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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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에 도착한 비비안느는 황궁의 시종에게 2황녀 전하를 만날 때의 예법에 대해 안내를 받았다.

그 절차가 끝나자 바로 라인브릿지 여사와 함께 황실의 마구간으로 이동했다.

“제 편지를 2황녀 전하께 전달해 주셔서 감사해요, 라인브릿지 여사님.”

비비안느는 따뜻한 햇볕이 제 구두코 위에 내리는 걸 느끼며 옆을 바라보고 말했다. 라인브릿지 백작 부인은 흐뭇한 미소를 걸고는 말했다.

“아닙니다. 별것 아닌 일이었어요. 결국 레이디를 여기로 부르신 건 황녀 전하시니, 감사 인사는 아껴 두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대답은 자로 잰 듯 반듯했고, 황실 시녀다운 격이 있었다.

“네, 여사님.”

비비안느는 부모님이 신신당부한 대로 단정하게 답했다.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는 그들의 조언을 되새겼다. 그럼에도 실제로 황가의 일원을 만난다는 생각에 긴장이 되어 그녀는 결국 라인브릿지 여사에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저, 여사님.”

“네. 영애.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게, 그분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하실까요? 제국의 2황녀님이요.”

언론에 비친 제국의 황실은 폐쇄적이고, 그 어느 집단보다 배타적이었다.

거기다 마침 그녀가 만나기로 한 제국의 2황녀는 그중에서도 성미가 까탈스럽기로 소문이 자자한 이였다. 그런 분께 그녀의 명마 ‘네메시스’를 빌려 달라는 부탁을 해야 하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걱정 마세요.”

라인브릿지 여사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접견 신청이 받아들여지는 게 흔한 일이 아니거든요. 그런 친절을 베풀어 주신 분이니, 2황녀 전하께선 분명 영애를 좋게 봐 주실 거예요. 거기다… 영애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잖아요.”

“제가요?”

비비안느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라인브릿지 여사를 바라보는 눈에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라인브릿지 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멍하니 하늘을 보고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으시니까요. 그것만으로 선방하셨다고 보아야지요.”

“아….”

비비안느는 잠시 멍한 얼굴로 있다가 다시 라인브릿지 여사를 보며 웃는 낯을 했다.

“그럼요, 감사합니다. 여사님.”

“마침 도착한 모양이네요.”

그렇게 말한 그녀의 앞으로 황실 마구간이 가까워졌다.

앞서가던 시종이 마구간지기로 보이는 사람에게 무어라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열어 주었고, 곧 멀리서 승마복을 입은 금발의 여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위로 올려 묶고 있었는데, 따사로운 햇볕에 비친 눈동자는 푸른색이었다. 비비안느는 저만큼 자세가 곧은 사람을 처음 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손이 명마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을 때, 시종이 앞서 걸음을 옮겨 그녀에게 무어라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녀가 시선을 옮겨 라인브릿지 여사와 저를 차례로 훑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이 다시 이쪽으로 걸어와 말했다.

“2황녀 전하께서 레이디 메르고빌을 만나 보시겠다고 합니다.”

비비안느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저 말의 이름이 네메시스겠지.’

저 말을 빌릴 수만 있다면 에드문드에게 가지 않고도 이 난국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면 부모님께서도 왜 뤼드빅이 나를 도우려 하지 않는지, 어째서 렉스 부인이 엘레노어의 가문과 이야기를 주고받는지 더 이상 따져 묻지 않겠지.’

그리고 아버지도 제가 에드문드와 살렌너 호텔의 무도회장에서 새벽 내내 춤을 춘 것에 대해 질책하는 걸 멈출 것이다.

‘그러니 제발.’

비비안느는 저 말을 잠시만이라도 얻어 낼 수 있기를 바라며 걸음을 옮겼다.

“2황녀 전하, 이쪽은 메르고빌 후작가의 여식 비비안느 메르고빌입니다.”

