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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이 시간에 누군가가 올 리가 없는데.
비비안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유년의 추억이 떠올랐다. 매디슨을 처음 만났을 때도 딱 이러했다. 조용한 집에 사용인들이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곧 아래층에서 말소리가 들려온다. 조용히 라디오를 듣고 앉아 있던 비비안느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문 뒤에 서 있을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떼었다.
‘그것도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에.’
현관에 도착했을 때는 그녀의 기억 속 그날처럼 메이드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보이는 건….
에드문드였다.
비비안느는 솔직히 눈을 비비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내는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그가 맞았는데, 오늘만큼은 비에 홀딱 젖어 있었다. 그와 첫 키스를 했을 때도 그는 저런 모습이었다. 그걸 노린 게 아닐까, 하고 의식하니 조금은 야속한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비비안느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냐.
그는 위험했다.
그의 몸을 뒤덮은 빗물처럼, 또는 그의 혈관에 흐르는 피처럼 냉혈한일 것이다.
이렇게 마음이 흔들릴 거면 그를 아예 만나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하필이면 이 저택이 그의 사람으로 가득 차 있어 막을 방법도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로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그녀의 손을 쥐고는 제 목에 흘러내리는 물기를 천천히 훑어 내게 했다. 손목의 맥박이 살갗이 맞닿은 부분으로 옮겨 붙어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동시에 그의 손이 그녀의 맥을 짚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올리고 고개를 기울이자, 그의 얼굴 반쪽이 그녀의 손바닥에 담겼다.
“보고 싶었어, 비비안느.”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의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가 손을 바로 쥐어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에드문드. …아니, 백작님. 백작님께서는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왜?”
에드문드의 말에 비비안느가 손목을 비트는 순간 에드문드가 그녀의 손에 깍지를 껴 두 사람의 손바닥이 맞닿았다. 에드문드의 손은 너무 차가웠고 비비안느의 손바닥은 따뜻했다.
비비안느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반지 돌려 드렸잖아요. 끝인 거고, 양가의 합의란 거 이뤄진 적 없잖아요.”
“네 약혼자가 내 뒤를 쫓고 있다는 건 아나?”
에드문드가 그녀의 손에서 다시 비비안느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피신한 건데.”
“…….”
“날 숨겨 줘야지.”
비비안느는 그녀 앞에 있는 남자의 뻔뻔함에 혀를 내둘렀다. 거절하려고 했지만 이런 빗속에 사람을 쫓아내는 것도 매정해 보였고 그가 이렇게 된 데에는 어느 정도 자신의 책임도 있었기 때문에 매몰차게 쳐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남자와 더 엮이기 싫어서 입만 우물거리며 망설이고 있던 찰나, 그가 이어 말했다.
“나도 널 여러 차례 내 저택에 머물게 하지 않았나? 백작저에서도. 공작저에서도. 그 빌….”
“따라오세요.”
비비안느는 그렇게 말하고는 휙 뒤돌았다. 빌라에서도. 그 말만큼은 에드문드의 입 밖으로 못 나오게 막아야 했다. 이곳에 있는 사용인들이 그 말을 듣고 그의 진짜 정체에 대한 아주 조그마한 힌트라도 얻는 게 꺼려졌기 때문이다.
왜지?
그를 버리고 뤼드빅에게 순응하는 게 제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라는 걸 알았으면서도 막상 선택의 순간이 오자 주저하게 되었다.
비비안느의 걸음을 따라 에드문드가 그녀의 그림자를 밟으며 걸었다. 사용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그들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충실한 집사 하나가 가까운 수화기를 집어 들긴 했으나 체격이 훤칠한 정원사가 그를 막아서고는 손을 붙잡아 수화기를 탁, 하고 내려놓게 했다.
이 저택에 새로 온 지 얼마 안 되는 이였으며 상부의 지시를 받아 저 앞 정원을 설계한 이었다.
