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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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답니다, 백작님.”

    비비안느는 대답하며 포크를 줍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그러기도 전에 승무원이 다가와 포크를 교체해 주었다.

    괜히 작년 생일날 바깥에 잠시 나간 것으로 이런 습관이 붙었다는 걸 의식한 비비안느의 뺨이 부끄러움으로 잠시 붉어졌다.

    “친구분이랑 재미있어 보이시길래.”

    에드문드의 말에 비비안느는 몸가짐을 바로 했다.

    “네. 사려 깊은 주최자분이 매디슨의 동료 기자들을 초대해 주신 탓이죠. 덕분에 옛 친구도 만나고 즐거운 시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네.”

    어느새 끝이 짧아져 있는 에드문드의 말에 비비안느의 미간이 미세히 구겨졌다.

    하지만 비비안느는 개의치 않고 금방 완벽한 예법으로 에드문드의 앞에서 식사를 이어 나갔다. 이러한 모습은 그녀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에게 증명해 줄 것이다.

    비비안느는 그 생각으로 복잡한 머리를 가라앉히며 다른 말로 화제를 바꿔 보려 노력했다.

    “이 파티, 부부 동반이라던데요.”

    그는 누구와 함께 왔는지 물어보려는 참이었다.

    그러기도 전에 에드문드가 말했다.

    “이런 파티는 그렇게 설계하지 않으면 으레 난잡해지기 마련이어서.”

    “…….”

    비비안느는 ‘난잡’이라는 말을 너무 깊게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무슨 말을 하든 다 그의 저택의 침대에서 있었던 생각으로 이어진다는 게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비비안느의 시선이 옮겨 간 건 접시 위의 음식을 먹기 시작한 에드문드의 손목 쪽이었다.

    물론 그녀와 한 쌍처럼 어울리는 그의 완벽한 식사 매너 또한 주목할 만한 점이었지만,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그의 커프스단추였다.

    “그건 어디에서 난 건가요?”

    비비안느의 말에 에드문드가 고개를 들어 그녀 자신을 마주 보았다.

    비비안느의 시선이 잠시 에드문드를 피했지만, 그녀는 다시 용기 있게 그를 본 다음 한 번 더 말했다.

    “그 커프스단추요.”

    “샀어요. 왜?”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돌아왔다. 비비안느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잖아요.”

    그러면서 비비안느는 언젠가 랭스턴 리무진에서 하비 카네 콜, 제도의 지부장에게 해 주었던 말을 기억했다.

    “장인이 정교하게 세공한 로얄 블루 사파이어 위에, 상아를 조각해 그 위에 올린 제국에 몇 없는 거예요. 플레이트로는 순은을 썼죠.”

    저건 보석 위의 상아를 갈아 내 광을 내었단 점에서 그녀가 선물했을 때와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도 가문의 보석 정도는 알아보았다.

    저건 그녀가 그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이걸 차고 온 거면 이곳에서 저를 만날 거라는 걸 예상했다는 거고, 제가 누구와 함께 올 거라는 것까지 읽은 거면 이 사람은 뤼드빅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아는구나.’

    사내는 비비안느 자신이 여태껏 연락하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제 것을 되찾으러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의 목적을 더 알기 위해서는 그의 네 번째 손가락만 봐도 충분했다.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저 반지는 그녀가 그의 품에 안겼던 백작저에서의 새벽, 그가 그녀와 함께 나눠 낀 반지였다. 그는 이 순간까지도 그 반지를 계속 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데에 서슴지 않는 오만한 자태를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요원 행세를 했으나 진짜로 요원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생각했던 선하고 사려 깊으며 말투만 빼고 상냥한 남자는 그의 위장이자 그녀의 환상일 뿐이었다.

    그가 그녀의 구원자라 여태껏 믿었던 건 어쩌면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싶었던, 또는 그때 그 잠깐의 순간들을 그리워했던 마음이었을 뿐.

    그리고 만약 그의 정체가 그녀가 생각하는 것과 일치한다면.

    비비안느는 백작저에서 그에게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암흑가 수장에 대해 한 말이었다.

    “그 사람을 만날 거에요.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가족도, 오빠도 다 버릴 수 있다고 달콤한 말로 꾈 거예요.”

    “그다음엔.”

    “죽일 거예요.”

    비비안느는 멍한 눈빛으로 음식을 바라보았다.

    기긱, 하고 음식 옆으로 움직인 포크가 기괴한 소리를 냈다.

    상념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손으로 직접.”

    손에서 놓친 포크가 이번에는 테이블 위에 나동그라졌다. 에드문드의 시선이 비비안느의 손으로 향했다.

    비비안느는 어디 다른 곳이라도 대피해 숨을 몰아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 또한 알았다. 그에게, 그에게 그녀가 모든 걸 안다는 걸 내색해서는 안 된다.

    그는 물론 이 모든 걸 알고 있고. 그녀가 왜 연락하지 않았는지도, 그걸 비롯한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 그 사실이 피차 입 밖으로 꺼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그러면서도 참 역설적이게도 그가 끌렸다. 그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 깊은 곳에 아주 작은 안도가 싹터 있었다.

    물론 그가 그녀를 기만하고 진심을 비웃은 이였다 하더라도 그러했다.

