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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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비비안느는 눈을 천천히 깜박여 주위를 살폈다. 그녀는 곧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자 그녀는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비비안느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네 아버지가 콜트 백작을 잘 돌려보냈단다. 양가의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파혼을 승인한다는 데에 동의하셨어. 네가 남자 보는 눈은 있는지, 말재간이 아주 보통이 아니었다더구나.”

비비안느는 가쁜 숨을 고르게 하는 데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어머니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양가의 합의라는 게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모르겠다만 말이다. 철저하기도 하지. 네 얼굴을 한번 보고 가고 싶다기에, 산책을 마치고 사내들 사이의 대화가 길어져 기다리는 틈에 잠들었다고 했다.”

그 말에 비비안느는 안간힘을 써 뻑뻑한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요원이 떠난 날이 흐릿하게나마 떠올랐다.

그날, 코트의 안주머니에서 요원증을 발견하고 층계로 달려 나갔을 때는 너무나도 늦어 있었다. 그 후 그녀가 찾아낸 그의 흔적은 죽은 요원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이었다.

비비안느는 더 이상 누군가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늦고 싶지 않았기에 몸을 일으켰다. 흐릿한 상에 어머니와 함께 누군가가 담겼다. 비비안느는 몇 번 눈을 깜박인 뒤에야 어머니의 옆에 있는 사람이 뤼드빅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들 뒤로 이곳의 배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방이 그녀를 다시금 반기고 있었다.

비비안느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어머니에서 멈췄을 때,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물론 백작이 너를 데리고 가고 싶다는 의사를 표하긴 했지. 하지만 절차를 지켜 달라는 말에는 쉽게 수긍하고 물러서더구나.”

비비안느는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오만한 백작이 자신이 했던 말만큼은 기억하고 지켜 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돌아오겠다고 전해 달라 했고, 알았다고 대답했다. 널 가두려는 게 아니야. 그 사내가 널 만나러 오면 만나게 해 주마. 물론 당장 네가 협조하겠다면 말이다.”

“…그 말을 제가 어떻게 믿죠, 어머니?”

“널 평생 잡아 둘 수 없는 건 안다. 이번만큼은 확실하니 날 믿을 수 없다면 콜트 백작이 남기고 간 약속을 믿든 몇 번이고 이곳에서 빠져나갈 네 의지를 믿든 상관없다.”

“…….”

“이만 나는 자리를 비워 줄 테니 두 사람 이야기 나누거라.”

비비안느는 제 어머니가 등을 돌리는 모습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뤼드빅에게로 돌아갔다. 침대에 앉은 그는 그녀를 보고 말했다.

“메르고빌.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오랜만이지. 여행은 재미있었어?”

그가 말하며 비비안느의 뺨을 쓰다듬었다.

“날 배신해도 넌 여전히 예쁘네.”

그 말에 비비안느가 그의 손을 피하자 뤼드빅의 작은 조소 후에 말이 이어졌다.

“근데 네 눈에도 널 배신한 사람이 근사해 보일까.”

비비안느는 그에게 대꾸도 더 하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렸다.

“가세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 네가 위협에 처할 때면 똑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똑같은 방식으로 너를 구하고 살려 낸다. 나는 이 사실이 꽤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이번에도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어. 그 사람이 또다시 너를 구하러 올까. 너를 살려 주러 올까.”

“…….”

“그래서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 싶었는데.”

뤼드빅의 손이 비비안느의 어깨를 잡아채 그의 쪽으로 돌려놓았다.

“손대지 마요. 당신 같은 사람에게 안기느니 차라리 암흑가 수장에게 가서 아양을 떨 테니까.”

그러자 뤼드빅이 땅을 보며 웃었다.

“메르고빌.”

나직이 이름을 부른 그가 말을 이었다.

“너 이 나라의 암흑가 수장이 정말 누구인지 한 번도 짐작해 본 적이 없나?”

“돈 베칼로네잖아요.”

비비안느는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뤼드빅이 말하려 하는 것들을 머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뤼드빅은 그런 그녀가 우습다는 듯 말을 이었다.

“자택에서 칩거하는 인간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을 더 해 봐야지, 메르고빌. 그걸로는 부족해.”

“에드문드는 아니에요. 그 사람이 제 아버지한테 내가 쓴 편지를 내민 거, 내가 직접 봤어요. 곁에서 며칠을 있었는데 착각했을 리 없어요.”

“글쎄. 정말로 진실을 가리고 싶으면 자기 살점도 내어 줄 줄 알아야지. 그렇지 않겠어? 그러면 여기서부터 시작하지. 만약 네 콜트 백작이 그 요원이었다면 어떨까. 살렌너 호텔에 너를 데려가 너와 같이 식사를 했던 네 구원자였다면.”

“…….”

“같이 있으면서 그런 점은 관찰하지 못했나?”

비비안느는 부정하고 싶지만 그녀가 본 것을 떠올려 낼 수밖에 없었다. 요원과 꼭 같던 글씨체. 그리고 백작의 저택에서 생각한 것들.

나긋나긋 그녀를 현혹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요원이, 암흑가 수장과 동일 인물이었다면.”

“……!”

“물론 이건 정말 짐작일 뿐이야. 어리석은 짐작일 수도 있지. 하지만 시험해 볼 가치는 있지 않겠어?”

뤼드빅의 말에 비비안느의 가슴이 빠르게 두방망이질 쳤다. 아침에 했던 생각 때문이다.