왜 그를 들였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던 비비안느는 에드문드가 조금 안쓰럽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의 완전무결했던 위장이 탄로 나게 된 실마리를 본의 아니게 제공하게 된 건 그녀였다.
그래서 그는 지금 본인 말로는, 뤼드빅에게 쫓기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비비안느는 그를 방으로 안내하고는 마른 수건을 건넸다.
그가 몸을 말려야 할 테니 벽난로 앞으로 의자를 직접 낑낑대며 가져다 옮기고 있었는데, 그가 팔자 좋게 그녀의 침대에 가서 누웠다.
물론 시트와 이불이야 갈면 된다지만 그녀는 조금 화가 났다.
그녀의 집에서 이렇게 제멋대로여도 되는 걸까.
그가 담배를 피우려 했지만 담배가 젖어 불이 붙을 리가 없었다. 그 모습에 또 살짝 마음이 약해진 비비안느는 그에게 잠시 기다리라 말하고는 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장식장에서 도수가 높은 브랜디 하나와 모양이 예쁜 글라스를 들고는 다시 에드문드에게로 돌아왔다. 비비안느는 제가 들고 온 것을 건네며 말했다.
“오래 있을 순 없을 거예요. 저도 여기가 제집이면 좋을 텐데 정확하게는 제 아버지 집이라서요.”
그러고는 의자를 직접 옮겨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원래라면 사용인을 시키겠지만 그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그가 요원을 가장했을 때 그녀의 귀족적인 모습에 얼마나 코웃음 쳤는가. 제가 의자 하나를 옮기겠다고 여기에서 사용인을 부르면 반응이야 뻔했다. 그리하여 비비안느는 손수 옮긴 의자에 앉아 에드문드가 독한 알코올로 몸을 데우는 걸 보았다.
“내가 거칠게 대해서 그래?”
그가 브랜디 글라스를 든 채 자신을 바라보았다.
비비안느는 몸을 움찔했다. 저 말이 그와의 첫 관계를 의미하는 건지, 그녀에 대한 그의 태도를 의미하는 건지는 몰랐다. 차라리 그런 이유로 그를 멀리하게 된 거면 얼마나 좋을까.
그가 요원인 줄 알았더니, 그는 요원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백작인 줄 알았더니 그는 오롯이 백작이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제게 무엇을 원하고 온 건지조차 몰랐다.
그때 콜먼 거리에서 처치하는 데 실패한 여자를 다시 한번 노리러 온 건지.
이 순간에도 그녀가 불쌍해서인지. 아니면 그날 백작저 새벽에 불이 붙었던 것처럼 어느 정도의 관심 때문인지.
무엇이든 그녀는 그의 거짓에 더 이상 속지 않으리라.
최소한의 친절만 베풀어 보낸다.
제 속을 읽기라도 한 건지 백작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난 무력해.”
“…….”
허어, 비비안느는 속으로 탄성을 내뱉었다. 뭐가 그의 진짜 얼굴일까.
사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도 네가 필요해서 왔잖아.”
그 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여서 비비안느는 에드문드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있는 그의 곁에 걸터앉아 혹시 다친 곳이 있을까 하고는 그의 베스트를 풀어 확인해 보았다. 셔츠는 깨끗했다. 그의 주머니도 뒤져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주머니를 뒤지는 데 있어선 언제나 부주의하네, 넌.”
그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는 게 위로를 받아야 할 쪽은 그가 아니라 저인 것만 같았다.
정원으로 사람 마음 싱숭생숭하게 해 놓고.
이제는 제 기억 속 요원만이 알 수 있는 말을 제게 하고 있었다.
요원과 헤어진 날 도개교 앞에서 요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는 겁니까. 담뱃불부터, 주머니까지. 케이스가 그쪽 주머니에 없었으면 어쨌으려고. 다른 쪽을 뒤지려는 생각이셨습니까? 이쪽엔 아무것도 없으니 편히 찾을 순 있었겠습니다.”
