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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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느와 뤼드빅이 특실에서 관람석이 있는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는, 경마가 막 시작했을 참이었다.

확성기가 터져라 경마 해설자의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사람들은 너도나도 쌍안경을 들고 경주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비안느는 마권을 꽉 쥐고 있는 평민 사내들, 관람석 중심 쪽 난간에 서 있는 귀족들을 한번 훑다가 다시 뤼드빅을 바라보았다.

“저 좋은 생각이 났는데요.”

괜히 경주로만 바라보고 있던 그가 그제야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비비안느는 뤼드빅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당신 가문 안주인께서, 경마에서 1등을 하게 도와주면 약혼을 유지하게 해 주겠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다 파혼을 위한 쓰레기 같은 핑계야. 대응할 것도 없이 네 백작을 망가트리면 해결될 일 아닌가?”

“아뇨. 꼭 소란을 만들지 않고도 더 일찍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

“어차피 제도 경마장이 암흑가 수장의 권역이라 순수히 실력만으로 우승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로열 더비를 노려보는 방법도 있어요.”

“로열 더비?”

“네. 황실에서 주최하는 연례행사이니 아무리 암흑가 세력이라도 그곳에서 장난은 치지 못하겠죠.”

비비안느는 갑자기 또 쌀쌀해진 날씨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직 한기가 가시지 않은 봄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녀는 제 옆에서 뤼드빅의 시선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적당한 말을 구할 수 있나 도움을 청하러 왔었는데, 약혼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 의견이 같아서 다행이에요.”

그렇게 시선은 경주로에 유지한 채로 비비안느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다음 그녀는 자연스럽게 언어를 바꾸어 말했다.

[있잖아요, 저도 샹프니야어라면 꽤 해요.]

상대측에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당신이 이 자리까지 아득바득 올라온 이유에 대한 말, 들어 버렸는데 제가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비비안느는 다시 뤼드빅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절 정말 좋아하세요?”

때마침 우승마가 정해졌는지 경마 해설자가 확성기에 대고 열변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비비안느의 옆얼굴을 보기 좋게 가린 긴 생머리가 바람에 살짝 흔들렸고, 뤼드빅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한테서 마음을 바라지 말아 달라며.”

뤼드빅은 제 슈트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는 말했다.

“그런데 이제 네가 날 참아 줄 이유가 없어서 유감이군.”

그녀가 한때 의상점에서 그와 함께 걸어 나오며 했던 말을 언급하는 것이다.

“더 바라지만 말아 주세요. 그래 주신다면 제게 어떤 말을 하든 어떻게 대하시든 상관없어요.”

비비안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

“이렇게 제가 당신 약점을 찾아낸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렇게 말하며 비비안느는 그의 심장 쪽을 바라보았다.

완연히 자신을 향한 것이므로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제는 그 사실을 외면해 안전한 보호막으로 쓸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백작에게 돌아갈지 결론을 내려야 했다.

생각을 마친 비비안느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저를 미끼로 이용하고 저는 그쪽에게 작위를 줄 약혼자로 남는다, 이 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당신이 제게 마음을 품지 않는 거였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제 죄책을 그런 식으로라도 덮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네요.”

“글쎄. 바뀌었나?”

뤼드빅이 말하며 실소를 지었다. 비비안느는 당치도 않다는 듯 그를 보며 말했다.

“이제 와서 발뺌하려 하지 마세요. 저 샹프니야어 꽤 해요, 그리고 당신이 애초에 이 일에 뛰어든 게 다 누구 때문인지 들었는데….”

“11년 전 내가 네 약혼자가 되고 가문의 개처럼 살아왔던 이유였을 지도 모르는 게 지금 드러난 건데. 무엇이 바뀌었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메르고빌.”

“아무튼 그렇다면 당신에게 저를 예전처럼 대할 권리는 더 이상 없어요.”

비비안느는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뤼드빅이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먼저 떠나려 했을 때였다.

“…대신 제게 친절하게 대해 주시면 되잖아요.”

그렇게 말한 그녀 앞에 그가 우뚝 멈춰 섰다. 이게 그녀의 결정이었다.

그의 감정을 이용해 이 난국에서 벗어나는 것. 타인의 감정을 이용한다는 것이 내키는 일은 아니었으나, 그를 버리면 그녀에게 남는 선택지는 백작 하나였다.

