “제가 거래의 조건으로 제안 드리는 경주마는, 제국의 2황녀 전하의 말 ‘네메시스’예요, 부인.”

    - …….

    “그 말이 렉스가 이름을 달고 로열 더비에서 뛴다면 부인의 체면을 크게 살려 주지 않을까요?”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참 동안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제게 약속하신 게 있을 테니, 로열 더비 이후로 엘레노어 양의 가문과의 친분은 정리해 주시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그 말이 이길 테니까요.”

    - 그래요. 뭐든 결과가 나와 봐야 아는 거겠지만. 언제나 그랬듯, 건승을 빌어요. 영애.

    그 말과 함께 렉스 부인이 수화기를 먼저 내려놓았다.

    비비안느 또한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제 오빠의 잘 정돈된 책상을 한번 훑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책상 서랍 첫 번째 칸을 열었다. 그곳에는 기억하는 대로 오빠의 공무 집행용 권총이 놓여 있었다.

    “비비안느.”

    라이너스가 다가와 그녀를 저지하려 했지만 비비안느가 더 빨랐다. 그녀는 그대로 권총을 집어 들고 해머를 내렸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겨 벽에 총을 쏘았다.

    타앙-.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총구를 내렸다. 손가락이 다시 한번 해머를 내리고 벽을 향해 총을 겨누었을 때였다.

    성큼성큼 걸어온 라이너스가 그녀를 제압해 총을 빼앗고는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다.

    “…두 번째부터는 실탄이다, 비비안느 메르고빌. 화가 나거든 분풀이는 벽에다 하지 말고 내게 말로 해.”

    비비안느는 그를 무시하고는 고개를 돌려 벽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어깨를 뒤틀자 라이너스가 그녀를 놓아주었다.

    비비안느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제가 쏜 벽 쪽으로 향했다. 워낙 먼 거리에서 공포탄을 쏜 탓에 벽은 조금 파였을 뿐 뚫리지는 않았다. 그녀가 바닥에서 탄피를 찾았을 때 먼저 그쪽에 있었던 라이너스가 그걸 구둣발로 뭉갰다.

    “네 기행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겠는데.”

    그의 등 뒤로 총성을 듣고 온 사용인들이 문가에 서서 서로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비비안느의 고개가 그쪽으로 향했다는 걸 깨달은 라이너스가 등 뒤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다들 물러가도록! 어머니와 아버지께는 신경 쓸 일 아니라고 전해.”

    그러자 그들이 문을 닫고는 일제히 자리를 비워 주었다. 라이너스의 정돈되지 않은 금발 아래 갈색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싸늘히 빛나자 비비안느가 입을 열어 말했다.

    “…어제 백작저에서 나랑 백작이랑 아무 일도 없었다고 내가 아버지께 말한 거, 사실이야.”

    “그래.”

    라이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안느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백작이 내 몸을 흉측해해서 나를 안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사실 백작은 나를 품에 넣고 그냥 잠을 잤거든. 그러고는… 나더러 자길 죽여도 좋다고 했었어.”

    “…….”

    “저 멀리 사이드 테이블에 권총을 놔두고 말이야.”

    그래서 비비안느는 어제 새벽 내내 왜 자신이 그 총을 쏘지 못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사람이 죽는 게 두려워서?

    그렇다고 치기에는 상대는 자신을 죽이려 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그녀는 평생 그 사람이 자신을 다시 죽일지도 모른다는 고통 속에 살아야 했을 것이다.

    뒷일이 두려워서?

    하지만 그가 말한 대로 그녀의 행동을 충분히 정당화할 수 있는 자료가 뤼드빅의 손에 있었다.

    그녀가 원한 게 복수였다면 망설이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가 원했던 건 그 반대였다는 걸 깨달았다.

    애정.

    정확하게는 오늘 아침 그가 그녀에게 보내 준 마차 같은 상냥함이었다. 그걸 본 순간 그녀에게 간절해진 건 렉스 가문과 공고해질 약혼보다는 에드문드와 함께할 수 있는 미래였으니까.

    아주 잠시였지만 그녀는 에드문드의 품에서 느꼈던 온기가 끔찍하게 그리워졌다.

    비비안느는 제가 실수를 할까 봐 겁이 났다.

    이대로 메르고빌가 영애로서의 할 일을 외면하고 백작에게 가 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물밀 듯 들이닥쳤다.

    그래서 비비안느는 턱을 떨며 겨우 말했다.

