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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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투가 나?”

    테라스의 문을 닫자마자 뤼드빅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물어 왔다.

    그는 화나면 웃고는 했는데 지금 그의 입가에는 실소가 걸려 있었다.

    비비안느는 그에게 많은 걸 설명하고 싶었지만 이곳에서는 그러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

    듣는 귀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그녀의 입 밖으로 새어 나간 건 진실이 아닌 사과였다.

    “거짓말한 건 미안해요.”

    “됐어. 속은 내가 머저리지. 안 그래?”

    “가는 길에 다 설명할 거예요. 제 말을 들은 다음에는 헛된 선택은 아니었다 생각하실 거고요.”

    “그래도 식사는 하고 가야 할 거 아냐.”

    “지금이 오찬 시간이라는 거 알아요. 그리고 시장하실 거라는 것도요. 그럴 거면 제 저택에 가서 식사를 대접할게요. 우선은 제가 몸이 좋지 않다고 하고 여기서 나가서….”

    “나 같은 새끼가 우리 아가씨 체면 구기는 건 못 참으시겠다.”

    싸늘한 목소리에 비비안느는 움츠러들었다. 뤼드빅은 알 만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네 사교 모임의 귀부인들이 뭐라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정도는 알아서 견뎌. 오늘 밤만 지나면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여자 몇 명이 말을 걸든 말든 그린 듯한 약혼자처럼 굴어 줄 테니까.”

    그녀가 말을 하지 않자 그의 표정이 현저히 일그러졌다. 역시 날 선 말이 이어졌다.

    “그게 아니면 뭐. 너 죽이려는 새끼한테 특별한 동정이라도 품었어? 그런 거야?”

    “아니에요.”

    비비안느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 순간 뤼드빅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면 어쩌자고.”

    그가 그녀 쪽으로 한 발짝 더 떼었다.

    “어쩌자는 건데, 메르고빌. 너한테 더 좋은 수가 있을 거 아냐. 그러니까 이렇게 귀한 때에 시간 낭비나 하고 있을 여유가 있지.”

    “저택에 가서 말씀드린다고 했잖아요.”

    비비안느는 그녀의 간곡한 목소리가 통하길 빌었다만 머지않아 그녀의 기대는 배반당했다.

    “내가 뭘 믿고. 이 정도 시간을 내 준 것만 해도 많이 봐준 거니까 방해하지 말고 따라와.”

    그는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비비안느가 따라오지 않자 뤼드빅이 고개를 돌려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는 뜻대로 되지 않으면 위압으로라도 밀어붙일 생각인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가 잡아당기자 비비안느는 너무나도 쉽게 끌려왔다.

    하다 못한 그녀가 테라스 난간을 잡아채며 버텼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작은 체구로 버티는 데 한계를 느낀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뤼드빅이 뒤돌아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비비안느는 추위에 그리고 에드문드로 인해 앞으로 일어날 모든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며 몸을 떨었다.

    “메르고빌 저택에 데려다주세요.”

    비비안느는 그의 다리를 잡고는 매달렸다. 구차했지만 이것보다 나은 방법을 떠올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뤼드빅을 올려다보았다.

    “다 설명할게요. 후회하지 않을 결정이라 약속드려요.”

    “메르고빌.”

    뤼드빅이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성의는 이해하겠지만, 내가 살아남아야 너도 살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비비안느는 간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뤼드빅은 잔혹했다. 그는 그녀를 타이르듯 애써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면이 상한 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었다면 여기서 속 좀 가라앉히고 오고, 소화가 잘 안 되는 거라면 이렇게 공기 좀 쐬고 와. 응?”

    “…….”

    “네 백작이 애틋해 미치겠는 거라면 유감이고.”

    그가 그녀의 손을 떨쳐 내고는 걸음을 옮겼다.

    비비안느는 저도 모르는 그 어떠한 힘에 이끌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다급히 멀어지는 뤼드빅의 등 뒤에 대고 외쳤다.

    “뤼드빅, 제 생각에는 콜트 백작이…!”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뤼드빅의 바로 맞은편에 백작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백작이 말없이 테라스에 걸어 들어올 때 비비안느는 온몸에 있는 피가 말라붙는 느낌이었다. 테라스 바깥의 빛과 테라스의 어둠이 맹렬하게 충돌하는 그 구간. 그곳에 에드문드의 발걸음이 닿는 순간 그의 얼굴 반쪽이 선명한 그림자에 가렸기 때문이다.

    비비안느는 그의 한쪽 눈이 암녹색으로 빛나는 걸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녀 자신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공허하게 울린다.

    “당신 가짜지?”

    그러고 보니 요원을 처음 만나 그에게 그 말을 한 순간을 기억했다. 그때 어둠에 가린 그의 눈이 똑같이 진녹색으로 번뜩거렸다.

    그리고 그녀가 미라볼타 거리 약국에서 보았던 암흑가 수장의 눈 색이 무슨 색이었나?

    ‘똑같이 암녹색이었어.’

