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비비안느가 식사를 깨작거리는 동안 시선은 자주 허공에서 마주쳤다.
주로 에드문드가 바라보고 비비안느가 마주친 시선에 놀라 피하는 쪽이었다. 결국 이 암묵적인 긴장감을 깬 것은 그녀였다.
“해.”
테이블 하나를 두고 비비안느는 말했다.
그녀가 식사하는 모습을 흡족하게 감상하고 있던 에드문드는 무슨 말이냐는 듯 그녀의 눈을 지긋이 훑었다.
비비안느의 말이 이어졌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거야.”
비비안느는 가증스럽다는 듯 테이블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빈티지 와인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이곳에 올 거라고 생각하여 차려 둔 식사와 그녀가 먹기 편하게끔 잘게 잘라 놓은 음식 하나하나에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꽂혔다.
그 시선이 다시 에드문드에게로 향하고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넌 네가 원하는 걸 가지고, 난 새벽이 되기 전에 여길 걸어 나가는 거지.”
“가겠다고?”
에드문드가 마침내 입을 열자 비비안느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긴 칠흑빛 생머리가 잘게 흔들렸다.
드륵, 의자가 밀리는 소리에 비비안느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녀가 고개를 숙인 순간 그는 걸음을 옮겨 식탁 맞은편으로 향했다.
그리고 비비안느의 선홍색 눈이 그의 동선을 파악하기도 전에….
“……!”
비비안느가 제 머리를 억누르는 강한 악력에 몸서리쳤다. 하지만 의미 없는 반항에 지나지 않았다.
에드문드는 시선만 밑으로 향해 제 바지춤으로부터 한 뼘쯤 떨어진 곳에 고개를 박고 있는 비비안느를 내려다보았다.
손에 힘을 더 주면 금방에라도 버클에 그녀의 이마가 닿을 것 같았다. 그는 그대로 굳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손에 힘줄을 세우지 않으려 그는 부단히 노력하며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게 그거였으면 굳이 여길 고르지도 않았겠지.”
“…….”
“창녀처럼 굴지 마, 비비안느.”
분명 시작은 그였다.
그녀의 몸을 원한다고 했으니 그녀가 이런 말들을 하며 제게 반항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달라졌고, 그는 아까의 청혼과 함께 그 부분에 대해 명확히 해 두었다.
그러니 그녀가 제 몸을 가져가라는 둥 본론으로 돌아가자는 둥 재잘거리며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꼴을 그대로 봐 줄 생각이 없었다.
그가 다아트로의 암흑가를 키워 오는 동안에도 여자만큼은 거래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하물며 제 여자가 스스로를 창부로 격하시키는 일을 눈 뜨고 볼 수 있을 리가.
그는 그녀의 머리통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내려놓고는 그녀의 어깨를 바로 했다.
에드문드는 나직이 그녀의 생각을 정정해 주었다.
“난 네 시간을 탐낸 거야.”
“미친, 새끼.”
그의 행동에 얼이 나갔는지 비비안느는 완벽한 레이디라는 가면을 손에서 놓고는 제 생각을 거름망 없이 토해 냈다.
에드문드는 그걸 즐기며 말했다.
“네가 영리하다면 네 시간이 다른 것보다 값지다는 걸 증명해 내야지.”
“…….”
“스스로를 창부로 만드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나은 수인 것 같은데.”
그쯤 들은 비비안느는 아랫입술을 베어 물고 잔을 들어 올렸다. 능숙한 자세는 아니었다. 표정은 한 수를 내어 준 것만큼 분노하고 있었다.
“마셔.”
에드문드는 명령했다.
“네가 좋아하는 음악이 뭔지, 말할 기분이 들 때까지.”
그가 그렇게 말한 건 비비안느가 백작저를 떠난 날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백작님은 제 몸 말고 그냥 저에 대해서는 궁금하지 않으세요?”
기억 속 그때의 얼굴과 지금 자신을 훑고 있는 그녀의 낯이 새삼 비교되었다.
회상 속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이어졌다.
“전 백작님이 궁금해서요. 어떤 일을 하시는지… 어떤 음식을 선호하시는지, 음악을 좋아하시는지 같은 거요.”
회상이 끝나고도 비비안느가 끝내 입을 열지 않자 에드문드의 입가에 삐딱한 미소가 걸렸다. 자리에 앉으며 그는 우아하게 말했다.