    “백작이 내게 준 총에 장전되어 있었던 건 공포탄이겠지?”

    그녀의 간절한 시선이 오빠 라이너스에게로 향했다.

    “…방금 내가 쏜 것처럼. 그 사람은 내가 공포탄으로 저를 쏘게 하고는, 그렇게 나를 시험하고 나를 없애려는 생각이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지라도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곧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해 평생을 함께할 거고, 그 남자가 에드문드 콜트 백작을 망가트릴 거라는 현실 속에서 안정을 되찾으려면 그렇게라도 믿어야 했다. 비비안느가 멍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난 공포탄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잖아. 직접 보고 싶었어. 그 총에 장전되어 있는 총알과 비슷한지 아닌지.”

    저를 보는 라이너스의 시선은 아주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일말의 동정도, 또는 그 어떤 감정도 묻어 있지 않은 이성적인 시선.

    약혼자 뤼드빅은 제 오빠 라이너스가 자신을 위해 경찰이 되었다고 했는데 그녀는 가끔 저 눈을 보면 그 사실이 의심되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라이너스가 발을 떼어 밟고 있던 공포탄의 탄피를 제게 보여 주려는 순간 비비안느는 고개를 휙 돌렸다.

    “아냐. 생각이 바뀌었어.”

    비비안느는 황급히 말했다. 어느 쪽이든 진실은 그녀에게 아플 뿐이었다.

    애초에 이런 일을 한 것도 정말 사실 여부를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가족들 중에서는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인간적인 쪽에게 제 속내를 털어놓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라이너스의 눈을 본 순간, 비비안느는 그런 걸 그에게 기대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전화 한 통만 더 할게. 라인브릿지 여사님께 연락해서 2황녀 전하께서 어제의 제안을 재논의할 생각이 있는지 여쭐 참이야.”

    “그래.”

    그가 대답하자 비비안느는 전화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고마워.”

    곧 비비안느는 전화를 마쳤고, 라인브릿지 여사를 통해 2황녀가 당장 자신을 만나 보기를 원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더 낭비할 시간이 없어서 그녀가 방 밖으로 걸음을 서두를 때, 등 뒤의 라이너스가 기다렸다는 듯 물어 왔다.

    “만약 콜트 백작이 너를 그렇게 신경 쓴다면, 왜 엘레노어 카스터를 네 약혼자 곁에서 치우는 대신 네게 경주마를 선물했지?”

    “그 사람은 오만한 데다 못됐으니까.”

    비비안느는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었다.

    “내가 렉스가 신부가 되기보다는 그냥 이기기를 바랐던 모양이지.”

    “누구를.”

    “2황녀와 렉스 부인을.”

    그리고 에드문드 콜트 백작은 그럴 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와 처음으로 아침을 같이 먹었을 때, 그는 저에게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괜찮습니까? 약혼자의 정부가 주제넘게 도발한 건.”

    그녀를 업신여기는 상대가 2황녀든, 의장 부인이든 간에 에드문드는 그 꼴을 두고 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렇게 어깨에 힘을 실어 주려는 걸 보니 그만큼 제 체면을 신경 써 준 사람이 또 있었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놓아주는 방법은 고를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비비안느는 가슴 쪽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리는 느낌을 겨우 억눌렀다.

    “그럼 이만 실례할게. 알다시피 우리 저택에 마구간은 없으니까, 마당의 저 말들을 넣어 둘 제국에서 가장 큰 마구간으로 가 볼 생각이라서.”

    그 말을 마지막으로 비비안느는 현관으로 향해 마부를 다시 만났다. 굳은 표정의 부모님을 지나친 뒤, 마차에 오르고는 마부에게 말했다.

    “황궁으로 가 주세요. 2황녀님께서 마침 저를 기다리신다더군요.”

    그렇게 그녀는 명마 ‘헤게모니’가 이끄는 마차를 타고는 당당하게 황궁으로 향했다.

    이 마차는 한때 다아트로 제국의 황제가 소유하던 것이라 하던데, 그 사실을 곱씹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2황녀는 그녀가 했던 조언이 정면으로 반박당한 뒤 자신을 마주하는 것일 터였다.

    “다 와 갑니다, 레이디 메르고빌.”

    비비안느는 마부의 말에 창밖으로 시선을 옮겨 황궁이 가까워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침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기분 좋게 살랑살랑 흔들었다. 곧 그들 앞에서 정문이 열리고 비비안느는 말들이 앞으로 나아가 궁 안쪽으로 진입하는 걸 실감했다.