게다가 비비안느는 그녀가 속한 세계가 꼭 애정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 둘 사이 또한 마찬가지여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뤼드빅을 사랑하지 않았다. 앞으로 평생 그럴지도 몰랐다. 이는 그녀가 뤼드빅의 옆에서만큼은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을 거라는 판단의 근거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그 근거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가 자신에게 친절한 약혼자가 되어 주고 자신은 그의 옆에서 책임을 다한다면.

어쩌면 상황은 더 나아질지도 몰랐다.

그러니 그녀가 견뎌 내야 할 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도 뤼드빅을 택했다는 죄책과 그녀의 약혼을 위협하는 백작의 저급한 수일 터였다.

‘백작의 방해 같은 건 어떻게든 쳐 낼 방법이 있을 거야.’

에드문드가 다른 여자와 동맹을 맺든 어떤 저급한 수를 쓰든 그녀는 이겨 낼 것이고, 제 도움으로 뤼드빅은 결국 진실을 밝혀낼 테니까.

‘그런데 일이 풀리는 게 너무 쉬워서, 무서울 정도야. 그때 미라볼타 거리에서 만난 프레디만 해도 외부 세력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이던데, 어떻게 뤼드빅이 매번 그들 보스에 대한 정보를 아무런 문제 없이 얻어 낼 수 있는 거지? 꼭 에드문드가 제 사람들을 써서 뤼드빅에게 부러 정보를 넘기기라도 한 것처럼….’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비비안느는 그걸 최대한 외면하려 했다.

아무튼 지금 당장 자신의 계획은 하나였다.

암흑가의 영향권 밖, 즉 황실이 직접 주최한 ‘로열 더비’에서 우승하고 가문 간 약혼을 지켜 낼 것.

마침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뤼드빅이 말했다.

“내가 우습지, 메르고빌.”

어딘가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비비안느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때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널 좋아한다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비비안느는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대단해요?”

“아니. 나 같은 게, 널 좋아한다니까.”

뤼드빅이 비비안느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여태껏 그 허세를 부린 거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누군가가 멀리서 그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인브릿지 여사님.”

비비안느가 그녀의 이름을 말하자 뤼드빅도 자세를 바로 하고는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어느 노부인이 데이 드레스에 카디건 차림으로, 핸드백을 팔에 건 채 다가와 말했다.

“비비안느 영애. 여기서 다 만나다니 이것도 인연이네요. 작년 영애 저택에서 열린 신년제 연회에서 만났죠?”

“네. 그때 경마에 대한 제 식견을 넓혀 주시기로 했었는데, 미처 듣지 못해서 아쉬웠어요.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마침 제가 곧 열릴 올해의 로열 더비에 참가하고 싶어서요. 우승을 노리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을 들었으면….”

비비안느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라인브릿지 여사가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말했다.

“미안해요. 이렇게도 어린 귀족 영애가 열정으로 가득 찬 모습이 풋풋하고 보기 좋아서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로열 더비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답니다.”

“왜인가요?”

비비안느는 재빨리 물었다. 그러자 라인브릿지 여사가 인자한 목소리로 답했다.

“로열 더비의 역대 우승자를 아나요, 영애?”

“…아니요.”

“그러면 언제 한번 확인해 보도록 해요. 대부분이 황실의 말인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거기다 2황녀 전하께서 워낙 경마광이라 그분의 명마 ‘네메시스’를 이길 수 있는 말을 단기간에 구하긴 쉽지 않을 거예요.”

그 말에 비비안느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나뿐인 희망이 방금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때 라인브릿지 여사가 덧붙였다.

“물론 한 번 ‘네메시스’가 진 적이 있었죠.”

“정말요?”

“그럼요. 마침 작년이었답니다.”

“다행이네요. 상대는 어떤 말이었나요?”

“마침 저기 있군요.”

비비안느는 시선을 옮겨 라인브릿지 여사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오늘 경마의 우승을 차지한 흑마가 경주로의 끝에서 늠름히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헤게모니.”

그 말의 이름인 듯했다.

“…정말 아름답네요.”

홀린 듯한 목소리가 비비안느의 입술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럼요. 정말 걸작이지요.”

라인브릿지 여사도 동의했다. 비비안느는 눈을 반짝 빛내며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저 말은 누구 소유인가요? 누구한테 가면 살 수 있죠?”

“아, 모르나요? 영애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에드문드 콜트 백작이지요, 당연히도.”

“…….”