오뚝한 코끝이 빨개진 채 비비안느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서 그의 어깨를 냅다 힘을 실어서 쳤다. 그의 몸이 단단했기에 아픈 건 그녀 손뿐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제 분에 못 이겨 씩씩대며 말했다.
“…재미있었어요, 그동안?”
“비비안느.”
“재미있었느냐고 물었잖아요.”
“…….”
“다 알고 있었으면서. 제가 당신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었으면서. 그리워했다는 것도 하나같이 다 모르지 않았으면서.”
“비비안느 메르고빌.”
그가 비비안느의 눈물을 훔쳐 주려 했지만 비비안느는 그의 손을 쳐 냈다.
“그러고서는 무슨 염치로 저를 찾아와요?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당신 정말로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
“무슨 말이라도 해 봐요, 좀.”
“내가 미안해. 그러니까 울지 마. 응?”
에드문드의 말에 비비안느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제 손으로 거칠게 눈물을 훔쳐 내고는 더 독해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제가 백작님 침대에서 그쪽 이름 불렀을 때 사실대로 말하기만 했어도 전 용서했을 거예요. 그리웠으니까. 보고 싶었으니까. 하루하루 그 감정이 사무쳐서 미칠 것 같았으니까요.”
“…….”
“그러니까 나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제 앞에 다시 나타난 거고, 절 구한 거라고 말하면 뭐든 용서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땐 제 마음이 약해졌을 때라서 더더욱.”
“그런데 지금은.”
“백작님은 제게 아무것도 아닌 거죠.”
비비안느는 어느 때보다 차갑게 그에게 그 말을 쏟아 냈다.
에드문드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지만 비비안느는 개의치 않고는 말을 이었다.
“다디단 말로, 저를 속이러 와서 절 또다시 없애려 할지도 모르는 무시무시한 남자예요. 그리고 전 제가 한 말은 지켜요. 약혼이든 연애든 백작님과는 하지 않을 거예요.”
“…….”
“우리 서로를 믿지 않잖아요. 백작님도 제게 정체를 이야기했으면 제가 발설할 거라고 생각했으니 아무 말도 안 해 준 거겠죠. 저는 지금도 솔직히 백작님이 저를 그 손으로 죽이실까 봐 두려워요.”
“…….”
“그리고 저는 이렇게 된 당신이 불쌍해요.”
그 말을 내뱉으며 비비안느는 울었다. 속이 후련해서가 아니었다. 정말 그가 불쌍해서도, 아니었다. 정작 그에게 여태껏 가여워 보였던 건 자신이었다는 걸 알아서였다.
이렇게라도 그의 마음을 후벼 파고 싶지만 저 동요 없는 얼굴, 그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보면 오히려 감정적으로 열위에 있는 건 저인 것 같았다.
“나를 사랑하게 된 당신이 불쌍해.”
“…….”
“그래서 진심으로 당신이 망하도록 마음 깊이 빌게요. 내 약혼자가 당신 약점을 찾아내도록.”
일순 비비안느는 자신이 정말 그를 동정하고 있었다면, 또는 제 약혼자가 그에게 응징을 해 주길 바랐으면 이런 말을 했을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뤼드빅 렉스가 그의 뒤를 캐는 데 열중이라는 정보를 넘긴 것 말이었다.
드디어 에드문드가 반응을 하려 하는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울고 있는 그녀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고는 물었다.
“귀엽네. 그런 말버릇은 누구한테 배웠어?”
손으로 눈물 젖은 얼굴을 가리려 했던 비비안느는 고개를 돌려 그의 가슴을 검지로 꾹 누르고는 말했다.
“야.”
“야?”
에드문드가 잘생긴 얼굴로 당치도 않다는 듯 삐딱하게 웃었다.