    곧 마차가 멈추었고, 마부가 바닥으로 뛰어내려 문을 열어 주었다.

    제가 황궁에 이 마차를 타고 온 일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는 라인브릿지 여사의 얼굴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꼭 대낮에 유령이라도 본 얼굴로 자신과 마차를 번갈아 보았다.

    비비안느가 마차에서 내리자 라인브릿지 여사가 목청을 고르고는 말했다.

    “황실 일가를 제외하고는 황궁에서는 마차를 타고 이동할 수 없으니, 여기서부터는 저와 걷는 편이 좋겠군요.”

    “네, 라인브릿지 여사님.”

    “그리고 다음번에는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행동은 자제하는 게 좋겠어요. 황제 폐하께서 쓰셨던 마차를 굳이 타고 나타나는 건 어떠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답니다.”

    “그런가요.”

    비비안느는 걸음을 옮기는 라인브릿지 여사의 옆에서 정중하게 말했다.

    “그런데 만일 제가 저 마차와 말들을 황녀 전하께 선물할 생각이었다면, 괜찮을까요.”

    “…….”

    “약속대로 황녀 전하께서 원하신 말을 가져왔는데 황궁으로 어떻게 옮겨야 할지를 몰라서요. 말을 직접 타고 오는 것보다는 이편이 정중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녀의 말에 라인브릿지 여사는 대꾸할 말을 잃은 채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앞장섰다.

    비비안느는 어제 왔던 길을 그대로 걸어가 황실의 마구간 앞에서 2황녀를 만날 수 있었다.

    마차는 이미 도착해 있었고, 2황녀는 마차를 끄는 네 마리 말 중 흑마 앞에서 황실 마구간지기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비비안느가 그녀의 앞으로 가서 예를 표하자 2황녀가 제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말이 백작의 명마인 모양이지?”

    “예.”

    “콜트 백작과 아무 사이도 아니라더니만. 내가 그때 영애의 말을 잘못 이해한 건가.”

    “아닙니다, 황녀 전하.”

    “…….”

    “이 나라에서 수천만 에포네짜리 경주마를 거저 내어 주는 사람이 있었다 뿐이죠.”

    비비안느의 말에 자리에서 물러나려던 라인브릿지 여사도, 마구간지기도 놀라서 비비안느를 바라보았다.

    특히 2황녀의 개인 비서는 비비안느에게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맥락을 빼고 본다면 비비안느의 발언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2황녀는 비비안느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내 조언을 깊게 잘 새겨들었던 모양이네, 영애. 훌륭하다고나 해야 할까.”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이 말들과 마차를 황녀 전하께 바치고 싶은데 받아 주신다면 저와 제 가문에 큰 영예가 될 것 같습니다.”

    “영애의 말대로라면 이제는 수천만 에포네짜리 경주마를 거저 내어 주는 사람이 둘이나 되겠네, 안 그래?”

    “…….”

    “그래. 내 경주마 ‘네메시스’를 내어 주지. 선물을 받았으면 응당 그에 걸맞은 선물을 내려야 하니까.”

    그녀가 비비안느를 내려다보며 말하자, 비비안느는 황송하다는 듯 예를 표했다.

    2황녀가 제 개인 비서에게 시선을 던졌다.

    “렉스가 측으로 로열 더비에서 쓸 말을 보내겠다고 해. 그리고 내 명마 ‘네메시스’와 함께 메르고빌가와의 결합을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도록.”

    “감사합….”

    “그러고 보니.”

    비비안느의 말이 끝나기 전에 2황녀가 말했다.

    “내가 했던 조언을 영애가 그렇게 잘 기억하고 있다면, 영애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도 역시 잘 기억하고 있겠네. 그렇지 않나?”

    “이 말이 제국의 어느 경마에도 출전하지 못하길 바라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 그랬지. 이제는 그럴 수 있으니 영애에게 감사해야 할까.”

    그 말을 남기고는 2황녀는 휙 뒤돌았다. 그 순간 비비안느는 그녀가 미처 숨기지 못한 자존심 상한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걸음을 옮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비비안느는 귀를 강하게 때리는 소리에 잠시 이명에 시달려야 했다.

    그녀는 이 소리를 오늘 한 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이건 권총을 쏘았을 때의 파열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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