“아무리 암흑가가 경마장을 손에 넣고 흔든다는 말이 있어도, 저 말을 상대로는 무력하더군요. 헤게모니, ‘패권’이라는 뜻이 가장 잘 어울리는 짐승이지 않나요?”

“그러네요.”

비비안느는 떫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난 이만 가 봐야겠어요. 황후 폐하께서 기다리셔서.”

그 말을 마친 라인브릿지 여사는 자리를 떠났다.

다시 뤼드빅과 남겨진 비비안느는 라인브릿지 여사의 뒷모습을 보며 설명했다.

“아시겠지만, 황후 폐하께서 총애하는 시녀 중 한 분이세요. 그래서 대부분 백작 부인 대신 존경을 담아 여사님이라 부르고요.”

“그래, 그렇군.”

“저분께서 저렇게 말씀하셨으면 정보는 정확할 거예요.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 어떻게 하죠?”

“우리?”

뤼드빅이 기어코 그 단어를 걸고넘어졌다. 비비안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요. 당신이 약혼을 유지하는 데 동의한다면 말이에요. 방금 이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는 하나뿐인 방법이 날아갔잖아요. 어떻게 할 거냐고요.”

“기다려야지.”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네 백작을 무너트릴 증거가 다 모일 때까지는.”

“그러다 너무 늦으면요? 저는 당신이 지금이라도 그 엘레노어라는 샹프니야 여자를 당신 양어머니 곁에서 치워 내 줬으면 좋겠어요.”

그 말에 뤼드빅의 미간이 파였다. 아마도 양어머니라는 단어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제가 사생아이자, 렉스가 안주인의 양자라는 사실을 누군가 상기해 주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비비안느는 심기가 불편한 그를 애써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저 말을 내어 달라고 백작과 담판을 지어야죠.”

“지금 당장, 이 상황에서 백작저로 걸어 들어가겠다는 게 자살 행위가 아니면 뭔데.”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날이 서 있었다. 뤼드빅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살렌너 호텔의 무도회장에서처럼 아직도 백작을 보호하려 하려는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저는 저희 둘 다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방법을….”

“내가 이기면 네가 내 손에 떨어지는 건 자명한 일일 텐데, 굳이 그런 수고를 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으르렁거리는 듯한 위압적인 목소리에 비비안느는 얼어붙었다.

맞아. 이런 남자였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에서 시선을 천천히 옮겨 바닥을 바라보았다.

“금방이야. 아주 금방.”

그때 조금 가라앉은 뤼드빅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본인도 분위기가 과열되었다는 걸 어느 정도 눈치채고는 자제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녀를 설득하려는 건지 그가 훨씬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정말 머지않았다고. 오늘 내가 만난 코르테가 패밀리. 암흑가 수장에게 숙청당한 넬비노스 패밀리와 관련이 있는 자들이라더군.”

비비안느가 계속해서 시선을 피하자 그가 비비안느의 팔을 잡아끌고는 그녀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서 그들이 내게 오늘 장부를 넘긴 거고. 이제는 백작이 암흑가 쓰레기들한테 총 팔아서 얻은 돈으로 어떻게 사업을 꽃피웠나만 알면 돼. 그것만 알면, 이제 정말 끝이라고.”

“…….”

“그러니까 그때까지 가만히 좀 있어. 네가 주겠다는 그 도움이라는 게 정말 쓸모나 있었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을 거 아냐. 고급 미끼면 고급 미끼처럼 굴어, 나서지 말고.”

그 말에 뤼드빅을 바라보는 비비안느의 눈빛이 바뀌었다.

비비안느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나자 뤼드빅이 눈을 질끈 감더니 다시 그녀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네가 그렇게 움직이다 다치면. 안 그래도 성한 데 없는 네가 더 다치면….”

비비안느는 그 순간 시야가 흐려지는 게 느껴졌다. 그의 말은 정말 아프지 않았다. 진심으로.

다만 잠시 살렌너 호텔 무도회에서의 기억이 나서였다. 그녀는 그날 에드문드의 친절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동정이었다.

그녀는 뤼드빅에게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말했다.

“그게 그렇게 태가 나던가요? 내 몸 상태가.”

“메르고빌.”

그가 계속해서 그녀 쪽으로 걸어왔지만 그녀는 뒤로 물러나기만 했다.

그들의 관계는 이제는 평행선에서 일직선이 되었으나, 그럼에도 거리는 좁혀질 줄 몰랐다.

