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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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족원 의장 관저.

    “우리 결혼할래요?”

    뤼드빅은 그로부터 며칠 뒤 자신을 찾아온 비비안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담배를 태웠다. 꿈이 아니라 저 말을 하고 있는 건 정말 비비안느 메르고빌이었다. 그녀는 까만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로 넘기고, 힐을 신은 두 다리를 오른쪽으로 모아 두고 있었다.

    뤼드빅은 그 다리를 훑다 그녀의 눈을 보고는 말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안기느니 차라리 암흑가 수장에게 가서 아양을 떨겠다며. 생각 바뀌었어?”

    “돈 베칼로네보다는 그쪽이 더 젊고 잘생긴 것 같아서요.”

    에드문드가 암흑가의 수장일 수도 있다는 말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저번에 그의 계획이 실패한 걸 꼬집는 말이기도 했다.

    “기어오르네, 메르고빌. 그러면 내가 널 귀엽게 봐 줄 거라고 생각했나?”

    뤼드빅은 이어 말했다.

    “그래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앞으로 네 백작님이 암흑가 수장이라는 사실이 수면에 드러나는 게 무서워졌다. 내가 네 백작을 노리는 게 무서워졌다. 그래서 나랑 결혼해서라도 진실을 외면하고 네 백작님을 지키고 싶어졌다. 그거잖아.”

    뤼드빅의 말에 비비안느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이곳에 와서 이 말을 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필요했으나 상대는 금방 그녀의 의도를 파악했다.

    “넌 지금까지도 네 남자 생각뿐이네. 이런 네가 내 눈엔 얼마나 사랑스럽겠어. 그런데 결혼해 달라고.”

    “…….”

    “할 말 있으면 해 봐. 그 예쁜 입 두었다가 어디다 쓰게.”

    뤼드빅의 말에 비비안느는 숨을 골랐다. 단정한 스커트 위에 긴장해서 떨리는 손을 모으고는 차분히 말했다.

    “그쪽도 제가 필요하잖아요.”

    비비안느의 시선이 뤼드빅에게로 향했다. 그가 빙글빙글 웃고 있다는 게 그녀는 더 무서웠지만 그래도 생각했던 바를 또박또박 이어서 말 해내었다.

    “저번에 경시청에서 한 ‘실험’으로 암흑가 세력이랑은 이제 눈물겨운 결별을 하신 것 같은데, 아버지께 버림받지 않으시려면 뭐. 정치하셔야겠죠. 그러려면 작위도 필요하실 거니까요.”

    “…….”

    “많은 거 바라지 않아요. 잘 먹여 주시고 재워 주시면 돼요. 그러니까 결혼해요. 경시청에 있는 오빠는 작위가 필요하지 않을 테니, 오빠가 작위를 포기하면 제 남편이 될 그쪽이 후작위를 이어받는 거예요. 여자는 지금처럼 나가서 만나도 상관없어요. 후계는 꼭 제 아이가 아니어도 되니까 저는 지금처럼 내버려 두시기만 하면 돼요. 제게 그쪽이 역겹다는 건 정확히 보셨으니까.”

    비비안느의 말이 끝났을 때, 마침 뤼드빅이 그녀의 뒤쪽을 잠깐 돌아보기에 비비안느 또한 그리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향한 곳에,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려던 의장 부인이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비비안느의 언행에 놀랐는지 그대로 다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비비안느는 그녀가 제 아버지에게 전화할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조금 다치게 되는 것 따위보다 더 중요한 일을 지금 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있는데 왜 다른 여자를 안지? 이제 네가 그 얼굴로 떨지도 않을 건데.”

    뤼드빅이 받아쳤다. 그는 이 모든 게 웃긴다는 듯 잠시 뜸을 들여 만끽하고는 말했다.

    “당연히 결혼해 드려야지. 누구의 명이신데.”

    “…….”

    “그런데 네가 나를 이용하겠다는 것처럼 나도 널 이용할 거거든.”

    그 말에 비비안느의 유순한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뤼드빅은 이었다.

    “에드문드 히아드 콜트 도련님을 내 손으로 잡을 거야.”

    자못 태연해 보였던 비비안느도 그 말에는 자신의 무릎 위 치맛자락을 움켜쥐어야만 했다.

    뤼드빅은 그 반응을 즐겼다.

    “네가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네. 암흑가가 제도 지부장을 보내서 나를 데려가게 한 건 똑똑한 수였지만, 그래도 의혹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이제는 구체적인 증거를 손에 넣을 생각이야. 안 그래도 상대 쪽도 내가 그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닌가?”