“지금 고집을 부리기에는 네가 말한 그 잘난 보호막이라는 거, 이미 예전에 잃어버리지 않았나?”
나한테, 하고 그가 태연히 이었다.
비비안느가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귀족으로서의 체면을 위함인 걸 알았다. 그렇게 품위를 지켜 그녀 가문의 재정 상황을 논하는 자들을 상대로 한 보호막으로 쓰려는 거라면, 그녀와 그는 이미 관계를 가졌으니 더 거리낄 것도 없다는 말이었다.
제 짐작이 맞았는지 비비안느는 포크와 나이프를 쥔 채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일순 그는 그녀가 생일날 신년제 연회장에서 탈출한 날 밤 저런 얼굴을 했을지 궁금해졌다. 에드문드의 입 밖으로 신랄한 냉소가 흘렀다.
“이번엔 나한테서도 도망쳐야 할 테니까, 사람만 바꿔서 도와 달라고 다리라도 벌려 보게? 바라는 게 있으면 시키는 거라도 잘해야지, 비비안느.”
그 말에 비비안느는 포크로 음식을 집었으나, 몇 번 우물거리고 삼키지는 못했다.
…저 사이코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비비안느는 와인을 마셔 가며 겨우 음식을 삼키고는 맞은편에 앉은 에드문드를 바라보았다.
‘내 시간을 탐낸 거라고?’
아마도 그는 잠시 육욕과 사람들이 흔히 말한다는 사랑 같은 걸 아주 단단히도 착각해 버린 게 아닐까. 물론 그녀는 그의 관심과 애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애정은 주로 에로스적인 것에서 파생된 집착으로 보였다.
그 순간순간에마저 설레었으나 그랬기에 그 본질을 오인할 리 없었다.
아무튼 상대가 그새 마음을 고쳐먹었든 뭐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에게 이곳은 회담 자리였다. 그녀는 명백히 지킬 것이 있었고, 그랬기에 그와 대화 해 보는 쪽을 택했다.
“전 클래식을 좋아해요. 고리타분한 취미라 하는데, 어릴 적부터 좋아해 온 거라서 취향이 쉽게 바뀌지 않더라고요.”
비비안느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다만 이번엔 정중한 태도를 유지한 채로였다. 에드문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비안느는 용기를 얻어 말을 이었다.
“뮤지컬보다는 오페라를 더 좋아해요. 어렸을 적에 가족끼리 해외로 가서 오페라 박스석에서 관람했던 추억이 있어서요. 공연 얘기를 하니까 말인데요, 요즘엔 수입 영화가 유행이라죠? 영화는 말로만 들어서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작년에 봤던 발성 영화 하나가 꽤 재미있어서 기억하고 있었어요.”
백작과 본 발성 영화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는 걸 확인한 비비안느가 침착하게 이어 말했다.
“그리고 제 귀족으로서의 품위가 제 잘난 보호막이라면, 네. 이미 망가졌죠. 그런데 추문이야 따라붙는다 해도 렉스 가문만큼은 저를 버리지 않는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그 사람들 참을성이 바닥나지 않는 한 제가 어디로 도망갈 생각은 없어요.”
“…….”
“그러니 청혼에 대한 답은 거절이에요, 백작님. 이제는 제가 질문하고 싶은데요.”
“해.”
“언젠가 제가 질리면, 제 약혼자와 같이 저도 처분하실 생각인지 궁금해서요.”
그쯤 말한 비비안느는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그러니까 제가 덜… 불쌍해지면요.”
“언제부터 이 문제가 절차 때문이 아니게 되었어, 비비안느?”
대답 대신 질문이 돌아왔다. 비비안느는 대답할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에드문드가 이어서 말했다.
“판단을 굳히기 전에 내가 크루즈에서 했던 말을 곱씹어 볼 생각은 안 했나?”
그렇다고 함은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할 거라는 말과.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 겁니다.”
그가 저를 진짜 귀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던 말이었다.
“내가 널, 진짜 귀족으로 만들어 줄게.”
물론 그녀는 그 말들을 기억했다.