“이만 실례할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비비안느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경마장의 출구 쪽으로 향했다.

뤼드빅은 비비안느가 사람 속에 파묻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걸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녀를 잡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가만히 서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가 방금 말한 대로, 아주 금방일 테니까. 정말 금방.

‘우리.’

그는 잠시 동안 비비안느가 제 입으로 내뱉었던 말을 곱씹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 경주로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데도 마음속에 어딘가 불안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마침 그녀가 살렌너 호텔의 테라스 난간 앞에서 저를 잡았던 순간이 떠올랐고, 그녀가 무엇을 안다는 듯 제 저택으로 가자고 했던 말도 떠올랐다. 그러다 그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이 판에서 그녀의 위치는 고급 미끼였다.

게다가 비비안느는 백작을 사랑한다. 그녀가 자신과의 약혼 관계를 유지하겠다 말은 했지만, 그녀의 진짜 의도도 모르는 채 그저 감정에 치우쳐 제 일을 방해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래. 이러한 판단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비비안느의 약혼자가 제 이복형에서 저로 바뀌고 난 뒤의 11년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노라고 말하려면, 제때를 기다리고 순간을 참아 내는 것도 중요했으니까.

이기는 사람이 가진다.

결국 그녀의 끝에 제가 있기만 하면 될 문제였다.

경마가 열린 일요일로부터 3일 후, 수요일. 콜트 백작저 응접실.

테이블에는 체스판이 펼쳐져 있었다. 판 위의 하얀 폰이 쓰러져 무참히 바닥을 굴렀다.

거의 체스판의 끝에 도달하려던 기물이었다. 엘레노어는 제 폰이 쓰러진 것이 안타까운지 앓는 소리를 하며 말했다.

[…아! 이렇게 그 폰을 빼앗길 줄은 몰랐는데.]

그렇게 말한 그녀는 렉스 부인의 응접실에서와는 달리 화려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곱게 땋았던 머리카락은 풀어 두었고, 단정한 데이 드레스 대신 그녀를 상류층처럼 보이게 해 줄 값비싼 옷들로 몸을 휘감았다.

샹프니야어로 그녀의 짧은 탄식이 이어졌다.

[백작님, 정말 너무하세요. 조금만 더 버텼으면 저 폰을 비숍으로 바꿀 수 있었을 텐데.]

기물이 체스판의 끝에 도달하면 다른 기물로 교체할 수 있는 룰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게임은 계속되었고 머지않아 화이트 퀸마저 함락당했으며, 그 후 몇 수만에 엘레노어는 제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뤼드빅, 그 남자는 포커를 좋아한다던데. 당신은 체스를 즐기시나 보네요.]

이카로스가 다가와 테이블 위를 갈무리할 때 엘레노어가 턱을 괴고는 에드문드에게 말했다. 곧 정제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외숙부가 즐기는 몇 안 되는 게임이라서 맞춰 주다 보니, 룰 정도는 익히게 되었습니다.]

[…겸손하시기까지! 어머, 그거 치우지 말아 주세요. 아직 제가 이기지를 못했단 말이에요.]

엘레노어가 체스판을 치우려던 이카로스에게 말했다. 이카로스가 에드문드의 눈치를 살피자 그가 위스키 글라스를 내려놓으며 제국어로 말했다.

“더 놀아 드리기에는 이제 비즈니스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아쉽군요.”

엘레노어는 에드문드의 얼굴을 바라보며 저 완고하고도 철저히 선을 긋는 사람이 제 여자를 상대로는 다를까, 하고 생각했다. 물론 그를 탐내기에는 저 또한 이기는 걸 지독하게 즐기는 성미라 상성이 맞지 않을 걸 알아 더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저와 동류였다.

그가 제 먹잇감을 노리고 있을 때 그 덕을 봐 저도 제 것을 쟁취하는 게 포식자의 섭리였다.

비록 에드문드 콜트 백작이 저를 동등하게 대하고 있다지만 그건 오직 그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보이는 친절일 뿐.

엘레노어는 그의 참을성을 그만 시험하기로 결심하고는 제국어로 단정히 답했다.

“지시하신 대로 뤼드빅 렉스가 코르테가 패밀리에게서 정보를 받아 든 걸 확인했어요. 그날 뤼드빅과 다시 대화할 기회도 얻었고요. …당신 제안을 거절하던데요. 제 배후에 당신이 있다는 것도 바로 눈치채더라고요.”

