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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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똑.

    “메르고빌, 뭐 때문에 이렇게 늦고 있는 거지?”

    의상점 내 탈의실에 노크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르고빌 후작은 어떻게든 미래 사위와 딸을 붙여 놓으려 했고,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메르고빌가 기사를 시켜 비비안느를 집에 데려오게 하기보다는 렉스가에 연락을 넣어 뤼드빅을 움직이려 했다. 소식을 들은 뤼드빅은 비비안느를 데리러 의상점에 갔고, 그녀는 탈의실에서 나오지 않는 중이었다.

    “메르고빌.”

    뤼드빅 렉스가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며 비비안느의 이름을 불렀다.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괜히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자신의 옆에 있는 의상점 주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 또한 난처한 표정인 건 마찬가지였다.

    뤼드빅은 턱짓하고는 뒤돌았다. 그러자 의상점 주인이 열쇠를 써서 문을 열고는 뤼드빅의 옆에서 목청을 골랐다.

    눈치를 주어도 사내가 뒤돌아보지 않으려 하니 그녀는 입을 열어 말했다.

    “저… 앞을 보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

    “드레스도 이미 잘 벗어 두셨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셨습니다. 정말 문제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뤼드빅이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방 안을 샅샅이 훑던 눈길이 향한 곳은 화장대 거울 앞이었다. 가녀린 형상이 몸을 말고 웅크려 있었다. 그녀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조금 침울한 표정이 된 의상점 주인이 말했다.

    “저는 이만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두 분께서 이야기 나누시지요.”

    그녀는 고개를 꾸벅이고는 사라졌다. 뤼드빅은 문을 닫고 들어와 비비안느에게로 향했다.

    “메르고빌.”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으나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메르고빌.”

    “…….”

    “…비비안느.”

    그는 나직이 그녀의 성이 아닌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의 손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손목이나 어깨를 잡아채는 건 그에게 늘 쉬운 일이었으나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그녀가 그 때문에 화난 눈을 하고, 두려워하고, 숨 막혀 졸도할 것 같은 표정을 지을 땐 그게 즐거웠다.

    빌어먹을 열등감이나 증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더 괴롭히고 즐겼다. 그가 밑바닥에서부터 어디까지 올라갔는지 느낄 수 있는 수단이라 생각하며 짓밟고 또 짓밟았다. 이 여자는 겉으로는 가녀려 보여도 갈대같이 휠 뿐 꺾이진 않았기에 더 오기가 생겼다.

    그런데 막상 그녀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 때문에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 모든 섭리와 이치와 논리가 깨졌다. 그녀가 단순히 고통스러워하는 게 즐거웠으면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틀림없이 즐거워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아주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토록 꺾이지 않던 비비안느 메르고빌이 처량하게 울고 있었는데도.

    그제야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녀를 괴롭히는 게 아닌, 이 여자가 제게 반응하는 게 좋았던 거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게.

    그리고 제가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그녀가 처참하게 무너졌을 때….

    그는 그녀의 앞에서 가장 약해졌다.

    그녀가 아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가 왜 이 여자만큼이나 아픈지를 집요하게 추적해 보니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표출이 얼마나 비틀렸는지를 실감되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녀에게는 무의미한 일이었음을, 그래서 그녀를 꺾을 수 없었음을 자각했다. 그리고 이 여자가 다른 사내새끼 때문에 무너져 울고 있는데 자신은 그녀의 망가진 삶에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실감했다.

    이 여자를 가지는 게 그의 행복이었고, 우는 이 여자를 아내로 맞는 게 최종 목표였으면 어찌 되었든 그는 기뻐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저 아가씨는 현실주의자이므로 에드문드 콜트가 아닌 자신을 택할 테니까. 그래서 지금 울고 있는 것일 테니까. 그런데도 지금 그는 다른 감정을 느꼈다. 온몸이 더 깊은 곳으로 한없이 처박히는 이 느낌.

    매사 유능했던 그는 처음으로 무력감을 실감했다.

    말 그대로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을 테니까.

    그러고 나니 콜트 백작에 대한 증오심이 치밀었다.

    제까짓 게 뭔데.

    이 도도하고 까다로운 여자를 이렇게 해치고 속까지 망가트려 놓았나. 그녀를 괴롭혀 오며 그녀가 이런 모습을 하면 볼만하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된 그녀를 보니 마음은 잿더미였고 어디로 향할 데 없는 감정은 무의미하고 공허하기만 했다.

    뤼드빅은 그녀의 떨리는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고 싶으면서도 제가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았다.

    감정을 한번 자각하고 나니 이 순간순간이 그의 신경을 마비시키는 독 같았다.

    “의상점 주인에게 콜트 백작이 다녀갔다고 들었어.”

