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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춤곡이 이어지고 밤이 무르익자, 허기를 느낀 사람들이 하나둘 만찬장으로 향했다. 비비안느는 자연스레 그 무리에 섞여서 무도회장을 떠났다. 이번에는 매디슨도 다니엘도 없어 그녀는 약혼자를 찾아 그의 곁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지친 몸을 이끌고 뤼드빅의 옆자리 공석 의자를 겨우 집어 몸을 지탱했을 때, 또 다른 여자 하나가 같은 의자를 집었다.
그때 주위가 조용해지고 뤼드빅이 자신 쪽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저 옆에 서 있는 여자가 중요한 사람이었는지, 뤼드빅은 그 여자에게 인사를 건네고 상대가 손을 내밀자 고개를 숙여 정중히 입을 맞추었다. 꼭 마치 비비안느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비비안느는 식탁에 앉은 사람들과 어색한 시선을 교환하고는 뒤돌았다. 그 순간 뤼드빅이 걸어와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는 귓가에 ‘이해해 줘. 이러려고 온 거잖아.’ 하고 속삭였다.
“물론이죠.”
비비안느는 뒤돌아 그의 얼굴을 살피는 대신 그렇게 대답하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언제부터 그녀의 의견이 중요했다고. 그가 새삼스럽게 이해를 바라는 모습이 더 신기했다.
마침 정복을 차려입은 웨이터가 다가와 그녀에게 자리를 안내해 주겠다고 했지만, 비비안느는 안내받은 곳에 누가 있을지 알 것 같아서 정중히 거절하고는 주위를 살폈다.
마침 그녀를 알아본 귀부인이 냅킨을 들고는 허공에 흔들었다. 외견을 보니 한즈버리 부인인 듯했다. 마침 그녀의 앞에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녀 주위에 앉은 사람들이 익숙한 사교 모임 사람들인 걸 보면 저 공석은 원래도 제 자리였던 모양이었다.
선택지가 없었던 비비안느는 걸음을 옮겨 자리에 앉았다.
“여기 오늘의 주인공이 왔네요.”
그녀가 자리에 앉자 한즈버리 부인이 신나서 이야기했다.
비비안느는 멀리서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지만 무시하고는 식탁의 사람들에게 미소 지어 주었다.
“약혼자는 조금 바쁜 모양이네요?”
음식이 그녀 앞에 놓이는 동시에 질문이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왔다.
비비안느는 왠지 체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음식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 답했다.
“네. 아무래도 사업차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눌 시간이 필요한 것 같던데, 그 정도는 이해해야죠.”
“사업차?”
장미가 음각된 담뱃대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귀부인이 물어 왔다. 비비안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네. 이런 자리에서는 약혼자의 비즈니스가 우선이니까요.”
그녀가 우아하게 답하는 걸 마쳤을 때 한즈버리 부인이 끼어들었다.
“그러게. 등기된 걸 보니까 이곳 호텔이 렉스가 관리하에 있는 법인 소유라던데. 영애 약혼자가 주최 측이니 아무렴 할 일이 많겠지요. 그렇죠, 비비안느 영애?”
…주최 측이라.
그 말을 곱씹는 그녀의 속도 모르고 귀부인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어머, 그러고 보니 저번 선상 파티와 이 무도회를 연 주최자가 같다고 들었어요. 그러면 그 소문의 억만장자가 영애의 약혼자인가요?”
“어머, 그러면 말이 되네. 그 많은 돈이 다 어디서 났는지도.”
“에이. 설마 정말로 렉스가 차남이 암흑가에 연관되어 있으려고.”
어느 귀부인의 말과 동시에 비비안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뤼드빅을 바라보았다.
이곳의 진짜 주인은 에드문드 콜트 백작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가 이 무도회를 연 목적이 다른 데에 있다면.
비비안느는 여태껏 들어 왔던 라디오의 방송 내용을 떠올렸다.
그리고 제가 그걸 들으며 언젠가 했던 말도.
제 약혼자의 석방을 대가로 암흑가 세력이 제 파혼을 요구했다고 하는데, 렉스 가문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에 대한 반발심으로 보인 저력이 저 정도라면 이미 지금도 시시하다고 생각하셨을 테죠. 그럼 제게 더 하실 말씀도 없을 것 같은데요.
비비안느의 뱃속 깊은 곳에서 불안한 느낌이 스멀스멀 타고 올라왔다.
만약 그게 다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이 모든 게 매력적인 허점으로 위장한 함정이었다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뤼드빅을 알음알음 암흑가의 사람으로 믿고 있었다. 그건 거리에서 행렬을 하는 사람들과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뤼드빅을 담고 있는 비비안느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조사가 정확했다면 그와 겸상하고 있는 이들은 전부 암흑가의 인사들이었다.
‘분명 물증 같은 건 없다고 했지만, 이미 사람들이 틀림없이 뤼드빅을 암흑가의 책사로 믿는다면, 그리고 증거랄 것도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뤼드빅을 한 번씩 훑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비비안느는 직감했다.
이건 함정이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어디선가 플래시가 반짝이며 찰칵 소리가 났다. 비비안느는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지만 소리의 근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그녀는 제 옆 테이블에서 어느 귀족 내외의 사진을 찍어 주는 호텔 직원을 발견했다.
방금 건 뤼드빅을 노린 게 아니었다고, 그러니 모든 게 과민 반응일 뿐이라고. 그녀는 제가 하는 염려가 모두 쓸데없는 것이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 감이 들어맞은 거라면.’
단기간에 이렇게까지 여론을 제가 원하는 대로 조작할 수 있다니.
