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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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속보로 인사드립니다. 마크 와그너입니다. 뤼드빅 렉스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빗발치는 가운데, 그가 야당 인사들에게 로비해서 카지노를 합법화하려 했던 정황이 드러나 대중의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이럼에도 그가 암흑가와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론은 뤼드빅 렉스의 배후에 있는 세력들이 캐롤리나 러셀라의 추종자를 살해했을 거라 믿고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서서 이 일의 진상을 파헤쳐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방으로 향한 비비안느는 습관처럼 라디오를 켰다. 그녀는 공허한 방을 배회하며 이 방이 3일 전에 어땠는지를 떠올렸다.

    지저분한 시트.

    사내가 떠난 자리에 밴 온기. 먹다 남긴 브랜디. 바닥을 구르고 있는 글라스.

    그리고 빗물에 젖어 이불로 몸을 가린 채 떨고 있는 그녀.

    귀족원 의장을 만나고 온 부모님이 그들이 집을 비운 사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닫는 데에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충동에 휩싸여 에드문드에게 다시 저를 내준 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 채 그 자리에 멍하게 앉아 있었던 탓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때 이후로 아버지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그녀에게 더욱 가혹했고, 그녀는 그날 이후로 이 저택에서 아름답게 시들었다.

    오늘도 아버지는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성큼성큼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

    방에서 걸음을 옮기던 비비안느는 어깨를 움찔하고는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역시 아버지가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디오를 꺼 주게나. 내 딸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그 말에 아버지가 대동한 사용인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라디오를 끄고는 사라졌다. 문이 닫히자 이제는 아버지와 그녀뿐이었다. 먼저 입을 연 건 메르고빌 후작이었다.

    “콜트 백작이 되도 않는 저항을 해 보겠답시고 자꾸 네 약혼자의 품위를 깎아내리는 일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점잖게 티 테이블에 앉으며 비비안느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입을 달싹거릴 뿐 대답하지 않자 그가 종용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너도 라디오로 소식을 들었겠지. 나는 저 정보를 푼 배후에 암흑가의 수장인 네 백작이 있을 것 같은데, 내가 틀리게 이해했느냐?”

    비비안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반박하지 못했다.

    뤼드빅 렉스를 시켜 카지노 합법화를 추진하게 한 건 암흑가 세력이었다. 에드문드 콜트가 그 수장이라는 말이 맞다면 저 정보를 푼 것도 그인 셈이 되었다.

    또한 그녀의 아버지는 콜트 백작이 자꾸만 뤼드빅을 물고 늘어지는 그 이유가 그녀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비비안느는 아버지께서 계신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차분히 대답했다.

    “캐롤리나 러셀라의 추종자를 살해한 건 제 약혼자가 아니에요. 그러니 물증도 없고 여론을 뒤집을 결정적인 단서도 없을 거예요.”

    그녀는 아버지의 표정이 변하는 걸 눈치챘지만 그렇다고 물러서지 않았다. 비비안느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조곤조곤 이어 말했다.

    “제 약혼자의 석방을 대가로 암흑가 세력이 제 파혼을 요구했다고 하는데, 렉스 가문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에 대한 반발심으로 보인 저력이 저 정도라면 이미 지금도 시시하다고 생각하셨을 테죠. 그럼 제게 더 하실 말씀도 없을 것 같은데요.”

    비비안느는 아버지와 거리를 둔 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서릿발 같은 후작의 시선이 비비안느에게로 와서 꽂혔다.

    “비비안느.”

    후작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가 언제부터 그런 식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었지? 그런 불손한 눈빛으로.”

    “…….”

    “난 너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비비안느 또한 제 아버지가 말하는 사실이 궁금하긴 했다. 언제부터 그녀가 제 생각을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게 된 걸까. 권위에 순종하지 않고 제 주관을 세우게 된 걸까.

    에드문드의 곁에서 제 뜻을 입 밖으로 말하는 게 어렵지 않음을 깨닫고 나서부터였다.

