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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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열 스위트에 먼저 도착해 있었던 에드문드는 출입구 쪽에서 다섯 걸음쯤 떨어진 곳에 서서 비비안느를 기다렸다. 그의 참을성이 동나려 했을 즈음, 문이 열리고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비비안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태껏 그의 시간은 비 오던 날 그녀의 저택에서 그녀를 가졌을 때에 멈추어 있었다.

    그날, 모든 게 끝나고 두 사람이 엉켜 침대에서 숨을 고를 때 비비안느는 겨우 상체를 일으켜 저가 누워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긴 뒤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한 번뿐인 일이에요. 더 얽힐 일도 없다는 말이고, 이걸 빌미로 연락해 오는 것도 일도 없길 바라요. 생각만 해도 싫으니까.”

    상념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방금까지 어울려 준 건 당신한테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궁금해서였어요. 제가 많이 좋아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안겨도 더 이상 설레지 않는 걸 보니까, 너무 다행이에요.”

    그리고 그녀가 무어라 말했었더라.

    “우리 더는 만나지 말아요, 백작님.”

    그녀가 결별하자고 말했다.

    그는 그 모든 게 빌어먹을 절차와 체면치레 때문일 거라고, 그러니 그의 참을성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생각하고는 자리를 비웠다.

    물론 그녀가 제 정체를 알고 화를 내긴 했으나, 정말 그가 싫었다면 애초에 몸을 섞는 데 그렇게 적극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날 옷을 대충 차려입고 비비안느의 방문을 닫고 나왔을 때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 뒤돌아 그녀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계획의 완성까지 시간만 죽이고 있던 차에 비비안느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았다.

    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낯은, 주변 사람들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곳 호텔에서 가장무도회를 기획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그녀 또한 사람들과 같이 가면을 쓰고 있을 테니 군중의 눈을 피해 저를 찾아오기도 쉬울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그녀를 만나면 그리움을 채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비비안느는 사진상으로 봤을 때보다 더 진한 화장을 한 채 도착해, 불편한 걸음으로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 몸으로도 그녀는 제게 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약혼자라는 새끼가 그 가냘픈 손목을 쥐고 당기는 대로 무도회장 중심으로 끌려갈 뿐이었다. 만찬장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비비안느는 뒤로 밀려나야 했고, 양보해야 했으며 테라스에서도 약혼자를 상대로 그녀의 의견은 가혹하게 묵살당했다.

    그는 매 순간 왜 그녀가 자신의 도움을 받지 않는지를 생각했다.

    정말로 그깟 빌어먹을 절차 때문에?

    에드문드는 비비안느가 자신의 저택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는 귀족이에요. 사람들의 평판이라는 게 꽤 중요하다는 뜻이에요.”

    애초에 그녀가 그를 떠난 이유도 그거였다.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저 낯을 보니 이제 그의 멈춰 있던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는 게 실감되었다.

    “…안녕하세요, 백작님.”

    비비안느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에드문드는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답했다.

    “안녕, 비비안느.”

    “…….”

    “잘 지냈어?”

    말해 놓고서 그 자신도 제 목소리에 놀랐다. 이러니 꼭 제가 제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릴 때의 위압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사소한 인사말만 오갔을 뿐인데도 공기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잘 지내지 못했을 것 같은 그녀는 고개를 조심스레 끄덕였다. 그러고는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입에 올렸다.

    “백작님이 없어서 아주 좋은 때를 보냈어요. 결혼 준비도 잘되어 가고 있고요.”

    “…….”

    “돌려 드릴 건 더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경계하면서도 제 할 말은 다 했다. 에드문드는 그런 비비안느가 귀여워서 픽 웃음을 흘렸다.

    약혼자 앞에서는 온갖 고상을 다 떨더니.

    절차가 그렇게 중요하고 귀족답게 구는 걸 목숨처럼 여기면서도 늘 제 앞에서는 저렇게 되바라지게 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가 저를 무어라 불렀는지 떠올렸다.

    “야.”

    제 약혼자 새끼를 상대로는 당해 줄 건 다 당해 주면서, 온갖 멸시에는 잠자코 ‘네.’ 하며 일관하고서는 제게는 저렇게 날을 세우는 게 신경 쓰였다.

    그가 그녀의 손을 놓는다면 그녀는 그 삶과 그 공기를 당연시 여기며 저렇게 살아가겠지.

    명백한 경계가 서린 비비안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까지 아세요.”

    “뭘.”

    “모른 척하지 마세요, 테라스에서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자신이 만들어 놓은 판에 뛰어든 그녀 약혼자의 계획을 알고 있고, 약혼자 새끼 도우려면 이곳으로 오는 게 빠르다는 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 말을 했을 때는 그냥 그녀를 이곳에 데려다 놓고 식사를 따로 챙겨 줄 생각이었다.

