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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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비안느는 머지 않은 곳에 앉아서 식사를 하던 매디슨과 다니엘을 찾아, 그들에게 먼저 일어나 보겠다고 말한 뒤 승무원의 안내를 받아 선박의 휴게실로 향했다. 에드문드가 그녀와 함께 움직였다.

    끝이 없어 보이는 정찬장을 걸으면 양 갈래로 갈라진 층계가 나오는데, 거길 걸어 올라가면 손님들이 잠시 머무를 수 있는 방들이 나열된 통로로 이어졌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비비안느는 배의 크기와 규모를 설명하는 승무원의 이야기를 들었다. 현재 같은 회사의 정기선(Ocean liner)과 군함을 제하면 이 크루즈가 가장 큰 선박이라며. 또한 이 배의 주인이 이 배를 만든 선박 회사의 오너라는 것도 말해 주었다.

    비비안느는 에드문드를 의식하고 싶지 않았기에 더더욱 설명에 집중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휴게실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통로를 따라 끝없이 방이 늘어선 걸로 보였는데, 문을 열어 봤더니 눈부실 정도로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비비안느는 이런 방이 이곳에 차고 넘친다는 사실에 내심 감탄했다. 승무원은 차를 내와도 괜찮은지 물었고 비비안느는 고개를 저었다. 금방 나갈 거라 말해 주었다.

    에드문드는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비비안느는 소파 사이에 있는 재떨이를 한 번, 에드문드를 한 번 보고는 그와 마주 앉았다.

    “백작저에서 떠난 이후로 다시 연락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비비안느는 다소곳하게 앉은 채 허리를 곱게 펴 무릎에는 두 손을 올려놓고는 말했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을 가진 뒤 백작님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기로 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왜, 만나 보니까 나보다는 아까 그 공군 장교가 눈에 들어오셨나.”

    에드문드가 기다렸다는 듯 물어 왔다. 그가 한쪽 눈썹을 끌어 올리고는 턱을 살짝 치켜든 채 말했다.

    “네 다니엘이 그 종군 기자랑 같이 헬기라도 태워 준다고 해서? 자유 좋아하는 아가씨니까 환기도 될 테고 기분 전환도 되고.”

    “아뇨. 당신 때문이잖아요.”

    그 말에 에드문드의 얼굴에 서린 표정이 사그라들었다. 비비안느는 이었다.

    “그리고 네, 그러면 좋겠네요. 다니엘이 제게 친절을 베풀어서 매디슨이랑 같이 헬리콥터도 한번 타 볼 수 있었으면.”

    “내 전용기가 있는데 왜 그놈 헬리콥터를 타.”

    “제 아버지는 속물일지 몰라도 저는 안 그래요. 제가 언제 백작님한테 원하는 게 돈이었어요?”

    “그러면.”

    에드문드가 시선을 내려 그의 쪽으로 내밀리는 보석 상자를 바라보았다. 상자가 그의 쪽에 닿자 비비안느는 손을 거두어 몸을 바로 했다. 그런 그녀에게 에드문드는 말했다.

    “그러면 뭘 원하는지 말해 주셔야지. 그래야 가져다 드리지.”

    “앞으로 어떻게든 얽히지 않는 거요. 저희 일,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아 주시는 거요.”

    “아니.”

    에드문드는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내가 널, 진짜 귀족으로 만들어 줄게.”

    그 말에 비비안느는 움찔했다. ‘진짜 귀족’. 그 말을 곱씹는 비비안느의 얼굴에 허탈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녀는 울음을 참아 내려 애써야 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진짜 귀족이란 뭘까.

    아마도 매디슨이 말한 것처럼 이런 파티도 열어 사람들에게 베풀 줄 아는 재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니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혼해 주겠다는 말일 테고.

    언젠가 뤼드빅이 말했던 조롱조의 말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불쌍한 비비안느 메르고빌. 네가 얼마나 불쌍하면 너를 살려 놓았을까.”

    지금도 그는 자신이 불쌍해 견디지 못할 지경인 모양이었다.

    그쯤 생각했을 뿐인데 볼 쪽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왼 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에드문드의 표정이 오묘하게 진지해졌다.

    “상관없어요. 제가 백작님 앞에서 진짜 귀족이었던 적이 없는데, 제게 중요하지도 않은 온갖 사람들에게 그렇게 비치는 게 무슨 상관인가요.”

    비비안느는 감정을 억누르려 하며 말했다.

    “그런 찬사는 애초에 제 삶에 필요했던 적이 없었어요. 빈껍데기 같은 삶을 살았어요. 더 살게 해 준다고 제가 감사해할 리가 없잖아요.”

    집을 나서던 날.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한 사교계를 벗어나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삶에서 받는 가짜 인정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알았다.

    “그러니까, 부디. 저를 내버려 두셨으면 좋겠어요. 지금 당장부터요. 백작님을 이만큼 견뎌 줬으니 이제 가셨으면 해요.”

    비비안느의 말이 끝나자 에드문드가 소파에 기댄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나 했더니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인 것이었다.

    “네가 가야지.”

    비비안느, 하고 이어 말하는 그의 무릎에 놓인 팔 끝에 담배가 타 매캐한 연기를 흘렸다.

    “이건 내 배니까.”

    “…….”

    “이 외에도 그 공군 장교가 몰고 다닐 헬기나, 이 나라의 온갖 무기부터 군수 물자까지 모두 내가 소유하거나 지분을 보유한 회사들에서 나는 거일 텐데. 지금 나는 너한텐 네 입맛에 맞는 내 유일한 무기를 주겠다는 거잖아.”

    그 말을 마친 그가 제 버클을 두 번 치자 비비안느의 얼굴이 붉어졌다.

    에드문드가 이었다.

    “네가 정말 원하는 게 렉스가의 차남이었나?”

    비비안느는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무릎 위의 손을 말아 쥐다가 답했다.

    흔들리지 마, 비비안느. 이 남자를 버려야 해.

    “네.”

    “…….”

    “그 점만큼은 잘 이해해 주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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