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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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 보자면 이 일의 원흉은 콜트 백작이었다.

    비비안느는 살렌너 호텔에서 그를 마주 보며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데 추문이야 따라붙는다 해도 렉스 가문만큼은 저를 버리지 않는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그 사람들 참을성이 바닥나지 않는 한 제가 어디로 도망갈 생각은 없어요.”

    그때 에드문드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어야 했다. 고작 그와 함께 춘 왈츠와 모형 글라이더에 정신이 팔려 그가 어떤 함정을 놓고 저를 기다렸는지는 몰랐다.

    약혼자를 공격하는 대신 약혼 자체를 공격하겠다니. 영리한 전술이었다.

    ‘엘레노어 카스터와 결탁해 렉스 부인이 나를 직접 버리게 만들었으니까.’

    에드문드 콜트의 정체에 대한 진실이 드러나며, 여태껏 비비안느는 그를 피해 왔다. 그리고 그녀의 대응에 대한 에드문드의 입장은 이로써 명료해졌다. 그는 그녀와의 관계에서 손을 먼저 놓을 생각이 없을 듯 보였다.

    이번에도 비비안느는 문제를 직면하는 대신 약혼자의 뒤에 숨어 빙 둘러 가는 해결책만 찾을 생각이었으나, 끝내 정면 돌파를 택하기로 했다.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다.

    세노윅 영지에 도착했다는 걸 깨달은 비비안느가 염려스러운 기색을 감추며 메르고빌가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정말 어머니께서 내가 백작저에 가 보겠다는 결정에 별말 없으신 거 맞아?”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대답은 전혀 희망적이지 않았다.

    “메르고빌 가문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후작 부처께서는 하루라도 빨리 렉스 가문과의 약혼이 안정화되길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

    “어차피 콜트 백작과 아가씨 두 분께서 밀회를 가지시는 게 이제는 렉스나 메르고빌 양가에 놀라울 일도 아니니, 만약에 백작이 원하는 게 있다면 그대로 해 주라는 게 메르고빌 후작 부인의 말씀이셨습니다.”

    “…….”

    “그렇게 카스터 가문의 엘레노어 영애를 치워 내게 하든가, 아니면 백작으로부터 명마를 얻어 와 2황녀 전하를 기쁘게 해 드릴 기회를 얻어 내든가. 그렇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황궁 응접실에서 전화를 한 통 빌릴 때, 그런 얘기를 정말 어머니께서 하셨단 말이야?”

    “예, 아가씨.”

    그러면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들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2황녀와의 대화를 떠올린 비비안느는 어머니의 비수 같은 말들이 황녀의 측근에게 어떻게 들렸을지를 짐작하고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부모님의 뜻을 전하는 운전기사의 말이 이어졌다.

    “엘레노어 카스터 양은 아가씨께는 위협이겠지만 렉스 가문에게는 수틀렸을 경우의 대비책이자 탈출구입니다. 후작 부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상태가 유지되면 렉스 가문에게는 선택지가 두 개가 생기는 셈이라 그쪽에는 이득이며 고로 그들을 쳐 낼 이유가 없습니다. 뤼드빅 렉스 님이 굳이 서두르지 않는 이유이겠지요.”

    “…….”

    “하지만 메르고빌은 다릅니다. 이 상태로는 뤼드빅 렉스 님의 승리가 자명할 테니, 아주 조금이라도 일찍 카스터라는 매력적인 혼처를 제거하고 레이디의 위치를 지켜 내라는 명이십니다. 그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말입니다.”

    곧 메르고빌가의 랭스턴 리무진이 백작저 정문 안으로 진입했다.

    에드문드가 원하는 게 제 몸이든 시간이든, 그는 이 사냥에서 또다시 이긴 게 틀림없었다.

    에드문드는 비비안느를 그의 방에서 만나겠다고 했다. 응접실도 아닌 개인 공간에서 보자는 의도가 너무나도 뻔해 비비안느는 비참함에 몸서리치면서도 따라야 했다.

    에드문드의 맞은편에 비비안느가 앉자마자 그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다시 만나지 말자며.”

    그녀가 그에게 살렌너 호텔에서 했던 말이었다.

    더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달라졌어?”

