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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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레스를 의상점에서 선보이기로 한 날 비비안느가 입은 것은 하얀색 머메이드 드레스였다. 가슴 위쪽으로는 흰 꽃들이 섬세하게 수놓여 있는 시스루로 장식되어 있었고, 그녀가 걸을 때마다 레이스를 아끼지 않은 밑단이 아름다운 궤적을 그렸다.

    이런 드레스를 아예 처음부터 만들었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렸겠지만 이건 고가의 기성복을 사서 수선한 것이었다.

    하지만 비비안느는 결혼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기에 이 점에 큰 불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거울 속의 자신을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풍성한 베일을 쓰고 작은 티아라를 얹은 그녀는 더 이상 사용인들이 말하는 ‘아가씨’ 같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귀부인이 되는 일은 정말 머나먼 일처럼 느껴졌기에 더더욱 스스로의 모습이 생소했다.

    ‘이렇게 정말 렉스가의 신부가 되겠구나.’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대기하고 있던 의상점의 사용인이 문을 열어 주었다.

    잠시 망설이던 비비안느는 걸음을 옮겨 문밖으로 향했다. 그러자 쇼윈도를 등지고 자신을 보러 온 사교 모임의 귀부인들이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를 보고는 한 번도 웃어 준 적이 없었던 렉스가의 안주인, 즉 의장 부인도 비비안느를 보고는 큼큼, 하며 헛기침을 했다.

    비비안느는 어머니를 찾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보러 오지 않았다. 그녀는 속이 조금 씁쓸했지만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배시시 고운 미소를 지으며 좌중을 훑은 뒤 말했다.

    “어떤가요.”

    비비안느의 목소리에 대답을 해 준 것은 어느 귀부인이었다.

    “와… 메르고빌 영애. 정말 눈부시게 예뻐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일제히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신랑분께서도 정말 좋아하시겠어요. 눈을 떼지를 못할걸요?”

    “맞아요.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신부라니. 이제 매일 얼굴 볼 생각하니 얼마나 좋겠어요.”

    “드레스가 꼭 레이디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꼭 맞네요. 머메이드 라인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 처음 봐요.”

    “그러게. 목선부터 어깨, 허리까지 워낙 가늘고 섬세해서 안 어울릴 수가 없어요.”

    “빨리 이 모습을 약혼자께 보여 드리고 싶어서 어째요?”

    어느 귀부인이 옆을 툭툭 치며 말하자 그 귀부인의 옆에 서 있었던 한즈버리 부인이 조금의 정적 후에 답했다.

    “그러게.”

    “…….”

    “영애를 놓친 에드문드 콜트 백작께서도 얼마나 후회하겠어요?”

    이어진 그 말에 비비안느는 잠시 미소를 잃을 뻔했지만 그녀는 평정을 유지하고는 예의 바른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무의식적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그 행동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의 눈길을 따랐다.

    쇼윈도 앞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다들 그게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저런 외모를 가진 사내는 제국에서 하나뿐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비비안느는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들 사이에 어떠한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가 떠날 때 한 번뿐인 일이라고, 더 이상 그와 얽힐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으니까.

    그러니까 이를테면 그건 그에게 마음이 남아 있는지를 알아보는 절차일 테니까 더는 만나지 말자고 그에게 말했었다. 그때 그는 별다른 말 없이 그녀를 내버려 두고는 자리를 비웠다.

    ‘에드문드 콜트.’

    그 남자가 다시 이곳에 있었다. 꼭 그 요원처럼, 한 손은 슈트 주머니에 근사하게 찔러 놓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담배를 들고.

    시선이 계속해서 마주치자 사내는 가까이 다가와 쇼윈도를 노크했다. 동시에 비비안느와 에드문드의 시선이 유리를 하나 사이에 두고 강렬하게 맞닿았다.

    그녀는 가슴이 뛰는 걸 느끼면서도 지지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내가 버려진 게 아니라, 내가 그쪽을 버리는 거야.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에드문드는 한때 선상 파티에서 웃는 비비안느를 보며 이상한 울렁임을 느낀 바 있었다.

    그녀가 매디슨 파커에게 보이는 그 환한 미소를, 자신에게는 영영 보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기분.

    그게 무슨 느낌인지 그는 여태껏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알려 하지도 않았고, 그저 마음 한구석에 처박아 놓고는 잊어버린 것이었다. 감정은 그에게 불필요했다. 이미 비비안느 메르고빌에게 쏟아붓고 있는 것만 해도 충분했다.

    그가 오늘 그 의상점으로 찾아가기로 한 것도 그 감정의 발로였다.

    비비안느가 보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을 더 찾지 말라 했지만 그러고 싶다 해서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감각은 안 그래도 권태로운 그의 삶을 더한 무채색으로 바꾸어 놓았다.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비단 흐리멍덩했던 삶에 색채가 생기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이 있는 세상만이 빛나 보이는 것.

    비비안느가 없으면 그의 삶은 이제 아예 무의미해졌다. 평소와 같이 일을 해도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고, 다른 것에 재미를 붙이려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의 레이디는 절차를 꽤 중요시하니까.

    공식적으로 그녀를 볼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않는다.

    그런 단순한 생각에서 저택을 떠나 비비안느를 보러 왔다.

    차에서 내려 걸음을 옮김에 따라 비비안느의 형상이 가까워졌고, 어느 순간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했다. 그 순간 그는 가슴을 직격으로 꿰뚫리는 느낌이었다. 온몸의 혈관을 타고 짜릿한 무언가가 흐르는 감각.

    그녀의 눈을 바라보던 그는 한 손을 들어 유리를 가볍게 노크해 보았다.

    그리고 방금 의상점의 열린 문밖으로 새어 나오던 어느 귀부인의 목소리를 곱씹어 보았다.