    이카로스가 가져온 사진 속의 그녀는 그새 챙겨 먹지 못했는지 안 그래도 작은 체구가 더 작아 보였으니까.

    그런데 비비안느의 표정을 보니 다시 한번 심사가 미세하게 뒤틀렸다. 저 얼굴. 정말 자신의 약혼자가 이기기를 바라기라도 한 얼굴이었다.

    그런 경계심이었다.

    제 짐작이 맞았는지 비비안느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 제 몸을 원하셔서 이러는 거예요?”

    뭐가 그리 속상한지 눈에는 눈물까지 방울방울 매달고 있었다. 에드문드가 비비안느의 눈을 가만히 훑자 그녀는 휙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했다.

    비가 오던 날 그랬듯이 그에게 말을 낮추고는 말했다.

    “이제는 끝이라고 했었잖아. 당신이 무섭다고.”

    “…….”

    “엮일 일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 말은 기억 안 나요?”

    기억이 나지 않을 리가. 그 말만이 여태껏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그렇게도 중시하는 그깟 절차 지켜 주겠다고 움직이고 있건만, 이대로 비비안느는 그 약혼자에게 돌아가 더 다쳐 올 생각인 듯했다.

    그가 계획한 일들을 모두 끝낼 때까지.

    비비안느의 힘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할 말 더 없으신 것 같으니 이만 가 볼게요.”

    그리고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정신을 차려 보니 제 손이 비비안느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가 하릴없이 떨리고 있었고, 그 순간 그의 입 새로 마음속에 있었던 말이 충동적으로 튀어 나갔다.

    “…네가 네 약혼자한테 하는 그 고고한 척, 나한테도 해 봐.”

    목소리는 차가웠다. 저의 비비안느가 듣기에는 무서웠을 음성이었으며, 그의 이면이 바깥으로 드러난 순간이기도 했다.

    “…….”

    비비안느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그는 오기가 생겨서 오만하게 뇌까렸다.

    “해 보라고.”

    방울진 그녀의 눈물이 볼을 가르며 흘러내렸다. 에드문드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한때 저를 올려다보는 저 눈이 눈부시게 반짝였던 적이 있었다고.

    그건 그녀의 약혼 발표 연회에서 그가 그녀를 구했을 때나, 또는 세노윅 공작저에서 그녀와 처음 키스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눈에 미쳤었다. 아주 정신을 놓아 그의 신념이고 체계고 내던지고 다시 함께할 순간만을 그리며 움직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 앞에서 뻔뻔하게 구원자 행세를 두 번이나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때 그녀를 구하면 언젠가 그 값을 치르리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그녀를 구하는 백작 나리에서 그녀의 삶을 망가트린 악당이 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저를 보는 그녀의 시선 하나로 많은 게 엇갈렸으며 돌이킬 방법은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정작 그는 그녀를 놓을 수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그녀의 삶을 망쳐 왔건 그는 그녀의 그 빌어먹을 삶 속에 있어야 했다. 잠긴 목소리가 그의 입술 새로 새어 나왔다.

    “비비안느.”

    그 목소리에 그녀는 저의 낯빛을 살피다 생각을 정리한 듯 차분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뤼드빅의 약혼녀로 남으면 내 아버지가 날 내버려 둘 거야.”

    고고한 척을 해 보라니까, 제 앞에서도 그깟 체면치레 좀 하고 얌전하게 굴어 보라 했는데 막상 시키니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는지 말은 높이지 않았다.

    비비안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폭력적인 남자니까 굳이 건드려 리스크를 지지 않을 거고, 난 그 새끼 후광 속에서 살아. 앞으로도 이렇게 안전히, 쭉.”

    비비안느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굳이 너랑 놀아나서 내 유일한 보호막을 버릴 리가.”

    “보호?”

    에드문드가 읊조리며 비비안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손이 비비안느의 턱을 쥐자 그녀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시가를 피우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억누르며 그는 비비안느의 눈매를 바라보았다. 진한 눈 화장 아래에 숨겨진 멍 자국이 보일 것만 같았다.

    “네가 내 앞에서 그 새끼를 보호막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지.”

    “…놔.”

    “화가, 나잖아.”

    “절대 네 정부로는 안 살아.”

    그녀의 목소리 끝에는 차마 숨기지 못한 두려움과 애정이 동시에 묻어나 있었다.

    그리고 촉촉해져 가는 그녀의 선홍색 눈에는, 과거에 대한 미약한 향수가 서렸다. 에드문드는 그 모습이 금방이라도 사라져 찾지 못할 것이라도 된 듯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비비안느의 모습을 시선 속에 담았다.

    정부라.

    아무래도 그녀와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있는 걸 참지 못하고 비 오던 날에도, 지금도 그녀를 찾은 걸 두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러한 행위가 그녀의 몸을 노린 거라고 그녀가 받아들인 데에는 그럴듯한 근거가 있었다.

