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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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비안느와 일행은 부러 드넓은 정찬장의 가에 앉아 소음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그럼에도 그 넓은 정찬장을 가로질러 온 승무원들이 그녀의 주위에 와서 음식을 날라 주었다.

    비비안느는 무의식적으로 옆을 봤다가 자신의 시선 하나로 다니엘이 식사 매너를 엄청 의식하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행동 하나하나에 힘이 들어간 게 느껴졌다.

    그녀의 귀족적인 자태는 사람들에게 가끔 위압처럼 느껴지긴 했다. 비비안느는 괜히 미안해져서 매디슨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매디슨은 정말 잘 먹었다.

    화제는 언젠가 전장으로 넘어가 비비안느는 정말 할 말이 없어졌다.

    가끔 웃으며 호응하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차, 세 사람의 고개가 들려 앞으로 향했다.

    “실례합니다.”

    그 사내를 훑는 비비안느의 표정이 굳었다.

    “익숙한 얼굴이라 찾아오게 되었는데, 합석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에드문드, 그러니까 콜트 백작의 시선이 비비안느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비비안느는 요원과의 추억이 기만당한 후 모든 걸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다.

    저 남자를 버리겠다고 생각했는데, 왜 저 남자 앞에서만큼은 귀족가 레이디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꼭 백작을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며 말했다.

    “물론이죠, 콜트 백작. 앉으세요.”

    “마지막으로 뵌 후로 연락이 없으셔서.”

    그의 진득한 시선이 비비안느에게로 향하자 비비안느는 말을 돌렸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죠.”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벌떡 하고 솟구치듯 일어났다.

    “아뇨, 아뇨. 지금 하세요. 야. 눈치 없이 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 다니엘.”

    매디슨이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청년 장교의 팔을 잡아끌고 걸음을 옮기니 이 원탁에는 두 사람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비비안느는 다시 숨 막힐 것 같은 공기 속으로 돌아왔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가 단정하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절대 정중하지 않은 존대라는 걸 알았다.

    “그럼요. 약혼반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지니 제가 그때 얼마나 무모했었는지 알 것….”

    비비안느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에드문드가 말을 잘라먹었다.

    “저분이 메이브리엄 거리 86번지에 사는 매디슨이로군요.”

    “그렇답니….”

    비비안느는 이번에도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이렇게 그녀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요원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작년 생일날 가출했을 때 저와 요원은 함께 매디슨의 하숙집을 찾아갔었다.

    그때 비비안느는 그 하숙집 앞에 놓인 공중전화로 괜히 매디슨에게 전화했었다. 그리고 연결음이 그치자마자 재빨리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 추억을 회상하는 순간 비비안느의 포크가 챙,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가 식탁에서 긴장할 때만 저지르는 실수였다.

    비비안느는 어느새 제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걸 깨달았다.

    그는 이미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어느 정도 유추하고, 그를 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걸까.

    포식자는 피식자의 생각을 한 수 앞서 읽고 사냥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냐.

    그냥 하는 말일 수도 있지. 비비안느는 태연해지려 노력했다.

    더 알아서 다치고 싶지도 않고, 머리 아프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그녀 자신의 삶을 더 망치게 두고 싶지 않았다.

    에드문드는 맞은편에 앉은 비비안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녀를 연회장의 문 앞에서 발견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녀의 이름이 동행과 함께 불렸지만 그 순간 모두의 주목을 받는 건 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향했다.

    대부분은 놀란 눈이었다. 마지막으로 비비안느 메르고빌을 눈에 담은 게 그녀의 약혼 발표 연회였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과 같이 그날 그녀는 뤼드빅 렉스의 약혼자로서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그때 그녀는 못 먹어 몸이 앙상해져 있었고, 맞지도 않는 호화로운 드레스를 어색하게 입고는 위태롭게 걸음을 옮겼다.

    그때는 그 여자를 제 먹잇감처럼 쳐다보던 사람들이, 이제는 경외의 빛을 담고 보았다.

    제가 명성과 건강을 원래대로 회복하게 도운 뒤의 비비안느 메르고빌은 다시 한번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귀족가 레이디가 되었으니까.

    정작 본인은 그걸 모르는지 무심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래도 이런 시선에 익숙해 오늘 상황마저도 당연하게 여긴 모양이었다.

    어울릴 사람을 찾고 있던 비비안느의 앞에 노란 드레스의 귀부인이 나타났다.

    에드문드는 그녀가 비비안느를 약혼 발표 연회에서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또한 그의 시선은 비비안느만을 향하고 있었으니, 그 노란 드레스… 그러니까 한즈버리 부인이 한 말이 아직까지 생생했다.

    “지금 이게 무슨 무례죠?”

    그래, 비비안느 메르고빌은 파티의 주최자였음에도 상대의 언성 높인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의 상념 속에서 한즈버리 부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교양 있고 우아한 레이디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어요. 이제 보니 칠칠치 못한 게 거리의 평민보다도 못한 분이셨군요.”

    그때, 그는 무어라 생각했는가?

    에드문드는 느긋하게 그날 보았던 비비안느의 처진 어깨를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그 어깨를 보며 그는 말없이 마음속으로 뇌까렸었다.

    상처받았어, 메르고빌?

    그의 시선이 상념에서 벗어나 다시 한번 비비안느와 한즈버리 부인의 대치를 바라보았다.

    “어머, 비비안느 영애. 우리 그날 영애의 약혼 발표 연회에서 만난 것 같은데. 이렇게 다시 만나네요. 약혼자가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받았다면서요. 그 뒤로 다시 잘된 모양이네?”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는 거더라고요.”

