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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했었어요.”
비비안느는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가서는 부러 벽 쪽으로 걸음을 옮겨 의자에 잠시 앉았다.
떠날 줄 알았던 뤼드빅은 그녀의 옆자리를 지켰다. 그의 시선이 비비안느의 눈길이 향하는 쪽으로 향했다.
비비안느는 막연히 빛무리를 눈에 담으며 말했다.
“…호텔 직원들이 제게만 유별나게 친절한 이유 말이에요. 제가 그쪽 약혼자라서 그렇다기엔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 저한테만 깍듯했잖아요.”
“그렇지.”
“그쪽이 제게 손을 대려 했을 때 살렌너 리셉션에서 전화가 왔었다면서요.”
비비안느는 뤼드빅이 그녀의 약혼 발표 연회 전에 직접 말해 주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도 지부장과 랭스턴 리무진에 동승한 날, 지부장도 그렇게 말했었어요. 마침 제가 호텔 로비로 걸어 나와서 이렇게 마주치기까지 하고 운이 좋았다고. 제게 전해야 할 물건을 보스에게 전달받은 직후였다고 했으니까, 이곳의 진짜 주인은 따로 있는 셈이겠죠.”
“…….”
“그 사람이 저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거고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메르고빌.”
“이쯤이면 우리는 적진의 심장부에 와 있는 셈이잖아요. 초대받은 입장으로. 우리 정말로 저번 전략을 고수해도 되는 거 맞아요?”
비비안느는 뤼드빅을 바라보며 말했다. 뤼드빅은 잠시 비비안느와 눈이 마주쳐 멍해졌다가 그녀가 한 말을 파악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별다른 수가 있어?”
뤼드빅의 말에 비비안느도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뤼드빅은 그녀를 한 번 훑고는 제 앞에 펼쳐진 빛무리를 샅샅이 훑었다. 그 빛무리 속에서는 사람들이 쌍을 지어 악단의 노래에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사이로 이야기가 오가고 사람들이 웃는다. 멀리서는 가면에 가리운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기 쉽지 않겠지만, 가까이에서라면 어떨까.
뤼드빅의 입술 새로 탄성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춤.”
“…네?”
“춤이라고.”
그는 말을 이었다.
“내가 여자들이랑 두루 어울리곤 하니까.”
뤼드빅의 말에 비비안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여태까지 뤼드빅 렉스의 여성 편력과 아까 로비에서의 일만 봐도 자명한 것이었다.
그때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는 그쪽으로 당겼다.
비비안느는 그의 강압적인 태도에 거북함을 느꼈으나, 이곳이 에드문드의 사람으로 가득 찬 살렌너 호텔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견뎌 내기로 했다. 어차피 이쯤은 감수하기로 했다.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여졌다.
“백작의 정보를 갖고 있다는 유력가들에게 접근하는 대신, 그 유력가들의 딸들이나 정부들에게 접근하겠다고. 춤을 추다가 자연스럽게 파트너를 바꾸면 눈에 크게 띄지도 않으면서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 저 무리에 끼어들게 해 줄 내 파트너가 필요해.”
“…….”
비비안느는 자신의 다리가 부르터 아직까지 욱신거린다는 사실을 무시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뤼드빅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어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저더러 가만히 앉아 있는 쪽이 괜찮을 거라 말씀하셨어요.”
“글쎄. 뭐든 해 봐야지, 메르고빌. 여기까지 와서 몸 사리겠다고?”
뤼드빅은 자리에서 일어나 비비안느에게 손을 내밀었다. 비비안느는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그 손 위에 제 손을 올려놓음으로 품위 있는 귀족처럼 춤 신청을 받아들였다.
그때 누군가가 그들의 맞은편에서 걸어왔다.
상대를 알아본 비비안느가 그대로 주저앉을 뻔하자 뤼드빅이 그녀를 지탱하기 위해 그녀의 손목을 강하게 쥐었다. 그리고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짐작하고는 뒤돌아 그녀의 눈길을 좇았다.