    비비안느는 그에게 해야 할 말을 알면서도 선뜻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위스키를 바라보았다. 비비안느는 말없이 그쪽에 놓여 있는 글라스를 가져와 빈 잔을 채웠다.

    “나 주려고?”

    그가 물었을 때 그녀는 떨리는 두 손으로 잔을 잡고는 독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목구멍이 타는 것 같고 머릿속이 금세 이상해졌다. 이런 걸 이 남자는 물처럼 마시며 산다는 거지?

    비비안느는 그게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곧 텅 빈 잔이 둘 사이의 테이블 위에 놓였다. 에드문드는 비비안느와 잔을 지긋이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거 내가 쓰던 건데.”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간힘을 써서 제가 앉은 카우치를 뒤로 밀어 보려 하다가 잘 안 되는 걸 알고는 테이블을 에드문드 쪽으로 살짝 밀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 와중에도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에게 왜 그랬냐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분노는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심화시킬 것이었다. 가족이 시킨 것처럼 사무적으로 거래를 제안하기에는 제 체면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감정에 호소하기에는 이 남자에게만큼은 비참해 보일 수 없다는 생각에 차마 입술을 뗄 수 없었다. 무릎을 꿇는 것 정도는 위 세 개의 선택지에 비하면 퍽 견딜 만했다.

    “백작님.”

    그녀는 이만큼이나 에드문드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의 비밀로부터, 이 감정들과 이런 상황들로부터 전부.

    그래서 비비안느는 잠시 작년 생일날 저택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까지 잠시 하게 되었다. 그러면 그와 이토록 얽혀 이런 꼴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에드문드를 사랑한다는 게 제일 고통스러웠다.

    비비안느는 정신을 추스르고는 말을 이었다.

    “엘레노어 양이 제 약혼자 곁을 떠나게끔 해 주세요.”

    “안 돼.”

    “…그러면 부디.”

    그의 명마를 내어 달라고 말하려던 비비안느는 그만두었다.

    2황녀가 오늘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이 나라에서 수천만 에포네짜리 경주마를 거저 내어 주는 사람은 없을 거야, 영애. 새겨들어.”

    그건 백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똑같은 굴욕을 두 번 당할 생각이 없었던 비비안느는 목구멍 밖까지 가까스로 튀어나온 말을 꾹 눌러 넣었다.

    “그러면 부디, 뭐.”

    백작이 그녀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물어 왔다. 비비안느는 천천히 시선을 올려 그의 수려한 얼굴을 훑었다. 그가 원하는 대답이 있다는 걸 그녀는 직감했다. 그녀의 짐작이 맞았는지 에드문드가 친절히 정답을 가르쳐 주었다.

    “널 아내로 삼아 달라고 해야지.”

    “…….”

    “네가 탐내는 내 명마도 그런 식으로라면 합법적으로 얻을 수 있지 않겠어. 내 것이 모두 다 네 것이 될 텐데.”

    속지 마.

    비비안느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이 남자를 제가 얼마나 그리워했었는지, 그리고 그 기대를 그가 어떻게 무참히 진흙탕 속에 처박았는지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릿해져 왔다. 더 다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또다시 죽이려 한다면, 그때 그의 처분이 얼마나 매서울지 생각하니 정신이 차려지는 기분이었다.

    그를 사랑했기에 그의 옆자리만큼은 바라봐서는 안 되었다.

    이 남자는 육욕을 애정 같은 걸로 착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며. 사람들이 으레 불쌍한 동물들에게 적선하곤 하는 그런 동정이 사라지고 나면 어떻게 될지 잘 아는 그녀는 제 처지를 되새겼다.

    동시에 그녀는 제가 그의 옆자리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를 실감했다.

    “싫어?”

    그때 에드문드가 물어 오자 비비안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테이블을 한 손만으로 옆으로 치워 내고는 그녀에게 명령했다.

    “가까이 와, 비비안느.”

    “…….”

    “무릎을 움직여서 와야지.”

    목소리는 어딘가 화를 억누르는 듯 보였다. 꼭 제가 이렇게까지 자존심을 세우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처럼.

    비비안느는 그녀의 짐작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살짝 들어 보았지만 제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 그의 하관, 그의 우람한 상체와 다리와 구둣발만 볼 수 있었다.