비비안느는 그 모습까지도 짜증 나서 저보다 여덟 살이나 더 많은 남자, 그것도 암흑가의 수장이라는 사람에게 말을 놓았다.
“그럼 네가 야지 뭐야. 너도 나한테 반말하는데 나도 반말할 수 있지.”
“…….”
“그러니까 잘 들어요, 백작님. 우린 끝났고.”
비비안느의 검지가 에드문드의 단단한 가슴팍 사이를 꾹 눌렀다.
“당신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든.”
다시 한번 콕 하고 눌렀다.
“뭘 하든 혼자 잘 노는 데 쓰세요. 관심 없으니까.”
“…….”
“난 내 약혼자랑 결혼할 거예요.”
정적 속에서 비비안느가 에드문드를 마주 보았다.
에드문드가 침대에 기대어 있고, 그 위로 비비안느의 머리가 에드문드 쪽으로 기울어 그녀의 그림자가 그를 덮고 있는 모양이었다. 비비안느의 머리칼이 그에게 쏟아지는 걸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새 멍이 늘었네.”
“그러니까 저한테 신경 끄세요, 백작님.”
비비안느의 그 말을 들은 에드문드의 눈이 드물게 부드럽게 휘었다. 지금 그의 입가에 걸린 호선을 보면 이카로스나 그의 수하들은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그는 손을 뻗어 제 손가락 관절에서 손등의 끝까지의 단면으로 비비안느의 뺨을 천천히 쓸어 보았다.
고개를 천천히 들어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비비안느는 움찔거렸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슬슬 뒤로 머리를 무르는 그녀에게 다가가 부드러이 입을 맞추었다. 이제는 비비안느가 침대 가에 앉아 있고, 그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술을 머금은 자세가 되었다. 그가 입술을 살짝 떨어트리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다시 다가가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훔쳤다.
그녀의 입술을 몇 번이고 지분거리자 그제야 비비안느는 몸을 떨며 반응했다. 그의 혀끝이 그녀의 입술을 훑어 내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 고른 치열을 간질이자 그녀의 턱이 떨며 벌어졌다.
그러자 그는 기쁘게 저를 깔보던 갸륵한 살덩어리를 찾아 얽어 낼 수 있었다. 그는 느리지만 강렬하게, 마치 뱀이 서서히 몸속의 먹이를 소화해 가듯 그녀를 맛보았다.
서로의 축축한 입 안에서 섞여 나는 위스키 향은 그의 혀끝에서 났던 것일 테고, 달콤한 체리 디저트의 향기는 그녀가 머금고 있던 향기일 것이다.
에드문드의 손이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비비안느는 내내 그의 혀를 피하려 했지만, 결국 잡히고, 비비어지고 속박당했다. 그녀의 입술이 잠시 떨어질 때면 그녀의 입가에서는 ‘흐으.’ 하고 앓는 소리가 떨어져 나왔다. 느껴지는 숨결이 그 어느 때보다 더웠다.
그는 눈을 감고 오랫동안 배를 곯은 걸인인 양 그녀의 입천장, 가지런한 치열, 혀 아래와 볼의 점막을 훑어 냈다. 그녀가 입 속의 살갗이 맞닿은 곳으로 오롯이 느껴졌다.
뤼드빅 렉스, 그러니까 이 여자의 약혼자를 없애는 건 제가 직접 움직이지 않고도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순간들이 그립고도 그리워.
그는 또다시 그녀의 앞에서 미친 짓을 하고.
생전 해 보지 않은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담고.
제 여자가 되바라지게 구는 모습마저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네가 없는 곳은 얼마나 삭막하고 외로울까.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곳에서 그는 하루를 버틸 수 있을지. 아니, 반나절?
그러고 보니 이 여자를 태운 랭스턴 리무진이 콜먼 거리에서 폭발했을 때 비슷한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있었다. 망설임도 없이 제 머리에 총구를 가져다 댄 기억이 떠올랐다. 시가도 향을 잃었고 알코올도 그의 정신을 이만큼 기분 좋게 적시고 물들이지 못했다.