    그에게서 요원을 보는 걸 내내 죄스러워했던 그녀였다.

    그는 그 모든 걸 알았으면서 제 사업을 지키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 남자인데도 그가 막상 제 앞에 있다고 하니 미칠 것 같았다.

    이 남자가 백작의 신분으로 나타나 그녀를 원했던 모습들을 생각하자면 꼭 요원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보답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아냐.’

    비비안느는 다시 포크를 쥐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경계를 풀어서는 곤란했다.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믿는 이유가 있습니까?”

    에드문드의 말이 이어졌다. 그가 부연하듯 이었다.

    “이 커프스단추를 내가 샀다고 한 말에 관해서 말입니다.”

    “…….”

    비비안느는 답하지 못했다. 그러면 그에게 그녀가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하게 될 것이다. 에드문드의 말이 이어졌다.

    “장인어른 되실 후작 각하께서 부유한 사윗감을 선호한다 하셔서, 신경 써 보았는데 왜. 내 말이 거짓일 것 같습니까. 그러면 이유도 같이 말해 줘야지.”

    비비안느는 울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방금까지 그녀가 그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말, 이를테면 저 커프스는 그녀가 요원에게 선물해 준 것이라는 말을 하면 안 되는 이유를 생각했었다.

    비비안느는 시선을 음식 쪽으로 옮기고는 항복을 선언했다.

    “제가 잘못 보았나 봐요. 백작님께서 거짓말을 했다는 의도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봐야지.”

    “…….”

    “우리, 끝났습니까?”

    그가 테이블 너머에서 물어 왔다. 비비안느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고 있는 포셰트를 소중하게 꽉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그에게 말했다.

    “반지는 조용한 곳에서 돌려 드릴게요. 여기서는 보는 눈이 너무 많고, 괜히 언론가 관심을 끌지 않고 싶어서요. 아까 들으셨겠지만 여기는 매디슨의 동료 기자들이 많아요. 주최자가 화제성을 노리고 초대한 인물이겠죠.”

    “아닐 텐데.”

    비딱한 그의 목소리가 돌아오자, 비비안느는 ‘당신이 뭘 아시냐.’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가 기세에 밀려 그만두었다. 그가 이어서 그녀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화제성 때문에만 초대한 건 아닐 거라고.”

    비비안느는 그녀가 이곳에서 매디슨을 만난 것, 그리고 한즈버리 부인에게 설욕한 것 따위를 떠올렸지만 굳이 에드문드의 말과 연관 짓지 않으려 하며 말했다.

    “네. 백작님께서 그렇다고 말하면 그러신 거겠죠.”

    비비안느는 식기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세요. 조용히 반지를 돌려 드릴 만한 휴게실이 있을 거예요.”

    “약혼이 싫으면, 연애는 어떻습니까.”

    그 말에 비비안느가 멈춰 섰다. 연애. 그와 연애하는 자신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가슴이 뛰었다.

    그가 요원이었을 때 그녀는 그에게 신세를 지는 영애였고, 그가 백작이었을 때 그녀는 그의 오점이 될 여자. 그의 집에 피신해 있는 객식구였다. 그가 암흑가 보스였을 때 그녀 자신은 그가 처리해야 할 타깃이었을 것이고.

    그런데 그와 연애라니.

    연인 사이라면 평범하게 입을 맞추고, 아침에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것도.

    좋은 날에는 손을 잡고 나란히 걸으며 상대한테서 똑같은 마음을 돌려받는 것도.

    오랜 시간 동안 대화도 나누고, 그러다 잠잘 때쯤 이마에 키스를 받는 것도 그에게 바랄 수 있었다.

    그 연애를 그가 그녀 자신과 함께하자고 말한다.

    그는 이토록 그녀의 마음 중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릴 줄 알았다.

    뤼드빅의 말대로 약혼을 이어 나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그로부터 멀어져 이런 것들을 평생 모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기어코 그녀의 삶에 쳐들어와 평화를 부수어 놓을 생각인 듯 보였다.

    한 번도 먼저 내비쳐 주지 않은 애정을, 그녀의 몸을 향한 게 아니라 그녀 본인에 대한 관심을 내비쳐 준다면 당연히 듣는 사람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는가.

    당신은 사람 마음을, 아니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는 게 쉬워요?

    그녀는 속마음을 내리누르고 에드문드를 최대한 가라앉은 눈으로 보려 애썼다.

    “뤼드빅 렉스와 약혼을 이어 나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죄송하지만 제게는 백작님과 연애도, 약혼도 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요. 말했듯이 저는 귀족이고, 그래서 절차가 중요해요. 제 약혼에 백작님은 흠만 될 뿐일 거예요.”

    그러거나 말거나 에드문드는 테이블에 곱게 접힌 냅킨을 들어 거침없이 손을 닦았다. 그녀의 말은 듣지도 않았다는 태도로 말했다.

    “그래도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 겁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푸른 눈으로 맞은편에 서 있는 비비안느를 훑었다.

    “다시 보게 만들 겁니다.”

    “…….”

    “내가 좋아하니까.”

    그녀의 마음을 흔들기 위함일 뿐, 아무런 감정 없는 말이라는 걸 비비안느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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