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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렌너 호텔로 떠나기 전에 어머니가 제게 해 주었던 말이 있다.
“다행이구나. 그 몹쓸 다리가 부어서 움직임이 흉측해 보일 줄 알았더니, 네 춤 선생도 그쯤이면 만족한 것 같고.”
그 말을 떠올리던 비비안느는 멍하니 그의 침대 위에 옹송그린 채로 캐노피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에드문드는 제가 다쳤다는 것만 알지 제 몸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마침 아까 저를 목욕시켜 주며 제 다리를 보고 미간을 찌푸리던 시녀 몇의 얼굴이 떠올랐다.
만일 에드문드도 똑같은 낯을 하고 저를 내치면 이제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새 걱정은 다른 국면으로 바뀌어 비비안느의 가슴을 빠르게 뛰게 했다.
‘어차피 부르튼 데는 종아리 뒤쪽뿐이니까.’
비비안느는 어떻게든 그걸 숨겨 볼 셈으로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 있자니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관자놀이에 눈물이 흐르는 걸 느끼며 그녀가 눈을 감았을 때, 바깥에서 누군가가 언성을 높이는 게 들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예전에 그녀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자신의 팔을 잡아끈 여인의 목소리인 듯했다.
상황을 살피고자 비비안느는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목욕 가운을 여몄다. 그리고 문 쪽으로 향해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바깥에는 세 시녀가 일렬로 선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까 나를 목욕시켜 준 시녀들이잖아?’
그 앞에는 백작저의 가정부로 보이는 여인이 서서 그들을 질책하고 있었다.
그때 비비안느는 그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했다. 저 세 명은 모두 제 다리의 상흔을 보고는 역겹다는 얼굴을 했던 이들이었다. 비비안느가 조심스레 방 밖으로 걸어 나가자, 그들을 질책하던 여인이 자신 쪽으로 걸어와 말했다.
“해고.”
여인의 손가락 끝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녀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비비안느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가 제 등 뒤에 있는 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리 상처. 안주인께 무례.”
“…네, 고마워요. 그런데 전 안주인이 아니라.”
그쯤 말했을 때 복도의 다른 방문이 열리고, 에드문드가 걸어 나오자 비비안느는 문을 재빠르게 닫고는 침대로 달려가 그 위로 기어 올라갔다.
곧 방문이 다시 열리고 시선이 마주쳤다. 비비안느는 질세라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그가 다가오는 걸 보았다. 그는 말없이 제 앞에서 제 베스트의 단추 쪽으로 손을 옮기더니, 그걸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베스트가 땅에 떨어졌을 때, 그가 제 손을 끌어다가 그의 첫 번째 셔츠 단추 쪽에 가져다 대었다.
허공에서 그와 그녀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의 손이 비비안느의 머리카락을 다시 한번 쓸어 넘겼을 때, 그녀는 이미 터진 아랫입술을 다시 한번 잘근 물고는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에드문드가 완전히 반라가 되었을 때, 비비안느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 남자를 만나는 것의 역설은 바로 이런 데 있었다.
바로 자신이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만큼 그를 강렬히 원한다는 것이었다. 비비안느는 문득 그를 온전히 가지게 되는 여자는 정말 행운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저처럼 그가 가지고 노는 여자가 아니라 그를 울게 할 수 있고, 그를 비참하게 만들 수 있고, 그를 아프게 할 수 있는 사람 말이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버클이 있는 쪽으로 향할 때 그가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건 됐어.”
그녀가 움찔거리며 물러나자 그가 침대에 올라와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고는 누웠다. 난데없이 이불에 파묻히게 된 비비안느는 눈을 깜박였다. 시선을 내려 보니 그의 팔이 제 허리를 감싸고 있는 게 보였고, 등 뒤로는 그의 탄탄한 몸이 느껴졌다.
문득 등 뒤에서는 사내의 살 냄새, 비누 냄새… 그리고 익숙한 육욕의 냄새가 났다. 또한 아까 그녀가 마셨던 위스키의 향기 또한.
그는 그대로 그녀의 목에 고개를 묻고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게 뭐 하자는 건가 싶어 그녀가 몸을 바둥거리기 시작하자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착하게 굴어야 할 텐데.”
제 귓가를 나직이 스치는 명령에 비비안느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나한테 빚진 게 있잖아, 비비안느.”
비비안느는 그 의미를 완벽히 이해했다. 그때 그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근래 잠을 못 자고 있거든. 그러니까 네가 날 재워 줘야지.”
“…….”
“뭐 다른 걸 생각했나?”
그 말을 들은 비비안느는 제 귓불이 타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몸을 씻고 오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여유였다.
그런 그가 죽도록 얄미웠지만 동시에 가슴이 쿵쿵 뛰어 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제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며 말했다.
“네가 말했던 대로 넌 내가 질렸겠지.”
“…….”
“생각만 해도 싫고. 무섭고. 어떻게 보면 불쌍하기도 하겠어.”
모두 비 오는 날 그와 집에서 밀회를 가졌을 때 제가 한 말이었다. 실제로는 정반대의 말들이었지만. 제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는 걸 등 뒤의 남자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이어서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이러는 게 끔찍하단 것도 이해해.”
정반대를 걱정하고 있었던 비비안느로서는 의아함만 남길 뿐인 말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끝에 졸음이 배어났다. 이제는 거의 한계에 다다른 잠긴 목소리로 그가 겨우 말했다.