이 여자가 그런 시간들을 내내 버텨 왔을 거라 생각하니 그의 가슴에 물밀 듯 감정이 치밀었다.
그래, 감정.
그는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그녀의 숨이 가빠지고 입이 맞닿은 것을 그녀가 버거워하고 있다는 걸 슬슬 느꼈을 때.
에드문드는 그녀에게서 몸을 천천히 물리고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비비안느를 훑었다.
저 얼굴을 보니 모든 게 명백해졌다. 그에게 여태껏 없었던 단 하나가 뭐였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건 그의 세상을 구성하는 무언가였다. 그의 삶을 바꿔 놓은 빛이었다. 이런 온기였다.
그쯤 생각을 마친 에드문드는 그녀의 이마에 제 입술을 눌러 보았다. 간지러워하는 그녀의 눈에도, 코에도, 턱에도 볼에도 입을 맞추다 다시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이듯 훑었다.
그러면서 그는 나직이 그녀의 이름을 속으로 불러 보았다.
비비안느 메르고빌.
“…전 절대로 백작님 믿지 않을 거예요.”
내 여자.
“절대로. 이런다고 무언가가 바뀔 거라고 기대하는 거라면… 흡.”
내 결핍,
내 감정이라는 구원.
같은 시각, 귀족원 의장 관저.
“무엇이 암흑가 놈들을 망하게 만드는 줄 아십니까.”
응접실 원탁을 둘러싸고 앉은 모두의 시선이 뤼드빅에게로 향해 있었다. 메르고빌 후작 부처와, 평가하는 눈으로 제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귀족원 의장 그리고 그의 아내와 비서관까지. 뤼드빅의 말이 이어졌다.
“여자. 돈. 갱(gang)들의 내전이라 생각하셨다면 틀렸습니다.”
그의 뒤로 그의 비서가 걸어 나와 그의 위스키 글라스를 채워 주었다. 뤼드빅은 글라스를 들어 목을 축이고는 이어 말했다.
“세금입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메르고빌 후작 부처의 배회하는 시선이 서로를 담았다. 오직 귀족원의 의장만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제 사생아를 바라보았다.
뤼드빅이 말을 이었다.
“신대륙의 강대국에서 수많은 갱의 보스들이 잡혀가게 된 것도 다름 아닌 탈세 문제였으니까요. 피의 복수와 침묵의 규율도 그 앞에 무용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사업을 철저하게 운영하든, 결국 세금 문제를 해결할 머리가 없어 덜미가 잡히는 겁니다.”
“…….”
“에드문드 콜트 백작이 조직의 고문 변호사 이카로스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그의 전 주인이었던 신대륙 암흑가 보스의 세금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다지요. 그래서 현재 그 갱의 보스만이 살아남아 신대륙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드문드 콜트 백작이 신대륙 보스의 대자(代子)이지요. 아마도 여배우 일도 그자가 해결해 주었을 겁니다. 영화계에 인맥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귀족원 의장, 즉 뤼드빅 렉스의 아버지가 팔짱을 낀 채 뤼드빅에게 물었다.
“백작이 그 세력을 기반으로 해 다아트로에서 ‘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예. 백작이 일했던 투자 은행은 신대륙에서 가장 저명하던 곳이었습니다. 현금의 흐름을 보기에 적합한 곳이지요. 방위 산업의 이면을 이용해 단기간에 빠른 돈을 벌어 낼 수 있다는 걸 본 겁니다.”
“그때가 1924년쯤이겠군.”
“그렇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1925년에 제국이 국가 부채로 허덕이고 신민들은 징세법에 시달릴 때, 백작은 그때가 사업을 시작할 적기라는 걸 알았겠죠. 듣기론 백작은 신대륙에서 이카로스와 그의 변호사 무리들과 함께 사교 파티에서 인맥을 쌓았답니다.”