뤼드빅은 시선 끝에 있는 자의 이름을 알았다.
에드문드 콜트 백작.
에드문드 콜트의 수려한 얼굴은 반가면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가면이 그의 언짢은 표정마저 가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의 푸른 눈이 뤼드빅을 한 번, 그가 쥐고 있는 비비안느의 손목을 한 번 훑었다.
그 흉흉한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안색이 하얗게 질린 비비안느는 잠시 시간이 얼어붙은 것 같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아냐. 이번에야말로 정신을 차려야 해.’
비비안느의 머릿속에 뤼드빅의 말이 울려 퍼졌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 네가 위협에 처할 때면 똑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똑같은 방식으로 너를 구하고 살려 낸다.”
모든 진실이 드러난 지금, 그녀는 애써 외면하려 했던 진실을 다시 한번 확인받은 기분이었다. 뤼드빅의 가설대로 경시청에 나타나야 했을 암흑가의 수장은 과연 이 사람이었다.
머릿속에서 뤼드빅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불쌍한 비비안느 메르고빌. 네가 얼마나 불쌍하면 너를 살려 놓았을까.”
비비안느는 그 말을 주문처럼 속으로 외며 그를 더 만나지 않아야 하는 이유들을 되새겼다.
“여기서 또 만나네요, 콜트 백작.”
비비안느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에드문드를 마주했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비비안느의 목소리가 이어져 어색한 공백을 메웠다.
“…저는 마침 제 약혼자와 춤을 추러 가려고 했답니다.”
그는 그 대답이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비비안느는 에드문드의 태도가 이해되었다.
그녀의 기억 속 요원과 동일 인물인 그는 저가 언젠가 제 약혼자에 대해서 했던 말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어떻게 보자면 그저 염려일 뿐인 행동들임에도 그가 자신을 기만하고 죽이려 했던 사람이란 걸 의식하니 마냥 호의라 여길 수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에드문드가 입을 열었다.
“그 다리로 말입니까.”
“…….”
“아까부터 걷는 게 불편해 보이시던데.”
말을 마친 뒤 뤼드빅에게로 향하는 에드문드의 시선은 꼭 그를 힐난하는 것 같아 보였다.
비비안느는 이제 이 관심이 고맙기는커녕 삶에 대한 위협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그에게 홀려서 다시 한번 넘어가게 되면 그녀는 그의 동정심이 사라지는 순간 죽게 되겠지.
비비안느는 이곳에 오기 전 들었던 어머니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불쌍해 보이지 말자. 그래서 더 엮일 빌미를 만들지 않는 것이 그에게서 안전해지는 방법이었다.
“그건 백작 각하께서 잘못 보신 것 같네요. 새로 신은 구두라 불편했을 뿐이에요.”
“…제 눈에는 새것으로 보이지 않아서.”
그렇게 말한 에드문드의 시선이 비비안느가 신고 있는 구두코로 향했다. 비비안느의 시선 또한 같은 곳으로 향했다. 마침 오늘 신고 온 것이 사용감이 있는 구두였다.
그가 사 준 건 싫고, 운신을 최대한 자유롭게 하려면 제일 편한 신발을 신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또 자신의 처지와 겹쳐지니 신발 하나 살 재력이 없는 거로 보였을 것 같다는 생각에 볼이 저절로 붉어졌다.
그걸 지적하는 그도 당황스러웠고, 그녀는 이 상황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 음악이 시작됐네요.”
비비안느는 겸연쩍은 제 속마음과는 달리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는 말했다.
“이만 저와 제 약혼자는 가 봐야 할 것 같군요. 안부를 전하러 와 주셔서….”
“비비안느.”
“…정말, 감사합니다. 백작.”
그가 자신의 말을 가로막았음에도 그녀는 꿋꿋이 제 할 말을 마쳤다. 때마침 뤼드빅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고는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라면 이런 태도가 싫었겠으나 오늘은 썩 견딜 만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비비안느는 뒤돌아 백작의 표정을 훑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에드문드를 다시 의식하게 된 건 무도회장의 정중앙에서 뤼드빅과 마주 보고 섰을 때였다.