    그가 제 감정을 알지 못했을 때, 그래서 이 여자가 고작 제 약점이고 미약한 자극 따위라 생각했을 때 그는 그녀에게 모질게 굴었으니까.

    생각을 거치지 않고 했던 말들이 뇌리에 울려 퍼졌다.

    “그래요. 내가 그쪽 몸을 원해.”

    그때는 하기 참 쉬웠던 말들.

    그러니 이번 일도 그의 호의라기는커녕 그녀의 몸을 원해 하는 희롱쯤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녀는 믿지 않을 것이다. 저 조그마한 얼굴에 서린 뿌리 깊은 불신은 고작 몇 마디 말로 스러질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말한 그녀는 저와의 스캔들이 제 약혼에 끼칠 영향을 의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자명했으므로, 에드문드는 너무나도 쉽게 이 말을 또다시 할 수 있었다.

    “결혼해 줄게.”

    그 순간 비비안느의 눈빛이 더 매서워졌다. 에드문드는 개의치 않고 이어 말했다.

    “원하면 세노윅 공작 부인으로, 아니면 콜트 부인으로 살게 해 주지.”

    눈빛을 보아하니 지금 비비안느는 자신이 그녀를 동정한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마음이 약해져 그녀의 턱을 구속하는 힘이 스르르 빠졌을 순간, 비비안느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네 아버지한테 가서 그깟 작전 먹히지 않았다고 전해.”

    비비안느의 옅은 선홍빛 눈이 그의 청안을 똑바로 바라본다.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언젠가 그녀를 데리고 제 아버지의 관저로 향했을 때 들은 말을 두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대충 이러한 제안이었다.

    “나중에라도 그 책사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말해 주지 않겠나? 원하는 건 모두 들어주겠네. 보니까 내 아들이 나쁘지 않은 첫인상을 남긴 것 같은데, 내게 도움을 주겠다면 두 사람이 깊은 관계로 발전하는 걸 막을 이유가 없겠지.”

    진짜 암흑가의 책사가 누구인지를 밀고하면 아들인 저의 옆자리를 주겠다는 말이었다.

    비비안느 메르고빌은 그걸 빌미로 자신이 그녀를 시험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짐작이 옳았다는 걸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는 듯 비비안느의 말이 이어졌다.

    “너한테는 좋은 일이겠지.”

    방금의 거절은 제국 수상의 아들인 자신에게 한 말이었고, 동시에 제 암흑가의 수장 신분을 의식한 말이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비비안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보면 알겠지만 내 주제 정도는 잘 알고 있어. 똑똑하게 판단할 머리도 있으니까 죽이지는 마.”

    “…….”

    “안 그러는 게 더 싸게 먹힌다는 거 알았잖아.”

    비비안느는 고개를 숙이며 읊조렸다.

    “나를 제거하고 우리 가문을 쓸어 버리는 수고를 하는 것보다 내 침묵을 믿는 편이 당신에게 이득이라는 뜻이야.”

    “…….”

    “난 누구의 것이 되지도, 누구의 입이 되지도 않을 거라는 말이기도 하고.”

    이렇게 당돌해야 생일날에 주어진 운명을 거역하겠답시고 후작저를 뛰쳐나간 아가씨답다고 할 수 있겠지.

    그는 완벽한 귀족가 영애인 그녀의 진짜 면면을 보았고.

    그녀는 저의 정체를 읽었다.

    고로 두 사람은 서로의 위장을 완벽하게 꿰뚫는다. 에드문드의 시선이 떨리고 있는 비비안느의 어깨를 훑었다.

    메르고빌의 아가씨답게 당돌하지만 가문의 몰살 같은 말을 맨정신으로 하는 건 역시 힘들 법도 했을 것이다.

    어쩌지. 그쯤 생각한 에드문드는 정신이 아찔했다.

    자극적이었다. 한 뼘 거리의 여자가 가슴에 와 꽂혔다. 그래서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먹고 가.”

    몸은 앙상하게 말라서 악다구니를 쓴다.

    주어진 친절에도 두렵다는 눈빛으로 저를 쏘아보았다. 뭐를 먹이겠다고 생각한 건지. 그는 속으로 뇌까리며 냉소했다.

    “내 거 말고 식사. 요새 뭐든 입에 넣지 않으려 한다던데.”

    에드문드는 몸을 기울여 비비안느의 귀에 속삭였다. 상대 쪽을 골리려고 한 말이었는데 되려 제 아랫도리가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친절하게 굴어야 하니 이래서는 곤란했다.

    저를 밀어내려던 비비안느의 손이 닿기도 전에 그는 등을 돌리고 이곳 로열 스위트의 다이닝 룸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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