    말을 마친 뤼드빅에게서 비비안느 쪽으로 무언가가 스윽 밀려왔다. 비비안느는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작은 편지 봉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저런 종류의 봉투를 잘 알았다. 초대장이었다.

    “열어 봐.”

    뤼드빅의 종용에 비비안느는 편지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살폈다. 선상 파티로의 초대였다.

    군함을 만드는 이름난 군수 업체는 유람선 또한 만들었는데, 그런 역작을 공개하는 자리였다.

    비비안느는 왠지 그 뒤에 에드문드가 있을 것 같다 생각했다. 그가 정말 암흑가 수장이라면 군수 기업체를 사들인다는 소문처럼 저런 기업 또한 제 손 아래 두었을 테니까.

    뤼드빅이 소파에 느른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비비안느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있는 우리 목적이 참 상반되지 않나? 너는 에드문드 콜트 백작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왔고, 나는 놈을 잡으려 하고.”

    “…….”

    비비안느는 부정할 수 없었다. 뤼드빅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리 내가 네 얼굴을 예뻐라 한다지만 그런 거래는 안 되지. 레이디께서만 편하시겠다? 네가 하고 싶은 게 나와의 결혼이라면, 협조를 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

    뤼드빅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담배가 그의 손짓에 따라 소용돌이의 연기를 흩뿌렸다.

    “파트너를 동반해야 한다더군.”

    그 매캐한 연기와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비비안느는 물었다.

    “정확히 어떻게 도와드려야 된다는 건데요.”

    “부부 동반이야.”

    그 대답에 비비안느의 표정이 미세히 일그러졌다. 거봐. 비위도 안 좋으시면서 허세는. 뤼드빅은 속으로 생각하며 말했다.

    “약혼자가 있다면 약혼자도 가능해. 아직 결혼해 달라고 안 할 테니 걱정하지마, 메르고빌.”

    “그리고요?”

    “콜트 백작이 신대륙에서 석사를 마쳤다고 했나? 파티에 그쪽에 관련된 사람들이 꽤 와서.”

    “…….”

    “벌써 제국에서 암흑가가 성장한 지 7년. 백작이 석사를 마친 9년 전과의 2년이라는 공백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마 백작은 신대륙에 있었을 테니 그곳에서 만날 사람들이 잘 알고 있을 수도 있겠지.”

    어느새 경청하고 있던 비비안느는 뤼드빅의 조사가 꽤 철저하다는 점에 속으로 조금 놀랐다.

    뤼드빅은 이어 말했다.

    “백작이 네 반지를 어떻게 샀을까. 내가 그것도 모를 것 같나? 표면적으로는 주식 지분을 매각했다지만 실체는 다를 수 있지. 그런데 마침 그곳에 신대륙 재계에서 내로라할 투자 은행 사람들이 온다더군. 만나 봐야지. 알아봐야겠고.”

    그가 거기까지 말하는 걸 들은 비비안느는 입을 열었다.

    “그걸 저한테 말해 주는 이유는 뭐예요.”

    “말했잖아, 내가 사람 눈은 잘 읽는다고.”

    뤼드빅이 입을 열었다.

    “넌 언제부터 요원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었나. 비비안느 메르고빌.”

    그가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담배를 빨아들였다.

    “그러면서도 보고 싶어 하고.”

    “그렇게 잘 보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네가 널 잘 모르는 거겠지.”

    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를 아는 나보다 더.”

    “…….”

    “그러니까 네 최선은 품위 있게 내 것이 되는 거야, 난 안 멈출 거거든.”

    그의 악마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가 나한테 협조해. 그러면 가장 품위 있는 모습으로 그 남자를 버릴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

    “널 이미 한 번 죽이려 했던 남자한테 뭘 바라? 넌 버림받을 거야, 메르고빌. 그러니까 네가 네 손으로 먼저 버려. 그리고 귀족원 의장 아들 사모님으로 사는 게 최고의 복수 아니겠어?”

    뤼드빅의 말에 비비안느는 쓰라린 가슴을 겨우 추슬렀다. 뤼드빅의 말이 옳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드러날 진실이라면 직면하고 그녀 자신이 그를 먼저 버리는 게 최선일 지도 몰랐다.

    그러면 그녀는 백작에게 최소한 불쌍한 사람으로 기억되진 않을 테니까.

    어차피 그녀가 속한 세상은 이런 것이었다.

    숨 막히는 곳이었지만 그녀는 견뎌 낼 자신이 있었다.