그 말에 내심 설레었었고, 그건 자신의 저택에 찾아온 에드문드를 내치지 못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다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들을 모두 감언이라고 치부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의 정체에 관련된 단서 하나하나를 모두 조각조각 맞추어 총체를 본 뒤, 그게 그가 그녀를 죽일 근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말들은 언제나 변할 수 있었지만 그가 그녀를 죽이려 한 건 명백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랬기에 자신의 판단을 변호했다.
“콜먼 거리에서 제가 타고 있던 차가 터진 다음 날, 싸늘한 경시청에서 홀로 백작님을 그리던 날을 전 아직도 기억해요.”
그때 그녀의 손에는 죽은 요원의 사진이 한 장 들려 있었다.
신뢰도 그와 함께 죽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절 생각해 주신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더는 백작님을 믿을 수 없는 제 입장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 그러면 그렇게 믿어.”
“…….”
“내가 네게 질려 버리면 죽여 버릴 거라고. 말이 나온 김에 살아 있고 싶으면 나를 즐겁게 해 줘야지.”
비비안느는 이 말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백작저를 떠날 때 그가 했던 말이었다. 그러니 이 말이 어떤 행위를 뜻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봐라. 결국엔 몸이라는 생각에 비비안느는 허탈해졌다. 그래도 잠시나마 그라는 인간에게 제가 기대를 품고 있기는 했었는지 눈물까지 났다. 그는 정말로 자신에게 잔인한 사람이었다.
“…불은 꺼 주세요.”
비비안느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녀는 이 순간까지도 최대한 완벽하게 걸으려 애썼다.
“앞도 안 보고 왈츠 추러 가게?”
그 목소리에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비비안느가 의아하다는 듯 에드문드를 바라보았다.
“요즘에 누가 왈츠를 춰요.”
비비안느는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그건 그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에나 췄던 고리타분한….
“그러게. 내가 반만 귀족이라서 진짜 귀족들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 잘 모르겠군.”
그렇게 말한 에드문드가 걸어와 그녀에게 정중히 팔을 내밀었다. 비비안느는 설마,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는 그에게 물었다.
“크루즈에서 한 약속 지키려는 건 아니시죠? 저를 진짜 귀족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맞아.”
한참 이상한 눈으로 그와 그의 팔을 번갈아 살피던 그녀는 단단한 팔 위에 제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니까 그가 하려는 일이 그녀를 배불리 먹이고는 다시 연회장으로 데려가는 거라고 생각하니 괜히 어처구니가 없어서였다.
“이런다고 제가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겠고요.”
“그동안 보고 싶었다고 말하려 했는데도, 여전히 그 생각 고수하시겠다면 어쩔 수 없고.”
“저 안 보고 싶었잖아요.”
그가 자신을 보고 싶어 했을 리가 없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믿어야 했다. 하지만 머릿속의 생각이 저절로 반론을 했다.
그가 이러는 이유가 뤼드빅을 확실히 없앨 물증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와의 시간이 필요해서였다면.
‘아냐. 애초에 그건 백작의 방어였어. 뤼드빅이 에드문드의 진짜 정체에 대해 의심을 하기 시작했었으니까.’
때마침 에드문드가 더없이도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건 네가 편한 대로 생각해. 내가 너를 정말 보고 싶어 했는지 아닌지는.”
비비안느가 혼란스럽게 에드문드의 옆얼굴을 보고 있을 때, 그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가 춤추는 모습은 보고 싶더군.”
비비안느는 솔직히 그 목소리에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러다 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의식했다.
이러다가 에드문드는 틀림없이 자신의 걸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고, 부르튼 종아리마저 확인하려 할 수 있었다.
그가 저를 불쌍하게 여기면 저를 더 도와주려 할 거고, 그녀는 이성적인 판단에 실패하고 뤼드빅이라는 패를 놓아 버릴 확률이 높아진다.
게다가 사람들의 시선….
귀부인들은 안 그래도 자리를 비우는 자신을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에드문드와 춤을 추는 건 그 의심에 확신만 심어 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뤼드빅을 선택했다면 그와 함께 춤을 추러 가는 것만큼은 거절해야 했다.
그때 에드문드가 말했다.
“네 약혼자가 내 사람들을 포섭할 동안, 네 역할은 시간을 벌어다 주는 것 아니었나?”
그 말에 비비안느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에드문드가 거기까지 알고 있었나? 비비안느의 떨리는 시선이 그에게로 움직였다.