그쯤 들은 귀족원 의장은 보고서를 넘겨 에드문드 콜트와 그의 세력들이 접근한 인물들의 이름을 훑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군수업계의 거물들이군.”
“예. 우리 다아트로 제국이 내수용으로도, 수출용으로도 총기를 만드는 걸 금하고 있다는 걸 말하고 다녔답니다. 그리고 그들의 총기를 수출해 줄 수 있다고도 했죠. 로비 경쟁에서 밀린 이들에게는 이보다도 더 달콤한 말은 없었을 겁니다.”
“총을 파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작자들이었으니까.”
의장이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뤼드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타깃은 경쟁에서 밀려난 군소 회사들. 콜트 백작은 투자 은행에서 일하며 쌓은 인맥으로 회사의 중역들에 자신의 사람들을 접근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우리가 아는 대로겠군. 그 당시 다아트로의 내각은 암흑가 세력이 성장하려 하면 거리 청소를 해 그 쓰레기들을 쓸어 버렸다. 하지만 그 무질서와 혼돈에 콜트 백작이 개입하셨고.”
의장이 이어 말했다.
“시기도 마침 딱 맞아떨어지는군.”
거기까지 의장과 렉스가 차남의 대화를 들은 메르고빌 후작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자신의 딸아이가 어떤 남자와 바깥에서 뒹굴고 왔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탁자 아래로 손을 꽉 말아 쥐었다. 그 변화를 눈치챘는지, 후작 부인이 그의 무릎에 놓인 손을 덮어 주었다.
메르고빌 후작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는 절대. 단연코 그 백작과 자신의 딸아이가 잘되는 꼴을 볼 생각이 없었다. 듣지 않는다면 어렸을 때처럼 훈육해서라도 옳은 길로 되돌려 놓을 생각이었다.
“아, 미안하게 됐소. 내 잠시 그대들을 잊고 있었군.”
때마침 의장이 고개를 돌려 사돈이 될 메르고빌 후작 부처를 바라보았다.
대답을 한 것은 메르고빌 후작이었다.
“아닙니다, 의장. 약혼을 유지하기 위해 이 자리에 불러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지요.”
“천만에. 그대의 딸 덕분에 내 아들이 이 나라의 영원한 난제를 풀어내지 않았나.”
의장이 그렇게 말하고서는 껄껄 웃었지만, 듣고 있는 메르고빌 후작의 표정은 전혀 편해 보이지 않았다.
저 노회한 여우 같으니라고.
그는 자신의 딸이 혼전에 다른 남자와 어울렸다는 사실을 꼬집으며 동시에 제 아들을 추켜세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후작은 귀족이었기에 점잖게 말했다.
“아닙니다. 위대한 렉스 일가의 복수에 도움이 되었다니 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허허, 이렇게 양 가문이 서로를 아끼는데 굳이 사돈으로 남지 않을 이유가 있나. 그렇지 않나요, 메르고빌 후작 부인?”
“…그렇지요.”
후작 부인이 냉한 목소리로 답했다. 의장은 자못 시원시원한 기색으로 회동을 일단락 지었다.
“그럼 더 이야기할 것도 없겠네만. 이렇게 훌륭한 아들이니 후작 부처께서는 열린 마음으로 받아 주실 거라 믿겠소. 내 그래도 되겠는지.”
메르고빌 후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앞서 언급한 이유로 더 이상 제 아들에게 자존심 세우려는 태도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후작은 백기를 꺼내 들었다.
“제 언약을 받으셨습니다, 의장.”
“고맙네.”
그렇게 말한 그는 제 비서관과 함께 응접실의 문 뒤로 사라졌다.
“장인어른, 장모님.”
목소리에 그들의 시선이 다시 뤼드빅에게로 향했다.
그가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는 사위로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