    선상 파티는 항구에 정박한 제국에서 가장 큰 크루즈 중 하나에서 열렸다. 비비안느는 선 내의 댄스 플로어, 즉 연회장의 문 앞에 서고서야 겨우 현실감을 느꼈다.

    선박 내 시설을 안내해 주며 그녀와 뤼드빅을 이끈 승무원은 유독 친절했는데, 그가 그들을 이끌고 간 곳이란 온통 다 호화로운 장소였다.

    안 그래도 이곳이 아까의 정찬장보다 더 호화롭고 아름답다 하여 비비안느는 긴장하지 않으려 하며 거대한 문을 바라보았다. 흘러내린 숄을 여밀 때쯤 그녀의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몸에 멍이 생겼네.”

    동행한 뤼드빅이었다.

    “알잖아요. 제 아버지는 제가 버르장머리 없이 구는 거 싫어하시는 거.”

    “그래. 다른 이유로 멍이 생기기에는 내 정부는 이미 죽어서 없지.”

    “…….”

    “말 나온 김에 콜트 백작 각하를 만나거든 내 안부 좀 전해 주고.”

    “반지만 돌려주고 올 거예요.”

    “왜, 그럴 거면 소포를 이용하지.”

    “비싼 거잖아요. 분실될 수도 있고.”

    “백작저로 간다든가.”

    “됐어요. 그나저나 여기에서 어떻게 찾고 있다는 사람들을 만날….”

    비비안느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 순간 그녀의 앞에서 문이 열리고 이름이 호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에 잇따라 뤼드빅의 것이 뒤따랐다는 게 꽤 껄끄러우면서도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연회장은 끝이 까마득해 보일 정도로 넓었고, 정말 다양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비안느는 제가 처음으로 먼저 에드문드의 세상에 걸어 들어왔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물론 그에게 정말 숨겨진 정체가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에드문드의 말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럼 말씀하지 그러셨습니까, 장인어른. 돈이라면 차고 넘치도록 많은데.”

    “그리고 저는 아버님의 사위 되실 분처럼 제 아버지의 말에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라, 꽤 유용하기도 합니다.”

    그녀의 짐작이 맞는 거라면 정말 다르게 해석되는 말이었다.

    비비안느는 재빠르게 시선으로 에드문드를 찾았지만 사람이 워낙 많아 쉽지 않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중심에 가까운 곳을 훑었지만 실패했다. 이곳은 정말 말 그대로 제도 사교계를 옮겨 놓은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어머, 비비안느 영애.”

    비비안느는 물론 상대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약혼 발표 연회에서 노란 드레스를 입고 있었던 한즈버리 부인이었다.

    “우리 그날 영애의 약혼 발표 연회에서 만난 것 같은데. 이렇게 다시 만나네요. 약혼자가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받았다면서요. 그 뒤로 다시 잘된 모양이네?”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는 거더라고요.”

    “어휴, 잘됐어요. 잘됐어.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두 사람 모두 오해할 뻔했지 뭐야? 편지도. 그 여배우 사건도. 다 아무것도 아니었잖아. 미안해서 어째요, 영애.”

    “괜찮아요.”

    정말로.

    그녀는 속으로 읊조렸다.

    새삼 암흑가의 보스가 남다른 권력을 가지고 있긴 한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다 아무 일도 아니게 만들어 버리니 말이었다.

    한즈버리 부인은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오늘 같이 어울릴래요? 영애 약혼자는 바쁜 것 같은데.”

    “괜찮아요. 그래도 제안은 감사합니다.”

    비비안느는 휙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원래 이럴 때 에드문드가 등장해서 말을 걸면 반지를 돌려주고 떠나려 했는데 비비안느는 여기서 그의 까만 머리카락 한 올도 찾아볼 수 없었다.

    “비비안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목소리에 뒤돈 그녀는 뜻밖의 인물을 만나고는 놀라 눈이 커졌다.

    “매디슨.”

    “여기는 웬일이야? 나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여기서 칵테일 파티한다고 하길래 마시기 드문 술이나 좀 얻어 마실까 하고 왔는데.”

    “나야… 뭐…. 이런 데 익숙하니까.”

    비비안느가 답하고는 말을 돌리기 위해 매디슨 뒤에 있는 사람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분은 누구시니.”

    “다니엘.”

    “다니엘?”

    비비안느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기억을 못 한단 말이야? 우리 데인체스터 소위님을?”

    매디슨이 장교복을 입고 있는 다니엘의 어깨에 힘찬 기색으로 팔을 둘렀다. 그러자 다니엘의 장교 모자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제야 좀 알 것 같기도 했다. 매디슨을 처음 만난 날 다니엘의 모형 글라이더가 그녀의 창문을 넘었었지.