    “영애를 놓친 에드문드 콜트 백작께서도 얼마나 후회하겠어요?”

    후회.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찾고 있던 감정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더 잘 알고 있는 제 감정이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의 신부가 되기 위해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본 뒤의 감정은 분명, 후회였다.

    그녀를 보면 가슴이 뛰었다. 그녀가 웃는 걸 보면 괜히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다시 한번 제 손을 벗어나 저렇게 야위어 가는 걸 보면 어째서인지 애가 탔다.

    그녀가 조금만 더 서둘렀으면 이미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될 수도 있었을 거라는 사실에….

    그는 후회했다.

    비비안느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다음 다른 귀부인들과 말을 이어 나갔다. 저러니 애가 타지. 아예 제가 여태껏 쌓아 왔던 모든 걸 걸고 도박을 하는 지독한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고 있지 않나.

    저 여자가 그의 곁에 되돌아올 거라 생각하면 뭐든지 내어 줄 수 있었다. 그의 생애, 그의 발자취, 그의 업적, 그가 거래한 인물들 리스트.

    …심지어 여태껏 잘 써 왔던 준조직원 하나를 쳐 내는 것도.

    그가 차로 돌아가자 대기하고 있었던 기사가 문을 열어 준다. 에드문드가 랭스턴 리무진 안에 타자마자 동승하고 있던 이카로스가 말했다.

    “분명 레이디를 보고 나면 마음이 혼란스러워지실 거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조금만 자중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조언 드리지 않았습니까.”

    “살렌너 호텔. 그곳에서도 연회 정도는 열 수 있지 않나?”

    “…가능합니다.”

    “언론사에는 선상 파티를 연 거부가 또 다른 사업체에서 똑같은 재미 좀 보려고 한다고 해. 사람을 초대하고 파티를 열 거라고. 이번에도 렉스가 측에 이 제국 암흑가 보스의 옛 인연들이 그 자리에 올 거라는 언질을 조금 흘리고.”

    “이제는 누굴 초대하실 생각입니까.”

    “신대륙에서 연을 쌓아 둔 인맥.”

    “그렇다 함은 이 대륙에 유통망을 만들게 도운 다아트로 주변국의 거물들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분들은 이 일에 끌어들이기에 너무 귀한 인연입니다. 나중에 이 일의 진상을 알게 되면 관련자들은 보스께서 보기 드문 성급한 결정을 내렸다는 것도 아실 거고요.”

    이카로스는 진심으로 그의 보스를 만류하고 싶었다.

    지금 그가 말하는 이들은 에드문드가 다아트로 제국에 그만의 사업을 시작하게 된 기반이었다.

    에드문드는 그들이 기존에 쓰고 있던 유통망을 넘겨받아 총기를 밀매했고, 이때 제국에서 숨을 죽이며 분산되어 있던 암흑가 세력은 하나둘 에드문드의 사업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제국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들로, 얼굴도 모르는 어느 암흑가 보스의 등 뒤에 고국의 유력가가 있다는 걸 깨닫고는 그 보스에게 충성을 바쳤다.

    때마침 이카로스가 한술 더 떠 ‘다아트로 암흑가의 보스와 그들 고국에 있는 유력가들은 혈맹을 맺었다.’는 이야기를 퍼트리자 충성을 바치는 세력들은 더욱 많아졌다.

    다아트로의 이 군소 세력들은 에드문드를 위해 일했으나 그러면서도 정작 그들의 보스가 누구인지 몰랐기에 경관들에게 잡히거든 매번 다른 이름을 말했다. 이후에야 수사망이 좁혀 들자 문제의 보스는 조직의 일선인 ‘돈 베칼로네’로 통일되었지만, 기득권들이 가짜 보스인 돈 베칼로네를 재판에 넘겼을 때 이미 사업체는 크게 확장한 뒤였다.

    그러니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해 준 주변국의 유력가 인맥을 내세운다는 건 정말 보스의 사업 기반을 건다는 말일 것이리라.

    그쯤 생각한 이카로스는 제 보스에게 아뢰었다.

    “뤼드빅 렉스에게 보스의 정체를 캐낼 수 있는 정보를 미끼처럼 내어주면서, 동시에 언론가를 통해 그자의 치부를 들춰내시다니요. 어떤 걸 계획하고 계신 건지 제게 언질이라도 조금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결국 뤼드빅 렉스를 망가트리겠단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 외에도 물리적이고도 빠른 방법이 많아 보이는데, 왜 굳이 우리 조직의 살점을 내어 주시면서까지 뜸을 들이십니까?”

    “우리 레이디께서는 절차가 중요하신 분이니까.”

    에드문드는 차 안의 한랭하고 건조한 공기 속에서 그렇게 내뱉었다.

    “그래서 살렌너 호텔에서 하시려는 게….”

    이카로스가 말끝을 흐리며 질문을 하자 에드문드가 답했다.

    “먹여야지.”

    “…….”

    “그새 못 먹어서 야위었던데.”

    “그나저나 그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이카로스는 때마침 생각난 김에 말문을 텄다.

    에드문드는 그게 비비안느의 이야기일 줄 알았는지 듣고 있다는 듯 이카로스를 바라보았다.

    이카로스는 이어 말했다.

    “비비안느 영애의 몸에 멍 자국이 늘었다는 메르고빌 저택 측 보고입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 했습니다만, 레이디께서 원래 쓰던 사용인이 아니면 허드렛일을 시키며 멀리하셔서…. 아예 근처에서 모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여 보고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라 합니다.”

    “…….”

    “그러니까 야윈 게 단순히 못 먹어서만은 아닐 거라는 말입니다.”

    이카로스의 말에 에드문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살렌너 호텔에서의 연회가 예정보다 더 빠르게 열린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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