비비안느가 시종을 따라가 멈춰 섰을 때, 시종이 그녀를 2황녀에게 소개해 주었다. 황녀의 벽안이 비비안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환영 인사는 아니었지만 비비안느는 전달받은 대로 그녀에게 커트시(curtsy)를 하고는 말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그래서 네가 그 유명한 메르고빌가의 여식인가? 콜트 백작과 염문이 돈다던.”

“…예.”

비비안느는 ‘그분을 아시나요?’ 같은 말로 황녀가 그 말을 하는 의중을 떠보고 싶었지만 가까운 곳에서 날카로운 눈초리로 자신을 훑는 2황녀의 개인 비서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예법에 따르면 비비안느는 황녀의 질문에 질문으로 답할 수 없었다. 황녀가 말하면 자신은 ‘예.’ 또는 ‘아니오.’로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황녀가 더 듣고 싶어 한다면 추가적인 질문을 할 것이므로 상세한 건 그때 말하여 그녀의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없어야 했다.

“네 남자와 무슨 사이냐고 묻고 싶은 얼굴인데, 내 말이 맞지. 비비안느 영애?”

황녀가 턱을 치켜들며 물어 왔다. 뉘앙스가 꼭 질투하냐고 묻는 듯해 대답하기가 꺼려졌다. 하지만 비비안느는 황녀가 ‘내 말이 맞는지’ 물어 오는 질문에는 가급적 ‘아니오’로 대답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개인 비서의 당부를 기억하고는 입을 열었다.

“…예.”

“따지자면 악연이지. 내 경주 말의 무결한 기록에 오점을 남겨 준 남자니까. 참, 영애가 이 말에게 관심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다, 황녀 전하.”

드디어 제가 원했던 주제 쪽으로 대화가 흘러가는 것 같아 비비안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들었겠지만 이름은 네메시스야.”

날카로워 보였던 그녀의 눈매도, 제 갈색 말에게로 향할 때는 부드러워졌다.

“절대 정복할 수 없는 상대, 이길 수 없는 적이라는 뜻이지. 그리고 이 말은 제 이름처럼 살았어. 종마를 전문으로 교배하는 신대륙의 이름난 마구간에서 내가 직접 발견했을 때부터, 이 애는 날 자랑스럽게 해 줄 걸 알았고 쭉 그래 왔거든.”

“정말 멋진 말이네요, 황녀 전하.”

“네가 말에 대해서 더 배우면, 혈통부터 생김까지 이 말은 완벽 그 자체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이 말을 위해서라면 난 뭐든 해 줄 수 있지.”

2황녀가 고개를 돌려 비비안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어느새 부드럽게 휘어 있었다.

“그나저나. 내 사교계 소식통에 의하면 네가 콜트 백작과 같이 만찬장에서 자리를 비웠다고 하던데.”

비비안느는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2황녀의 곁에 있는 시종이 목청을 골랐다.

무례하게 굴지 말고 어서 답하라는 종용이었다. 물론 그때 살렌너 호텔의 로열 스위트에서는 백작과 아무런 일도 없었지만, 그 말이 암시하는 바가 있어 쉽게 입을 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곳에는 마구간지기, 2황녀의 개인 비서를 비롯해 왕궁 시종까지 세 명의 사내가 있었다.

비비안느는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감히 2황녀의 앞에서 거짓을 고할 수는 없어 말했다.

“…예, 하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그래? 내가 보기에는 사내들이 너 같은 애랑 한방에 있는데 가만둘 리가 없어 보이는데.”

비비안느는 당장에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저 말을 빌려야 한다는 일념에 버텼다.

숨을 겨우 몰아쉬고 있을 틈에 또 다른 질문이 밀어닥쳤다.

“소문이 사실인가? 콜트 백작과 영애가 가장무도회 전에도 관계를 가졌다는 거 말이야.”

“황녀 전하, 제가 이곳에 온 건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이지 제 개인사를 발설하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메르고빌 영애.”

2황녀의 개인 비서가 비비안느 쪽으로 시선을 주며 차가운 목소리로 뇌까렸다.

“이곳으로 안내받기 전에 교육을 미흡하게 받았나 봅니다. 황녀 전하께서 영애에게 질문을 하면, 영애께서는 ‘예.’ 또는 ‘아니오.’ 이 두 가지로만 답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괜찮아.”