에드문드는 꼭 자신과 춤을 추는 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처럼 이어서 말했다.
“그러니 네 일을 해야지, 비비안느. 비단 나랑 놀아 달라는 게 아니라 네 약혼자를 도우라 하는 거잖아.”
“…침대에서가 아니라요.”
비비안느는 본인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도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좋아하는 그 행위가 아니라 춤을 추기 위해 제 패를 보였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그녀 마음속에 작은 틈이 난 걸 포착하기라도 한 듯 에드문드가 말했다.
“침대에서 노는 쪽이 더 취향이라면 얼마든지.”
“가요.”
그러자 그녀의 말에 화답하듯 에드문드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문 쪽으로 나아가던 비비안느는 괜히 등 뒤에 남긴 음식들이 신경 쓰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에드문드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다시 그가 자리에 앉게 할까 봐 더욱 빨리 걸음을 옮겼다.
이건 그의 말대로 제 일을 하는 것뿐이니까.
그러다 비비안느는 에드문드의 발걸음이 뤼드빅보다 훨씬 느리다는 걸 실감했다. 따지자면 보폭은 이쪽이 더 클 텐데도 말이었다.
그 섬세한 배려에 그녀는 걸음에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귀족답게 무도회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텔 직원들이 문을 열어 주자, 열기가 한풀 꺾인 댄스 플로어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하나둘 그들을 발견하고는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래서 비비안느는 처음으로 무도회장 중심에 서서 그와 마주 볼 수 있었다.
뤼드빅과 군중 속에서 서로를 훑었을 때는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던 것 같은데.
비비안느는 그가 내민 손 위에 제 손을 올려놓는 순간 남모를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요원 행세를 했던 그의 손을 빌라에서 처음 잡아 봤을 때와 같은 감촉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때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게, 일에 감정 섞는 거 불필요하지 않느냐고.
정말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왜 그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그의 손이 제 허리를 감쌀 때 가슴이 뛰어 오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곧 그가 말한 대로 왈츠가 흘러나와 비비안느는 연습하지도 않은 스텝을 기억하려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작은 소녀였을 적 머리에 책들을 올려놓고 춤 연습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그녀를 ‘내 작은 공주님’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스텝을 기억해내려 애쓸수록 그때의 향수가 자꾸만 가슴을 흔들었다.
이 춤이 끝난 뒤에도 그녀는 ‘진짜 귀족’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는, 그것도 그녀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할아버지에게는 그렇게 기억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다리가 아팠지만, 그의 리드가 워낙 완벽해서 비비안느는 그녀의 부르튼 다리를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아도 되었다. 비비안느는 뒤로 물러선 사람들이 원을 만들고 그녀를 지켜보는 것만 만끽하면 될 뿐이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것뿐일 텐데. 제 살길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인데.
그의 곁에서 그녀는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명성이 예와 같지 않은 후작가의 레이디인 것 같지도, 조롱받아 마땅한 과거의 유적 같지도, 렉스가의 며느리도 아닌 그저 그녀 자신 같았다. 그러니 그녀는 그를 정말 선택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 남자는 항상 그녀에게 그를 사랑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 주는 사람일 뿐이니까.
그래서 언젠가 정말 끝이 온다면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 가 버리고야 말 남자였으니까.
에드문드와 함께 새벽이 올 때까지 춤을 추고 나니, 뤼드빅은 먼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그래서 비비안느는 에드문드의 에스코트를 받아 호텔 밖으로 나와야 했다. 작별의 인사를 건네려 했을 때 비비안느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표정을 눈치챘는지 에드문드가 나직이 말했다.
“눈 오네.”
그러고 보니 요즈음 날씨가 급격히 추워졌었다.
‘다아트로의 3월 초쯤에 눈이 오는 일이 몇 번 있었다고 들어 보기는 했어.’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었다. 비비안느는 새까만 하늘에서 쏟아지는 하얀 눈송이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아마도 이게 올해의 마지막 눈일 수도 있겠지.
마침 작년의 첫눈도 이 사람과 맞았다는 사실을 상기했을 때쯤 비비안느는 에드문드와 눈이 마주쳤다.
“…네. 그렇네요.”
비비안느는 답하고는 빠르게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이만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화두를 가로챘다.