    비비안느는 옛 추억에 가슴이 조금 쓰라렸으면서도 그들에게 고운 미소를 지어 보여 주며 말했다.

    “그새 다니엘에게 매디슨 네 어머니께서 일하시던 곳 가문의 이름이 붙은 걸 보니, 데인체스터가의 양자가 다니엘이었던 모양이구나.”

    “맞아. 알아? 얘 첫사랑이 너잖….”

    “파커. 조용히 해.”

    비비안느는 처음 듣는 다니엘의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그가 키가 요만했을 때 메이드가 비켜선 자리에 서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게 기억났다.

    “파혼 소식으로 안부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가 비비안느 쪽으로 조금 다가오며 말했다.

    “약혼 발표 연회에 초대받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후작 각하께 초대장을 받지 못하여.”

    “아니에요. 마음만으로도 됐어요.”

    그 말을 한 비비안느는 매디슨과 다니엘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 부부 동반이라던데. 그러면 둘은….”

    비비안느가 말끝을 흐리면서 설명을 요하는 표정을 지었더니 매디슨이 픽 웃고 다니엘이 손을 내저었다.

    “얘랑?”

    “저와 매디슨 파커,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다음 둘이 동시에 말했다.

    “아니 어떻게 얘랑.”

    “줘도 안 가집니다.”

    다니엘이 질세라 말하자 매디슨이 웃으며 쏘아붙였다.

    “말 다 했냐.”

    “실례했습니다.”

    다니엘이 매디슨 쪽으로 조금 과장되게 고개를 숙였다. 비비안느는 이 둘의 시선이 서로를 훑다 멀뚱멀뚱 자신을 훑자, 툭 하고 웃음을 터트려 냈다.

    이런 기쁨을 느껴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그녀는 그들 사이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한층 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부부 동반이라는 게 댄스 플로어에서 춤추는 시간이 있어서라던데. 두 사람 춤추는 거 잘 어울릴 것 같네요.”

    “난 얘랑 출 바에는 너랑 춘다, 비비안느.”

    “이하 동문입니다.”

    매디슨과 다니엘이 각각 앞다퉈 말했다. 매디슨이 강력하게 다니엘에게 제 의견을 피력했다.

    “너한테 선택권이 있냐. 이쪽은 무려 영애님이신데.”

    “아하, 그렇지… 죄송합니다, 영애님.”

    뒤로 물러선 다니엘이 답했다.

    “그렇게 극존칭으로 높일 필요 없어요. 경칭을 붙인 레이디 메르고빌쯤이 편하겠네요.”

    비비안느의 말에 매디슨이 그녀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진짜 아가씨 같다니까.”

    매디슨의 시선이 다니엘에게로 옮겨 갔다.

    “우리는 춤출 바에는 음식이나 먹자.”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엄격하고 근엄한 말투로 다니엘을 보며 말했다.

    “안 그렇습니까, 데인체스터 소위?”

    “맞습니다.”

    “그런데 군수 기업들은 공황에도 잘나가나 봐.”

    다시 말투를 바꾼 매디슨이 비비안느를 보며 말했다.

    “이렇게 보기 드문 성대한 연회를 열어서 베풀어 주는 거 보면 말이야. 꼭 몇백 년 전 귀족 같다니까.”

    “그래. 그렇지.”

    비비안느는 정작 귀족인 자신은 허울뿐인 품위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물론 그녀의 가문 소식에 대해선 가십거리로만 접한 게 전부였을 매디슨은, 별다른 악의 없이 한 말일 것이었으니 감정도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사실을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굴었다면 그게 더 신경 쓰였을 것이다.

    매디슨이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 나온 김에 우리도 정찬장에 가자. 아까 보니까 화려하고 넓은 게 꼭 한번은 앉아 봐야 할 것 같더라.”

    “그래. 가자.”

    어느새 에드문드에게 반지를 돌려주겠다는 목적을 잊은 비비안느가 매디슨을 뒤따르자, 다니엘도 두 사람 옆에서 걸음을 옮겼다.

    비비안느는 그 순간을 잠시 동안 만끽했다.

    그리고 매디슨이 구설수 많은 자신에게 아무런 질문도 해 주지 않는다는 것과.

    이 칙칙한 전쟁과 공황의 시대에 종군 기자로 있는 그녀가 삶의 어두운 이면에 대해서는 내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래.

    꼭 말 그대로의 전쟁터에서 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삶은 전쟁이니까.

    그런 경쾌한 배려가 참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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