    자신이 틀리지 않고 그저, 다를 뿐이라는 걸 배운 후로부터였다.

    그녀의 머릿속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이제는 네 약혼자의 ‘여자’가 되어야지.”

    그리고 제 상념은 제 아버지가 아까 했던 말을 또다시 떠올렸다.

    “난 너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비비안느는 제 손을 꽉 움켜쥐었다.

    “네. 아버지는 저를 제 약혼자의 여자로 길러 내 주셨으니까요.”

    끝내 그녀는 제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토해 내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 씨를 타고났어도 제 본질과는 다른 것으로 피어날 수 있어서 꽃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아버지.”

    비비안느는 이러한 말을 아버지가 반기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자신이 백작을 버리겠다 결심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잃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에드문드는 떠나겠지만 그가 남긴 것들도, 그가 바꿔 놓은 것들도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쯤 생각한 비비안느는 이어 말했다.

    “그래서 학습이라는 게 있고 학교가, 교육 기관이 있는 거잖아요.”

    “교육 기관?”

    후작은 당치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고작 공장 다니는 노동자 계층을 우리 같은 귀족들이 부려 먹기 편하게 표준화하도록 만들어진 게 교육 기관이다.”

    가르치듯 내뱉은 후작이 거친 숨을 골랐다.

    비비안느는 그런 아버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교육은 뭐가 다른가요.”

    그 말에 후작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럼에도 비비안느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가 에드문드 콜트 백작을 저택에 들인 걸 힐난하고 싶으시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동아줄로 붙들기로 했던 이 약혼보다 그 사람이 좋았을 뿐이에요. 마음은 정리하려 해 볼게요.”

    “…….”

    “그런데 그 일이 죄송하지는 않아요.”

    비비안느는 스스로를 잃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들이 수면제를 먹이고 백작의 진실이 드러나도, 그래서 자신이 뤼드빅의 약혼자로 남는다 하여도.

    그녀는 삶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살아갈 생각이었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이!”

    후작의 손가락 끝은 비비안느에게 향했다.

    “너 때문에 내가 어떤 수모를 당했는데. 그, 그, 그 사생아 따위에게…!”

    “아버지께서는 그 사생아 돈이 필요하시잖아요.”

    그 말에 후작이 얼어붙었다. 그의 잇새로 끔찍하리만치 낮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네가, 감히. 내 앞에서 그따위 말을 입에 올려?”

    비비안느는 걸음을 옮겨 후작이 앉은 곳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뒤로 빼며 말했다.

    “메르고빌가 운전 기사에게서 다 들으셨으리라 생각해요. 저도 이런 상황, 달갑지 않아요. 아버지. 제 감정에 거짓말하고 싶지 않고, 렉스가 약혼녀라는 거추장스러운 이름에 기대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사용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채 스스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늘 저를 비참하게 만들잖아요. 결국, 제가 다치지 않기 위해 제 손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입힐 수밖에 없게끔 하셨잖아요.”

    “…….”

    “그래도 뤼드빅 렉스의 약혼자로 남기로 한 건 제 선택이니 지키려고 노력할 거예요. 제게 또 어떤 선택지가 있겠어요. 그래도 전 제가 좋아하는 남자를 선택했던 게 절대 부끄럽지 않아요.”

    “그만!”

    후작이 책상을 내리쳤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비비안느를 내려다보았음에도 비비안느는 조금도 꼿꼿함을 잃지 않고는 그를 마주 보았다.

    그녀는 본인이 해야 할 말을 할 줄 알았으면서도 물러날 때는 또 그럴 줄 알았다.

    정적 속에서 후작이 입을 열었다.

    “네가 한 말에 대해 용서를 구하거라.”

    “…….”

    “비비안느 메르고빌, 나는 네가 네 잘못을 고치고 용서를 구할 기회를 주는 게다.”

    “한 치의 후회도 없는걸요. 아버지.”

    비비안느는 곱게 웃었다. 꽤 귀한 미소였다.

    본인의 뜻에 미약한 흔들림마저도 없어야만 초연하게 지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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