“그게 아니라 유도 신문에 당하신 거 아닙니까?”

“다아트로 신사들은 소문만큼 별로 신사적이지 않네요. 숙녀의 흠쯤은 가려 줄 줄 알았는데.”

“짐작일 뿐이었는데 적중한 모양이로군요.”

에드문드가 말했다.

“이토록 정보를 알아서 술술 흘리는데 뤼드빅 렉스를 상대로는 얼마나 달랐나 싶긴 합니다.”

“조심하시죠, 백작님. 뼛속까지 오만하다더니 소문대로네요. 그래서는 여자에게 인기가 없답니다. 비비안느 영애에게도 마찬가지고요.”

저 남자의 사냥감 이야기를 하니 날이 서 있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소강 되었다.

엘레노어는 이런 분위기가 편했다. 그녀는 이어 말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특별히 무슨 조치를 취할까 염려스러웠어요. 하지만 뤼드빅 렉스는 제 일을 하느라 거의 반쯤 미쳐 있는 것 같았고, 비비안느 영애는 제 저택에서 나오지를 않더라고요. 여전히 렉스 부인께서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고요. 불가능한 조건을 걸고는 그걸 핑계로 차남과 메르고빌 영애의 약혼을 깰 생각인가 봐요.”

“조건은 계획대로였습니까.”

“맞아요. 경마에서 이기는 거였더랬죠?”

엘레노어가 그 말을 하며 까르륵 웃었다.

“역시 렉스 부인께서는 경마광이시더라고요. 귀부인 사이에서 렉스가의 저조한 경마 성적을 언급하면서 면 상하게 하니, 금방 그 일을 비비안느 영애에게 떠넘기더라고요.”

“…….”

“그러고 보니 백작님께는 다행 아닌가요. 비비안느 영애를 고급 미끼로 쓰고 있는 뤼드빅 렉스가 이대로 영애를 도울 일도 없을 거고, 그 여자는 속수무책이 될 테니까요. 꼭 무력한 먹잇감처럼.”

그 말에 에드문드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그의 목울대가 울렁이는 걸 엘레노어는 유심히 바라보았다. 탄탄한 가슴, 타이와 베스트가 만나는 곳이 그의 가빠진 숨으로 들썩였다. 비비안느 영애가 저에게 오는 걸 생각하는 것만으로 저렇게 되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엘레노어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체스를 하실 때부터 지금까지… 꼭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뭘까. 백작님은 판 위의 제 수를 읽으셨겠지만 전 백작님을 읽으려 해 보았거든요.”

그 순간 처음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만났다. 엘레노어는 에드문드의 푸른 눈을 보며 속삭이듯 읊조렸다.

“백작님께서는 지금 몸이 달아 계시군요.”

“…….”

“진작에 알았어야 했는데. 굶주려 계신 거였어요. 그러니 성미도 당연히 평소보다 곤두서 있었을 거고, 기분도 저조하셨을 거고.”

에드문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엘레노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게, 남자들은 보통 제가 맞은편에 앉으면 저를 쳐다보거든요. 그래서 알 수 있었지만. 그럼 이걸로 체크메이트, 이려나요?”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각각 그녀의 포셰트와 코트를 가져다주었다.

엘레노어는 코트를 입으며 테이블에 앉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 참, 비비안느 영애가 로열 더비에서 렉스 부인이 내어 준 숙제를 할 모양이더라고요. 황실이 주최하는 연례행사이니, 암흑가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거라고. …오늘 비비안느 영애가 라인브릿지 여사의 소개에 따라 황궁으로 갈 예정이라고 제 정보원이 전하기도 했고요. 그럼 저는 이만.”

그 말을 남기고 엘레노어가 문 뒤로 사라지자, 에드문드는 담배를 피웠다. 이카로스가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카스터 가문의 가주께서도 막내딸 엘레노어가 조금 자유분방하다며, 염려를 표하긴 했었습니다.”

“…….”

“처리할까요?”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에드문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분간 사람들이 피를 흘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어차피 렉스가와 메르고빌가 결혼식이 열리게 되면 그날 흘리게 될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예.”

이카로스는 고개를 꾸벅였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제 보스의 말을 기다렸다.

에드문드는 상념에 잠겨 담배를 피웠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읊조렸다.

“경주마라….”

아무래도 라인브릿지 여사를 따라 황궁으로 향했다는 비비안느 영애를 생각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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