새삼 에드문드가 정치인의 아들이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비비안느는 틀림없이 뤼드빅의 승리를 점치며 에드문드를 마음껏 동정했었다.
그에 대한 마음을 숨기는 것만이 그녀의 운명을 점칠 변수라 생각했다.
그런데 만일, 에드문드가 이기면 어떻게 될까.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는 찰나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비비안느 영애. 그러고 보니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지내시나요? 한때 메르고빌 후작께서 다시 귀족원 의원님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서요.”
“…….”
비비안느는 그 순간 다시 한번 멍해졌다.
언젠가 그 요원이 그녀에게 건넸던 요원증과 여권 그리고… 임무를 명 받은 걸 증명하는 수상의 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편지에는 메르고빌 가문이 필요로 하는 귀족원 의석을 수상 직권으로 당장 내어 줄 수 있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물론 그녀가 약혼자 가문인 렉스 가문의 부패를 밀고한다면 말이었다. 백작은 그 편지를 제 손으로 가로채 요원 행세를 하며 나타나 저에게서 그 기회를 박탈했다.
‘렉스가와의 결합도 결국 그 귀족원 의석 때문일 텐데.’
그러니 백작은 그녀 가문이 얼마나 그 의석에 목말라 있는지 알았을 것이다.
그랬으면서. 그랬으면서 그는 제 손으로 그녀를 밀고자로 만들고, 아버지의 의원직 복귀라는 보상을 빼앗는 대신 세노윅 공작저의 객식구로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 뤼드빅이 무너진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에드문드가 자신을 또 한 번 죽게 할지, 자신에게 약혼 반지를 내밀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어떻게든 뤼드빅을 지켜 내야 했다. 비록 뤼드빅은 자신의 차악이었지만 그 선택지마저 잃어서는 밑바닥으로 전락하기 쉬웠다.
“메르고빌 영애?”
화두를 던진 귀부인이 비비안느를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괜찮은가요?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서.”
“그런가요.”
비비안느는 시선을 옮겨 나이프와 포크를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샹들리에 조명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평소보다 확연히 허옇게 질려 있었다.
한때는 외면, 한때는 부정, 애틋함, 그리움, 슬픔으로 바뀌었던 감정이 이제는… 완연한 공포로 바뀌어 그녀의 마음속을 짓눌렀다.
‘내색하지 마. 콜트 백작이라면 금방 알아챌 테니까.’
식사를 하려 했는데도 음식의 맛이 혀와 겉도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전채 요리 위에 올라간 새우를 겨우 몇 번 건드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례할게요.”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녀가 휘청하며 테이블을 잡자 귀부인들이 놀라 탄성을 내뱉었다. 자연히 주위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괜찮아요. 잠시 놀라서.”
그녀는 자신이 발을 삐끗했다는 걸 알면서도 고통을 무시하려 노력했다. 높은 굽이 그녀의 발을 위태롭게 지탱했다.
그렇게 겨우 걸음을 옮겨 그녀는 뤼드빅이 있는 테이블로 돌아갔다.
테이블 구성원은 대부분이 여자였기 때문에 돌아온 불청객을 훑는 시선은 역시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비안느는 뤼드빅의 어깨를 톡톡 쳤다.
뤼드빅이 성가신 걸 보는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방해한 모양이었다. 일이 마침 잘 풀리고 있는 게 맞았는지 그가 입 모양으로 ‘이해해 달라 했잖아.’ 하고 속삭였다.
“맞아요.”
비비안느는 답했다. 스스로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과 끔찍하게 겁에 질려 있다는 걸 의식한 채였다.
“그런데 제가 질투가 나서요.”
그녀가 그를 불러내려는 이유는 그게 아니라는 걸 신께도 맹세할 수 있었다.
역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하는 거짓말은 태가 났는지, 뤼드빅이 무슨 꿍꿍이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는 어딘가를 쳐다보고는 실소를 흘렸다. 아무래도 제가 에드문드를 보호해 주려고 그의 일을 훼방 놓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실상은 반대였지만 말이었다.
이대로라면 뤼드빅은 암흑가의 보스로 몰려 처분당할 것이다.
제가 아는 에드문드라면 분명 수를 짜고 이러한 덫을 놓았을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비비안느는 에드문드의 뜻대로 흘러가게 해 둘 생각이 없었다. 뤼드빅과의 결혼은 지금 그녀가 찾아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도 빠른 탈출구였다. 그녀가 충동에 이끌리는 걸 막아 줄 가장 이성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니 이 패는 그가 거두기 전에 그녀가 가져가야 했다. 에드문드가 그들을 상대로 하는 게임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기 때문이다.
비비안느는 뤼드빅의 팔을 당기며 말했다.
“테라스로 갈래요? 단둘이 이야기가 하고 싶어요.”
아직까지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눈치가 빠른 사람들이 이 원탁의 사람들과 함께 있는 그의 사진을 찍으려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진은 뤼드빅이 암흑가와 연관되었다는 물증으로 쓰일 수도 있었다.
“너 왜 그래, 메르고빌?”
뤼드빅의 목소리에 미세히 가시가 돋쳤다. 비비안느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어 혼란스러우면서도 제 의견을 계속해 피력했다.
“아무튼 빨리 가요.”
“나 식사 중인 거 안 보여?”
“부탁드려요.”
비비안느는 뤼드빅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가 피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고는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에게 간단한 양해를 구하고는 일어섰다.
뤼드빅 쟁탈전이 꽤 치열했는지 자신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지만, 비비안느는 그들에게 모두 눈인사를 하고는 뤼드빅과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자리를 비우자 좌중이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해졌다.
그중 몇몇 사람들은 에드문드가 있는 쪽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비비안느는 애써 외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