    뤼드빅은 서럽게 우는 비비안느 앞에서 말했다.

    “그치 때문에 그래? 그치가 모진 말이라도 했나? 협박했어?”

    “…….”

    “내내 멀쩡했다며. 초대한 사람들 다 가고 탈의실에 들어올 때까지.”

    뤼드빅은 이 말을 이어 나가는 동안 자신이 이 여자에게 무엇인지를 실감해 나갔다.

    비비안느는 자존심이 강했으므로, 콜트 백작을 좋아하는 그녀가 그치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일 리 없었다.

    애써 멀쩡한 척. 콜트 백작은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는 척하고 싶었을 거였다.

    그리고 이 자리로 돌아오니 공허감이 사무쳤을 것이다.

    제 마음을 깨닫고 나니 견디기가 힘들었을 거고.

    그러니 정작 그녀에게 무가치한 사람은 밑바닥까지 보여도 되는 자신이리라는 자각.

    “네가 그런다고 내가 그만둘 것 같아?”

    그래서 뤼드빅은 비비안느에게 말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은 평소와 같이 모질게 나갔다.

    “아, 그래. 그러면 좋겠네. 내가 이 일 다 그만두고, 네 백작 정체 밝히려고 돈줄 추적하는 일도 이제는 안 하면. 그러면 나도 죽고, 너도 내 옆에 사이좋게 묻힐 테니. 널 영원히 가지려면 그쪽이 더 빠르려나.”

    “…….”

    “그러니 내 아버지한테는 내 능력 부족이라고 말씀드릴 테니까, 넌 백작한테 가서 그걸 근거로 옆에 남게 해 달라고 해. 내 약점이라도 잡았다고 말하라고. 그러다 널 태운 차가 다시 한번 폭발하면 그때는 날 원망 못 하겠지.”

    비비안느는 그제야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뤼드빅은 그가 한 말이 신경 쓰여 괜히 화장대에 놓인 솜을 집어 들고는 비비안느의 얼굴을 훔쳐 내 주었다.

    비비안느가 고개를 피했지만 그는 그녀의 턱을 섬세하게 잡고는 꿋꿋이 그녀의 진한 화장을 닦아 냈다.

    그러자 그녀의 뺨에, 눈에… 멍 자국이 드러났다.

    뤼드빅의 눈이 그 순간 흔들렸다. 비비안느는 고개를 푹 숙였다.

    “누구야.”

    비비안느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뤼드빅의 집요한 언성이 따라붙었다.

    “그 새끼가 그래? 너 때리냐고, 메르고빌.”

    “…….”

    “제발.”

    그가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떨고 있는 비비안느에게서 손을 떼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뭐라고 말 좀 해 달라고.”

    그의 말끝이 분노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가 비비안느를 두고 어딘가로 걸어 나가려 했을 때였다.

    “아버지예요.”

    뤼드빅이 뒤돌아 비비안느를 보았다. 비비안느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꽤 오랜 시간 동안 싸우고 있던 그 괴물이 그랬어요. 에드문드 콜트 백작이 아니라.”

    “…….”

    “그러니까 콜트 백작에게는 전부 다 비밀로 해 주세요. 내가 울었다는 것도, 다쳤다는 것도. 다.”

    “…….”

    “그리고.”

    비비안느는 짧은 정적 뒤에 말했다.

    “그만두지 말고 이겨 주세요. 콜트 백작을 상대로.”

    “넌 그 새끼 좋아하잖아.”

    “좋아해요.”

    비비안느는 답했다. 뤼드빅은 그게 저를 향한 말이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넓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비비안느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제가 그 사람 감언에 또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장담을 못 하겠어요. 그 사람이 저를 또다시 죽이려 하면 그때는 견뎌 낼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보는 것만으로도 설레서… 이런 제가 싫어서 견디지를 못하겠어요.”

    “…….”

    “그러니까 그러지 못하게 그쪽이 끝내 주세요.”

    그쯤 말한 비비안느를 뤼드빅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 말을 하기까지 비비안느가 얼마나 아파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는 에드문드 콜트 백작에 대한 진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나서야 그게 잘못인 줄을 알았다.

    “그래.”

    뤼드빅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게. 언젠가 놈의 정체가 다아트로 브로드캐스트를 통해 까발려지고, 이 제국의 수상 각하께서도 놈의 정체를 깨닫는 날이 오도록 내가 약속할게.”

    “…….”

    “그러니까 지금은 잠시 걷지. 응?”

    “…….”

    “걸으면 기분이 나아질 테니까. …집에 조금이라도 더 늦게 들어가고 싶잖아.”

    그 말에 비비안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후작저에서 잠시만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뤼드빅이 곁에 있는 것쯤은 견뎌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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