    그때 그녀는 분명 앞을 바라보고 있었고, 암흑가의 수장은 그녀의 등 뒤에 있었지만 비비안느는 그녀의 앞에 놓인 약병에 반사된 그의 눈 색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약국의 실내가 어두워서 그의 눈이 지금처럼 암녹색으로 보인 거라면.

    비비안느는 이어 암흑가 수장의 체격이 요원의 것과 비슷하다는 걸 떠올렸다.

    그녀의 모든 짐작이, 모든 단서가 조각조각 모여 하나의 퍼즐 그림을 완성하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를 이곳 호텔의 테라스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림자에 가린 쪽 그의 눈 색은 암녹색이었다.

    그때 그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실례했습니다. 이걸 피우려던 거였는데, 사람이 있는 줄 몰랐군요.”

    그 말은 지금 백작이 시가를 손에 든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한 말이기도 했다.

    그러니 저건 어떠한 신호처럼 들렸다. 구해 주러 왔다는 그런.

    “괜찮아요. 가려던 참이었으니까요.”

    비비안느는 그렇게 말하며 비가시적인 구명(救命)의 손을 내쳤다.

    비비안느는 재빠르게 걸음을 옮겨 뤼드빅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백작이 그녀 쪽으로 넓은 보폭으로 걸어와 팔을 잡아채 가로막았다. 그녀의 가슴이 공포 또는 그 어떤 감정으로 펄떡거리며 뛰었을 때 그가 몸을 기울여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로열 스위트. 지금으로부터 10분 내로.”

    이곳에서 가장 호화로운 방을 말하는 것이었다. 비비안느의 눈이 흔들릴 때 백작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 약혼자가 뭘 하려는지 알겠는데, 돕고 싶으면 따라와야 하지 않겠어.”

    “…….”

    “고작 몇 시간이잖아, 비비안느.”

    그렇게 말한 백작이 그녀의 팔을 놓아주었다. 뤼드빅의 시선이 닿자 비비안느는 백작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뤼드빅의 뒤를 따랐다.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는지 백작의 목소리는 미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비비안느 영애?”

    비비안느는 원래의 식사 자리로 돌아왔다. 뤼드빅 또한 그녀에게 더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듯 원래 자리로 향한 뒤였다. 제 약혼자 주위에 앉은 여자들 시선이 안도감으로 변하는 걸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로 비비안느는 더 이상 그쪽을 훑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돌아온 에드문드가 주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일순 사교 모임 사람들이 비비안느가 보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수상하다는 듯 에드문드와 비비안느를 번갈아 보았다. 그 순간 에드문드의 시선이 맹렬하게 비비안느에게로 향했다.

    그가 떠난 뒤 식탁 위에 남은 건 어색한 정적뿐이었다.

    귀부인들 중 하나가 샴페인을 홀짝거리며 말했다.

    “오늘 에드문드 백작과 춤을 춘 영애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막상 백작께선 혼자 자리를 비우시는군요.”

    한즈버리 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 말에 답했다.

    “누가 알아요. 밀회를 가지려는 건지 뭔지. 비비안느 영애는 참 좋겠어요.”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비비안느에게로 꽂혔다.

    비비안느가 얼굴의 난처한 기색을 겨우 감추려고 했을 때 한즈버리 부인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에드문드 백작이 누구랑 사라졌는지, 굳이 황색지를 확인해 볼 필요도 없이 이곳을 관리하고 계신 약혼자에게 물어보면 되잖아요?”

    그 말에 다른 귀부인들도 동조했다.

    “그러게.”

    “그러고 보니 여기 이곳 파티 주최 측 사모님 되실 분이 앉아 계셨지.”

    그쯤 들은 한즈버리 부인은 샴페인을 들어 올려 그녀에게 생글거리며 말했다.

    “곧 우리 모임의 최고 정보원이 되어 줄 레이디께, 건배.”

    “건배!”

    다른 귀부인들 모두 서로 잔을 가져다 대 부딪히자 비비안느도 손을 들어서 잔을 맞대었다.

    그때였다.

    “어, 저기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요.”

    귀부인들 중 하나가 턱짓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테이블에 앉은 이들 모두의 시선이 그 귀부인의 고개가 돌아간 쪽으로 향했다.

    다른 귀부인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에이, 저 여자는 아니야. 이미 정혼자가 있는 데다가 둘이 사이가 너무 좋은걸.”

    그 여자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여인은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악단 쪽으로 가서 무어라 말하고 그걸 기점으로 노래가 바뀌었다.

    때마침 벽 쪽의 괘종시계를 확인한 비비안느는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역시 몸이 좋지 않아서 다시 테라스에서 공기 좀 쐬고 오는 쪽이 낫겠어요.”

    비비안느는 그들에게 미소를 지어 주고는 재빠르게 뒤돌았다.

    걸음을 옮기며 그들에게서 멀어지는 순간 한즈버리 부인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이미 정혼자가 있는 데다가 둘이 사이도 좋다.”

    무언가를 내포한 듯한 그 목소리를 무시하려 노력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그건 비비안느 영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러니 저 여자가 만약 걸어 나간 거였다면 용의선상에서 제외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또는, 그들이 찾고 있는 사람이 먼 곳에 있지는 않다는 말처럼 들렸다.

    비비안느 자신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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