2황녀가 제 개인 비서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2황녀는 비비안느를 보며 말했다.

“도움? 무슨 도움.”

“황녀 전하께 명마 네메시스를 빌려주십사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비비안느는 꿋꿋이 그녀에게 말했다. 2황녀는 팔짱을 낀 채 물었다.

“왜?”

“…….”

“왜 나한테서 내 명마를 빌리고 싶어 하지, 메르고빌 영애?”

그녀가 거절을 하지 않았다는 데서 비비안느는 희망을 읽었다. 그걸 만끽할 틈도 없이, 그녀는 그럴듯한 대답을 생각해 내야 했다.

‘렉스 부인이 나를 떼어 내지 못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물론 여러 사교 모임에서 화술을 다진 비비안느는 손쉽게 황녀에게 대답할 수 있었다.

“제 약혼자에게 결혼 선물로 렉스가 이름을 단 말이 우승하는 걸 보여 주고 싶어서요, 황녀 전하. 곧 있을 로열 더비에서요.”

“그래서 나한테 편지를 써서 이곳까지 걸어 들어왔다?”

2황녀는 뭐 이런 별종이 다 있냐는 듯 피식 웃었다.

“좋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구간지기가 놀란 눈을 하고는 2황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베푼 호의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는 그것만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

비비안느가 2황녀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전에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대신 보답으로 백작의 말 ‘헤게모니’가 제국의 어느 경마장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해 줘.”

“…황녀 전하.”

“왜, 못 하겠어? 그냥 네 백작한테 가서 그래 달라고 부탁하면 될 거 아냐.”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와 콜트 백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

“그러면서 내 말을 빌려 달라 부탁한다고.”

“…….”

“이런, 내가 시간 낭비를 한 모양이야. 내 소식통들의 말을 듣고 이 모임을 통해 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2황녀가 개인 비서를 향해 질책의 시선을 던지자 그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시키고, 저 또한 보고를 올릴 때 면밀히 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 오빠도 오랜만에 황궁에 있을 테니 같이 차나 마셔야지. 말이나 돼? 나한테 돌려줄 것도 없이 거저 내 말을 받아 갈 생각이었다니….”

그렇게 걸음을 옮기던 2황녀는 다시 뒤를 돌아 비비안느를 한번 훑었다. 그러고는 비릿한 미소를 짓더니 앞으로 걸어와 말했다.

“너, 평생 네 집에서 곱게 자랐지? 테이블 위의 벨을 흔들면 사용인들이 들어와서 네 비위를 맞추고.”

“…예, 황녀 전하.”

절박함에 이곳까지 온 비비안느의 희망이 바닥까지 내리꽂히는 순간이었다.

“같은 처지라서 곱게 봤었거든. 네가 귀족들의 상징 같은 존재라 해서, 고작 상징으로 전락한 우리 황실을 네 위에 겹쳐 보다 수많은 접견 요청에도 네 편지를 골라 답을 썼었고. 그러니까 여기까지 왔다 가는 기념으로 조언을 하나 해 줄게.”

“…….”

“이 나라에서 수천만 에포네짜리 경주마를 거저 내어 주는 사람은 없을 거야, 영애. 새겨들어.”

그 말을 남기고 2황녀는 자리를 떠났다. 시종이 비비안느에게 다가와 황궁 밖으로 안내해 주겠다는 말을 꺼냈다. 비비안느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황녀의 말은 틀린 곳이 없었다. 그저 절박함 하나로 이곳까지 찾아온 제 행동은 무모한 게 맞았다. 하지만….

‘이대로 소득 없이 집에 갈 순 없어. 부모님이 날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비비안느는 경마장에서 뤼드빅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가만히 좀 있어. 네가 주겠다는 그 도움이라는 게 정말 쓸모나 있었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을 거 아냐. 고급 미끼면 고급 미끼처럼 굴어, 나서지 말고.”

그러고는 손을 꼭 말아 쥐었다.

그녀가 에드문드가 있는 콜트 백작저로 떠나기로 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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