“알아? 백작이 너만 쳐다보고 있다는 거.”
귀에 속삭여진 뤼드빅의 말을 곱씹어 볼 새도 없이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초청된 여가수가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맞은편의 뤼드빅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쥐었다.
비비안느는 애써 표정을 펴려 노력하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시선이 뤼드빅에게 향하자 그가 뒤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는 이었다.
“…보니까 백작님께서 아주 안달이 나신 모양이네. 안 그래도 네가 체면 차리겠답시고 그 몸으로 움직이는 게 신경 쓰였는데, 이제는 춤까지 추겠다니 여간 마음에 밟히는 게 아닌 모양이지.”
“…….”
“당장이라도 널 이곳 스위트의 침대에서 쉬게 해 줄 심산인 것 같아 보이는데, 넌 어떻게 생각해. 메르고빌?”
“…….”
“차라리 신대륙에 데려다 달라 해. 자유의 땅이니 그곳에서는 백작과 결혼도 할 수 있고 숨통도 트이겠지. 그런데 그거 알아? 네가 영영 신대륙에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
비비안느는 뤼드빅을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옮겨 에드문드가 있는 쪽을 훑었다. 어느 아름다운 레이디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그는 그녀가 보기에도 근사해 보였다. 언제나 비비안느 자신에게 향하고 있던 시선은 그 레이디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비비안느는 뤼드빅과 사이 좋은 모습을 연출하려 고고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작은 목소리로 제 할 말을 했다.
“백작 각하의 상대측 레이디를 훔쳐보고 있다가 그럴듯한 변명을 하려는 거면 그렇다고 말하세요. 정말 상관없으니까.”
“그러게. 저 여자도 금발이네. 그렇지 않나?”
그쯤 말한 뤼드빅의 말끝에는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있잖아, 상대가 눈부신 금발이면 어떤 점이 좋은 줄 알아?”
비비안느는 선홍빛 눈으로 뤼드빅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그 시선에 화답하듯 말했다.
“그 여자랑 있는 그 순간만큼은 네 생각이 안 나. 너랑은 인상부터가 영 다르니까.”
“…….”
“수컷들은 다 단순해, 메르고빌.”
뤼드빅이 나직이 말했다.
“백작도 사내새끼라면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저렇게 해소하시겠다는 거지. 오늘 네가 안 가겠다면 대체제는 많은 것 같은데?”
“역겨운 얘기 그만하고 할 일이나 하세요.”
비비안느는 춤곡이 끝나자마자 칼같이 뤼드빅의 손을 놓았다. 그녀 앞에 곧 낯선 사내가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이자, 그녀는 조금 망설인 끝에 그와도 춤을 추었다.
파트너가 여러 번 바뀌는 동안 그녀는 이 일에 대해 어머니가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하지 못했다. 신경이 다른 쪽으로 쏠려 있어서였다.
에드문드는 정말 그녀 쪽을 한 번도 바라봐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만큼이나 그를 신경 쓰고 있다가도, 막상 순번이 돌아와 에드문드가 자신의 다음 파트너가 될 무렵 비비안느는 자리를 떠 무도회장 끝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가까운 거리에서는 이런 부르튼 다리로 어색하게 움직이는 게 태가 날 것이 신경 쓰이기도 했고, 그와 더 이상의 신체 접촉을 피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한번 에드문드에게로 향했다. 그의 댄스 파트너가 그에게 몸을 밀착하는 걸 본 비비안느는 시선을 재빠르게 옮겼다. 언젠가 가짜 요원 행세를 하던 그와 공터에서 나눴던 말이 떠올랐다.
“몇 번이나 했는데요, 계약이라는 거.”
“한 번. 그러니까 어제 새벽이 처음이었겠군요.”
그 말과 세노윅 공작령에서 들었던 말을 비교해 보면 그게 거짓말이었다는 건 이제 알 수 있었다.
뤼드빅의 조롱이 오늘만큼은 참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