“저는 저택으로 가 볼게요, 백작님. 시간이 늦어서요.”
“…….”
“오늘 제가 렉스가 약혼녀로서 도리를 다한 걸 다른 의도로 해석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와 함께 춤을 추었던 걸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 비비안느의 결연한 시선이 에드문드에게로 향하자 그가 낮게 웃고는 말했다.
“무도회장에 있는 사람들은 오늘 있었던 일, 네가 말하는 그 다른 의도로 잘만 해석하던데.”
“그건 제가 렉스가와 약혼자에게 해명해야 할 몫이에요. 백작님께서 걱정해 주시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고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저희 사적으로 만나지 말아요, 백작님.”
비비안느는 그렇게 말하며 에드문드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쓸데없는 구설수가 따라붙는 건 사양이니까요.”
“레이디께서 그러시겠다면.”
흔쾌한 승낙에 비비안느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왠지 여기에도 이상한 꿍꿍이가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았다. 아무튼 그가 그렇게 약속을 했으니 그의 말을 믿어도 되는 거겠지.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도어맨을 찾았다. 도어맨이 그녀의 차가 준비되었다고 일러 줄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도어맨의 흔적조차 이곳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순간 비비안느는 등골이 서늘해져 에드문드를 올려다보았다.
“절 어디로 데려가시려는 거죠?”
비비안느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경계가 서려 있었다. 그에 비해 돌아오는 대답은 가벼웠다.
“네 저택.”
“그러면 제 차와 경호원은 어디에 있는데요. 절 백작님의 차로 백작저에 데려가시려는 거라면….”
“틀렸어, 비비안느.”
그녀의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말을 가로챘다. 때마침 백작의 리무진이 오고 있어야 할 곳에서 ‘무언가’가 오고 있었다. 비비안느는 어둠 속에서 빛을 흩뿌리는 무언가의 정체를 알기 위해 열심히 그곳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건 헤드라이트가 아니라 마차에 달려 있는 크리스털 등이었다.
비비안느는 멍하게 준마 네 마리가 끄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가끔 황실 사람들이 예식용 마차를 타고 제도를 순회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런 특별한 날 외에, 일상에서 마차를 발견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비비안느는 멍하니 그와 마차를 번갈아 보았다.
대륙 전쟁 이전에 그녀는 이런 마차를 타 본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어릴 적의 일이었다.
“내 차를 타고 가는 것도 아니고, 내 저택으로 가는 것도 아니야, 비비안느.”
에드문드의 말에 비비안느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망설였다. 하지만 에드문드가 퇴로를 만들어 두지 않았다는 걸, 비비안느는 곧 이어진 그의 말로 알 수 있었다.
“이제 해명도 마쳤으니, 네 차와 경호원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하나?”
“…제 저택이겠죠.”
“영리해서 좋네. 그새 마차 타는 방법을 잊어버린 건 아니겠고.”
“그럴 리가요.”
비비안느는 전화를 쓸까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애초에 저 호텔 전체가 그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빠르게 체념했다.
어디에 갔나 싶었던 도어맨이 다가와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결국 비비안느는 에드문드의 손을 어쩔 수 없이 잡고는 그 악력에 기대어 마차 위에 올랐다. 다른 손은 그녀의 긴 이브닝 가운 자락을 쥔 채였다. 그녀가 안전하게 마차에 탔다는 걸 확인하자, 에드문드가 맞은편에 앉았다.
비비안느는 이 공기가 어색해 말을 꺼냈다.
“이렇게까지 해서 저를 진짜 귀족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실 필요는 없어요.”
“아니. 내가 보기 좋아서 그런 건데.”
에드문드의 대답에 비비안느의 신경질적인 시선이 창가에서 그에게로 옮겨 갔다.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차를 타면 네 저택까지는 더 오래 걸릴 테니까.”
“…….”
“내가 널 더 오래 보고 싶어서.”
“제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백작님.”
비비안느는 어둠 속의 암녹색 눈을 찾아내어 올곧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계산된 거짓말 같은걸요.”
언젠가 그녀가 광장에서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더 차갑고 더 냉랭했다.
그 뒤로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비비안느는 에드문드의 시선이 집요하고도 찬란하게 자신을 뒤덮고 있는 걸 알았다.
꼭 마차의 창문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