“그런 네 말들이 진심이었다면 내가 눈을 붙일 동안 너는 저 사이드 테이블에 있는 권총으로 날 쏘고 떠나, 비비안느. 이건 시험이 아니라 내 마지막 자비이니까 믿어도 좋아.”
“…….”
“아프게 죽여도 되고, 심장 같은 델 노려서 한 번에 보내도 돼. 네 약혼자한테 다아트로 암흑가 보스인 내 신원을 증명하는 증거들이 있으니까, 네 형량은 살인죄치고는 그렇게 높지 않을 거야. 아니면 변호사를 고용해 정당방위를 받아 낼 수도 있겠지.”
“…….”
“그런데 이번에 네가 그렇게 네 말들을 증명하지 못하면….”
에드문드의 말에 비비안느는 숨을 죽였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저 멀리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권총을 바라보았다.
“…난 네 약혼자를 가장 처참한 방법으로 부숴서, 너를 그 잘난 절차대로 가질 거야.”
그의 말이 그녀의 귓속에 속삭여졌다. 비비안느가 제가 알고 있는 단어들을 조합해 저 말의 뜻을 해석하려고 애쓰고 있을 때 그의 말이 이어졌다.
“기회를 주는 건 내가 지금부터 빌릴 여섯 시간 동안뿐이야.”
그는 그 말을 남기고는 그대로 잠들었는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들려오는 건 그의 고른 숨소리와 죽은 듯한 정적뿐이었다. 비비안느는 한동안 그의 향기를 맡으며 멍하니 눈만 깜박이다가, 고갤 돌려 권총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그가 농담을 하나 싶어서 몸을 스르륵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었는데 그는 정말 곤히 잠들어 있었다.
비비안느는 다리를 모으고 앉아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단단한 팔 쪽을 밀어 보았다.
‘…정말 자는 거야? 이렇게 무방비하게?’
그다음 그녀는 그의 완벽한 손등 위를 꼬집어 보기도 했고, 고개를 숙여 맥박이 뛰는 그의 목에 손가락을 올려 보기도 했으며, 조용히 그의 품 안에 안겨 들어 보기도 했다.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파묻으며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그의 뺨을 어루만지다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어 보았는데도 그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문득 가까이서 보니 그의 얼굴이 어딘가 피로해 보였다. 과로하느라 통 잠들지 못했나 생각만 할 뿐이었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온기를 느끼고 있다가 문득 시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삶에 지친 그녀 또한 이런 품이 간절했다는 자각에 잠시 어깨를 떨며 울었다.
아무도 그녀를 지켜보고 있지 않는 상황에서야 제 감정을 흘려보내는 게 편했다.
비비안느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가만히 훑었다. 근육이 완연히 이완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를 벗어났다.
그녀는 멍하니 서 있다가 침대 끝에 도로 앉아 사이드 테이블 위의 권총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니 요원의 빌라에 있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악몽을 꾼 날 밤, 그래서 에드문드가 제 옆에서 품을 빌려준 날도 그녀는 침대에 누워서 저 멀리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권총을 바라보았었다.
그 권총은 그때 그녀가 미라볼타 거리에 향하기 위해 가지고 나갔다가 그에게 미처 돌려주지 못했던 것이었다.
‘에드문드가 들고 있다가 도로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은 것이었지.’
그날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나, 그의 의도에 대해서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무심했던 그는 왜 그 새벽에 피스톨을 손에 들고 제 침대 앞에 있었을까? 라는 질문에 답을 하고자 하면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그는 그녀를 죽이려던 거였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은 도리어 그가 저더러 죽여 달라 말하고 있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비비안느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이드 테이블 위의 권총을 쥐었다.
그러고는 사내에게로 가까이 걸어가, 언젠가 어깨너머로 흘긋 보고 배운 것처럼 권총의 해머를 천천히 눌러 보았다. 그러자 트리거가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비비안느는 그쪽에 손을 걸고는 그의 심장을 향해 겨누었다.
‘…….’
에드문드는 그녀가 그에게 했던 말을 증명하라고 했다.
이걸 내려놓으면 더 이상 그를 싫어한다는 거짓말은, 그래서 제 약혼자가 이겼으면 한다는 말은 그에게 할 수 없는 걸까.
그걸 노렸으면 정말이지 머리 좋은 남자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그를 죽이지 못할 거고 그는 제 말이 모두 그를 밀어낼 구색일 뿐이라는 걸 이토록 쉽게 증명해 내 버렸으니까.
그의 목숨을 걸고 한 승부수였지만 결국 그는 또 이기고야 말았던 것이다.
비비안느는 공허한 눈으로 제 손에 들린 쇳덩어리를 보며 생각했다.
과연 저를 죽이려는 남자가 권총을 제 손에 쥐여 줬을까.
결국 난사 당한 건 그에게서 멀어지려던 그 근원적인 이유 하나뿐이었다.
공포.
그녀는 총을 원래 자리에 내려놓고는 그에게 향해 그의 이마 위에 입을 맞추었다. 제 약혼자에게 전화해 그를 대신 죽이라는 말은 할 생각도 못 한 채 개켜 놓았던 자신의 옷을 주섬주섬 입고 그를 떠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에드문드의 말대로 운전기사는 1층에 대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