    “어휴, 잘됐어요. 잘됐어.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두 사람 모두 오해할 뻔했지 뭐야? 편지도. 그 여배우 사건도. 다 아무것도 아니었잖아. 미안해서 어째요, 영애.”

    명백히 상대 쪽이 꼬리를 내리고 살랑거리는 투였다. 그의 생각을 증명하듯 비비안느를 향한 한즈버리 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면 오늘 같이 어울릴래요? 영애 약혼자는 바쁜 것 같은데.”

    “괜찮아요. 그래도 제안은 감사합니다.”

    그는 이 모든 장면을 한 편의 블랙 코미디라도 된 양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가 비비안느의 약혼 발표 연회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했던 말을 다시 곱씹었다.

    인간은 원래 다 그래.

    그리고 덧없이도 쉽게 변해 버린다.

    이 모든 순간을 설계하고 실행에 옮길 시간과 비용을 조금만 투자하면 될 일이었다.

    에드문드는 앞으로 나아가려다가 비비안느가 제 옛 친구들을 만나는 모습을 보고는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메이브리엄 거리 86번지에 사는 친구 또한 초대했었다. 이름이 매디슨 파커라고 했었나. 그녀를 발견한 비비안느의 얼굴에 화색이 어리는 걸 보고 그는 이곳에 가만히 있겠다는 판단을 고수하기로 했다.

    최근에 경시청에서 보고받기로 비비안느가 경시청에서 집에 귀가하는 길에 매디슨 파커가 사는 하숙집에 들렀다고 했다. 하지만 차창 밖에서 바라보기만 할 뿐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가 무엇에 주저하는지는 비비안느만 알겠지만,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니 만나게 해 준 보람이 있었다.

    비비안느 메르고빌은 언젠가부터, 아니. 정확하게는 그가 그녀의 삶에 개입한 순간부터 웃음을 잃고는 영화배우 같은 가짜 웃음을 짓곤 했으니까.

    그녀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그 순간, 그의 뇌리에 이런 생각이 스쳤다. 저를 보는 비비안느가 저렇게 웃을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 일었다.

    그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미 그녀가 그에게 남기고 간 사랑이라는 감정마저도 아직 생경할 따름이었다.

    그의 시선은 줄곧 비비안느를 좇았다. 비비안느는 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자리를 옮겨 선박 내 정찬장으로 향했다. 에드문드는 제 옆에서 성가시게 말을 걸어오는 작자들을 두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를 반기는 다른 테이블에 앉아 비비안느가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주변 사람을 의식하는 것도 보고, 비비안느의 곁에 앉은 공군 장교가 설렘이 담긴 눈으로 비비안느를 훑으면서 조금이라도 단정하게 식사하려는 태도 또한 웃으며 바라보았다.

    물론 비비안느 메르고빌은 그 장교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비비안느의 미소 또한 감상하는 걸 마친 그는 느른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비비안느 앞으로 걸어갔다.

    제 여자는 체면을 차리는 걸 좋아했으므로 정중하게 공대하는 것을 그는 물론 잊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익숙한 얼굴이라 찾아오게 되었는데, 합석해도 괜찮겠습니까?”

    그의 말에 그녀는 꼭 자신을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며 말했다.

    “물론이죠, 콜트 백작. 앉으세요.”

    마지막으로 뵌 후로 연락이 없으셔서.”

    비비안느가 백작저에 발을 들인 날, 그녀를 품은 건 자신이었지만 그날 새벽 자신을 가진 건 비비안느였다. 그래 놓고선 저 여자는 집에 돌아가겠다며 자신의 자비를 구했다.

    그 요청에 응한 건 그의 실수였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그에게 먼저 연락하거나 찾아오기는커녕 제 약혼자와 함께 경시청에서 귀여운 소동을 벌여 제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보려 했으니까.

    그의 짐작이 맞았는지 비비안느가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그 얘기는 나중에 하죠.”

    “아뇨, 아뇨. 지금 하세요. 야. 눈치 없이 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 다니엘.”

    비비안느의 친구 매디슨 파커는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는지,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공군 장교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자리에 그녀와 저, 두 사람밖에 남지 않게 되자 비비안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때 승무원이 내어 온 와인 잔을 쥔 그의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는 그 정적 속에서 비비안느에게 많은 것이 담긴 한마디를 건넸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요. 약혼반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지니 제가 그때 얼마나 무모했었는지 알 것….”

    “저분이 메이브리엄 거리 86번지에 사는 매디슨이로군요.”

    “그렇답니….”

    비비안느의 표정을 보니 모든 게 명백했다. 그의 짐작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비록 그날, 그가 제도의 지부장을 시켜 경시청에서 뤼드빅을 꺼내어 그녀를 해방시켰지만.

    그녀는 제 모든 걸 알게 되었고 그렇기에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그래도 그는 제 여자를 곁에 둘 방법을 알고 있었다.

    에드문드 자신이 사치를 하면 그녀의 약혼자, 뤼드빅 렉스는 그의 정체를 추적하고자 찾아올 것이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집요하게 현금 흐름을 추적하고자 따라붙을 텐데, 비비안느가 그 곁에 있을 테니 에드문드는 그렇게라도 그녀를 가질 생각이었다.

    비비안느 메르고빌이 자신에게 마음을 돌릴 때까지.

    어떻게든 나쁜 소식은 전하는 쪽이 욕보이기 마련이니, 그 과정에서 비비안느 메르고빌이 뤼드빅 렉스한테 이골이 나는 것도 썩 나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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