    체념하며 느릿하게 그의 앞으로 무릎을 써서 기어갔다. 그러는 순간순간 가슴이 너덜거리는 종잇장이 되는 기분이었다.

    결국 그녀가 그의 두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꼴이 되었다.

    세노윅 공작저에서 그가 똑같은 걸 요구했을 때 그녀는 그러고 싶지 않다며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기어코 그녀가 제게 다시 오게 만들었다.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걸 의식하고 있을 때, 그의 손이 그녀의 턱선을 부드럽게 쓸어 보았다. 그녀가 살짝 옆으로 고개를 치우자 손이 턱을 움켜 고정했다. 비비안느가 그렇게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그가 훨씬 위쪽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약혼자도 널 고급 미끼라 하고.”

    “…….”

    “네 가족들도 널 버렸고.”

    비비안느는 가슴이 조금이라도 덜 아팠으면 하는 마음에 아랫입술을 베어 물었다.

    결국 그녀의 입술 아래로 피가 흐르기 시작하자, 에드문드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훔쳤다. 그가 잠시 제 턱을 놓아주고는 그의 엄지손가락을 느리게 핥아 올렸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온 걸 보면 2황녀에게 도움도 못 받은 모양이네.”

    그의 다른 손이 비비안느의 머리통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리 아가씨 성미에 그 여자 말을 다 들어 줬고.”

    “…….”

    “그래서 오늘따라 이렇게 내 마음에 드는 짓만 골라서 잘하는 걸까.”

    비비안느는 얼굴에 닿는 그의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박여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이런 남자였는데도 알아채지 못하고. 그녀의 숨이 입술 바깥으로 가쁘게 새어 나갔다. 그녀는 거의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그를 버텨 내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알겠는데, 나는.”

    “…….”

    “내 경주마를 줄게. 어차피 네 약혼자를 그런 식으로 이기려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 말에 비비안느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의 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그의 수가 경마와 엘레노어 카스터 양이 아니었다니. 그 말 자체가 더 무서웠다. 그가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 살렌너 호텔에서 잠시나마 그 상황을 가정했을 때 온몸을 잠식하던 떨림이 그녀를 미친 듯이 압박했다.

    “대신….”

    그 말과 동시에 그가 고개를 기울여 와 그녀와 시선을 맞댈 정도로 가까워졌다. 비비안느가 질끈 눈을 감았을 때 그의 축축한 혀가 입술 아래에서 느껴졌다.

    그는 그녀의 턱에 묻은 제 피를 핥아 내고 있었다. 그녀가 숨을 몰아쉬자 혀가 위로 올라가 제 터진 입술을 훑었다. 따끔거리는 감각이 온몸을 타고 퍼졌다. 비비안느의 어깨가 하릴없이 흔들렸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그가 고개를 기울이고 그녀의 터진 입술을 물었다. 그가 그걸 빨아 내기 시작할 때 비비안느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노력했다. 그렇게 그는 제 피를 탐내던 그대로 밀려났다. 비비안느는 두 팔로 바닥을 짚고 앉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나랑 자자, 비비안느.”

    그때 그가 그 말을 입에 올렸다. 비비안느는 그 말에 거의 무너졌다. 밑바닥보다 더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살렌너 호텔에서부터 이어진 내심, 그가 제 몸이 아닌 저를 원해 주길 바랐다는 바람이 배신당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그는 보기 드문 비비안느의 눈물을 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씻고 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싫으면 도망가도 상관없어. 네 운전기사가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비비안느는 이대로 집에 돌아가는 순간 일어날 일을 알았다. 부모님은 절대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고, 더 다치고, 더 상처 입을 것이며 이보다 더 흉측해진 다리로 그녀가 갈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지금 자신은 형편없었다. 명예도 바닥으로 처박히고 황녀마저도 자신을 이 남자의 밀회 상대쯤으로 여기는 게, 꼭 자신이 뤼드빅의 정부를 바라봤던 때와 같다.

    그러나 제가 이 남자의 침실 외에 갈 곳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비비안느는 다시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저와의 약혼반지를 낀 손으로 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네가 욕실로 가면 시녀들을 불러 주지.”

    그 말에 비비안느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도망갈 곳이 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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