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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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은 렉스가의 리무진을 타고 한참을 달려갔다. 차가 멈춘 곳은 제도의 암흑가로 불리는 미라볼타 거리 주위였다.

    “놈은 여기서 장사를 했어.”

    그렇게 말한 뤼드빅은 손을 내밀어 비비안느가 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비비안느는 이곳의 풍광이 어째서인지 익숙했다.

    에드문드를 요원으로 알고 있을 때 그가 살던 빌라가 이 근방에 있었다.

    풍광에서 뤼드빅의 손 쪽으로 시선을 옮긴 비비안느는 망설이다, 그의 손을 잡고는 차에서 내렸다. 이제는 뤼드빅이 곁에 있는 것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뤼드빅이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하자 비비안느가 아직도 아픈 다리를 옮겼다.

    어디든 집에서 멀어지는 곳으로 향하는 걸음이라면 다리가 부러질지언정 걸어 낼 수 있었다. 약혼자가 어떤 모진 말을 해도 견뎌 낼 수 있었다.

    “네 백작님의 구역이었지.”

    뤼드빅의 말을 들으며 비비안느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핏빛 노을이 내려앉은 거리는 삭막했음에도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비비안느의 시선이 지붕이 낮은 저택들, 아직도 눈이 다 녹지 않은 거리들, 이 와중에도 때 묻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담았다.

    그녀는 묵묵히 뤼드빅의 말을 들으며 계속해서 걸었다. 그가 조사한 것을 공유하는 것이리라.

    뤼드빅은 거리에서 걸음을 옮기는 보통 사람들을 훑으며 말했다.

    “초기 사업 기반은 총기 유통업과 판매였어. 그리고 겉으로는 마권 사업과 펍, 카바레를 부지가 싼 이쪽 동네에다 짓고는 세금 신고를 하면서 운영했다지. 그래서 귀족들이 암흑가 세력을 물장사나 마권이나 팔아먹고 사는 족속들이라 비웃은 거고.”

    “…….”

    “제국의 암흑가라 불리는 ‘미라볼타’ 거리의 시작이었지.”

    “그리고요?”

    비비안느가 그에게 물었다.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해도 에드문드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더 듣고 싶었다.

    뤼드빅은 잔잔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이어 말했다.

    “그렇게 세를 넓혀서 기존 기업가들의 유통망을 통합하고 확장하는 식으로 사업을 관리했어. 그때 법 틈새로 빠져나가야 할 필요를 느끼고는….”

    “당신 가문에게 연락했군요.”

    “암흑가 세력은 신뢰의 증표가 필요했고, 아버지께서는 버려도 뒤탈 없을 머리 잘 돌아가는 개새끼가 필요했고. 그게 렉스 재단의 탄생이었고, 내가 맡게 된 ‘사업’의 시작이었어. 좋은 거래였지.”

    “그리고 그쪽은 태생적인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제 작위가 필요했고요.”

    “그래. 네가 아는 대로지.”

    뤼드빅이 짧게 대꾸했다. 속으로는 진심을 삼키면서.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랬다.

    처음 봤을 때부터 저 여자가 예뻤었다. 명망 높은 후작가의 적녀였던 귀족가 아가씨. 너무나도 고결하고 고귀해서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는 사람.

    그 같은 새끼가 그녀의 관심 끌 방법은 없을 거라 생각했고, 있다 하더라도 한정되어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저 여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보는 순간순간이 즐거웠다.

    신분제가 스스로 전복되어가고 상황이 뒤집히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물은 그 모든 걸 다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라디오에서 사람들은 그더러 개새끼, 인두겁 뒤집어쓴 천인공노할 미친놈. 사형당해 마땅한 놈이라고 말하는데… 맞는 말이었다. 그는 제 감정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애새끼였으니까.

    비비안느를 살렌너 호텔에서 만났을 때, 왓킨스가 비비안느의 배에 피임약을 던지면서 그녀를 희롱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화가 났었다.

    그때 이게 무슨 감정일지 궁금했었다.

    저 여자가 상처받은 모습을 보는 걸 좋아했으니 다른 사람에게 다친 걸 보며 언제나 그랬듯 기뻐야 할 텐데, 왜 기분이 더러울까. 이걸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그런데 막상 제 분노를 분출하고 나니 기분이 더 더러워졌었다.

    그쯤 생각한 뤼드빅은 낮게 웃었다. 담배를 꺼내서 물려다가 비비안느의 눈치를 살피고는 구겨서 땅에 버렸다.

    오늘에야 그게 뭐였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다른 사내새끼 때문에 우니까 그때와 똑같이 기분이 더러웠다. 그는 그저 그녀가 좋았던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다른 것들이 그녀를 괴롭히는 게 싫었던 거고. 그가 그녀한테 못되게 굴 때 기분이 좋았던 건 그냥 요만한 애새끼처럼… 제 아가씨 관심 끄는 게 기꺼웠던 거고. 그러니까 그는 그녀가 그렇게 된 것이 아팠다.

    그러니 네가 나 같은 걸 사랑할 일 없겠지만, 결혼한 뒤에 네 아비처럼 내가 똑같이 몹쓸 짓을 할 거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도 남편 노릇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네 아비처럼 똑같은 괴물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만은 알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말이 쉽게 나가지 않았다.

    결국 튀어 나간 건 엉뚱한 말이었다.

    “꼭 네가 한 말이 아니더라도 난 네 남자를 잡을 거야, 메르고빌.”

    “…….”

    “넌 내 옆에서 날 도울 거라는 사실도 변함없고. 그러니까 백작한테 품은 마음 있으면 지금 다 버려.”

    “그렇다고 제가 그쪽을 좋아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대답을 기다리는 그에게는 잔인한 말이었겠지만 비비안느는 언제나 상대에게 진실되고 싶었다. 용서할 수 없는 상대에게도 그 원칙은 똑같이 적용되었다.

    그녀는 숨을 고르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백작에게 배신당할 바에는 그쪽을 견디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

    “더 바라지만 말아 주세요. 그래 주신다면 제게 어떤 말을 하든, 어떻게 대하시든 상관없어요.”

    그 순간 비비안느가 휘청했고, 뤼드빅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채 당겼다. 덕분에 비비안느는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녀가 그를 감사한 눈으로 보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꼭 무언가를 참아 내는 듯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잡힌 손목이 떨리고 있다는 걸 확인한 뤼드빅은 그녀의 손목을 내쳤다.

    그래도 이 간격이 좁혀질 날이 언젠가 있을 거라고 그는 믿었다.

    그게 그토록 허망한 꿈인 줄 알지 못하고는.

    비비안느를 볼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조차도, 까마득히 모른 채로 그는 그녀와 함께 길거리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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