‘메칼렌티아어를 하는 백작의 목소리가 익숙했어. 꼭 미라볼타 거리의 약국에서 들었던 암흑가 보스의 목소리와 비슷했지.’

1년의 시간 동안, 백작이 귀족적인 제국어 억양을 갖추었을 수는 있어도 메칼렌티아어 억양만큼은 그대로일 수도 있었다.

또. 그가 파혼 문서를 얻어 온 과정을 천천히 되짚어 보면 이상한 점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백작은 사업을 한다지만 그게 무엇인지 이야기해 준 적 없었고, 대외적으로 알려진 바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이유로 이러한 막대한 돈을 가지고 있으며, 왜 암흑가 세력과 갑자기 거래를 시작했는가.

만일 그게 갑자기가 아니라면.

하지만 이러한 사안들로 그녀의 추측을 확신할 수 없었다.

터무니없는 가설일 뿐이다.

“설령 그럴지라도 난 협조할 생각 없어요.”

비비안느는 생각을 갈무리한 뒤 뤼드빅에게 톡 쏘았다. 뤼드빅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백작이 암흑가의 수장이 맞다면 너를 죽이려 한 사람일 텐데도?”

“…….”

“그런 남자를 사랑하다가 죽어 버리는 쪽을 택하겠다는 건가.”

그 말에 비비안느는 경시청에서 본 사진, 그리고 제도의 지부장 ‘하비 카네 콜’이 운전하던 차에서 봤던 여러 사진들을 떠올렸다. 그 생각을 하면 손이 떨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거잖아.

저 남자는 원래도 이상한 말을 하곤 했다.

그걸 아는데도, 무릎 위에 놓인 비비안느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만일 그가 하고 있는 말이 정말 맞다면?

에드문드를 보며 느꼈던 그 기시감이 착각이 아니었다면.

그런 거라면.

뤼드빅의 말이 이어졌다.

“불쌍한 비비안느 메르고빌. 네가 얼마나 불쌍하면 너를 살려 놓았을까.”

뤼드빅의 말과 함께 백작저에서 들은 말이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한심하죠.”

“아니.”

“그럼 불쌍한가요?”

“어.”

“…….”

“아주 가련하고 가엾어.”

“전 그렇게 안 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인생 자체가 거짓말이었어요.”

그 손 위로 눈물이 한 방울 톡, 하고 떨어졌다.

비비안느는 어떤 순간이든 그의 앞에서는 가장 귀하고 고고한 귀족이었다. 그가 요원이었을 때도. 그를 지키려 암흑가의 책사라는 오명을 손수 퍼트리며 분투했던 때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상 아들로 나타난 그와 재회했을 때도.

틀림없이.

비비안느의 손등 위에 눈물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더 늘어 갔다.

에드문드가 그녀를 취했을 때의 신체적 고통은 아무렴 괜찮았다.

그녀는 그를 원했고 그를 더 알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비비안느는 저 남자 앞에서 허물어지지 않으려 정신력을 다잡아야 했다.

뤼드빅의 목소리는 가차 없이 이어졌다.

“아닌가? 널 가지면 네 비밀도 함께 가질 수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

아냐.

“이제는 언론가에서 떠들어 대는 말들 중에 한 가지는 들어맞는 게 되겠어.”

아니라고.

“창부.”

그만해.

“암흑가에 지혜와 몸을 팔아넘긴, 창부.”

비비안느는 가슴에서 무언가 울컥 치미는 느낌을 참아 내며 어깨를 떨었다. 뤼드빅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여자들한테 몸은 내어 줘도 마음은 안 팔았거든, 너처럼.”

“…….”

“피임은 했어?”

“…….”

“난 네가 한 순간도 내 눈에 예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뤼드빅의 손가락이 비비안느의 눈물을 훑어 냈다.

“네가 살렌너 호텔에 일찍 도착해서 나를 기다려 줬을 때도. 네가 경시청에서 내 품에 달려들었을 때도. 내가 반지를 준 날 네가 살렌너 호텔에서, 내 타이를 고쳐 주면서 앞으로 잘해 보자고 조건을 나열하며 제안했을 때도.”

“…….”

“그때부터 쭉 기다려 왔잖아. 네가 다시 내게 돌아와서 네 말을 지키기를….”

그의 손이 비비안느의 손을 가져가 그의 뺨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눈물 젖은 손이 뤼드빅의 큰 손과 축축이 얽히었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지만 비비안느는 그대로 굳은 채 저항하지도 또는 정신을 잃지도 않았다.

그가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을 때 뤼드빅이 품에서 꺼낸 것은 파혼 서류였다.

그는 그걸 두 갈래로 찢어 바닥에 내다 버렸다. 이제는 효력이 사라진 종이가 팔랑팔랑 바닥에 나부꼈다.

그의 구두 위에 서류 한 조각이 내려앉자 뤼드빅은 주저 없이 그걸 발로 치워 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아나? 암흑가 수장, 아니 백작이 내 석방을 대가로 파혼을 요청한 거.”

“…….”

“내가 내 정부의 추종자를 죽였다는 물증이 있다고 하더군. 그런데, 메르고빌. 그런 건 없어. 너도 내가 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잖아. 그건 그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인 네 백작님의 작품이지.”

“…….”

“자 그럼 이제 경시청에 전화해서 살려 달라 빌어 봐. 나는 앞서 연락했던 세노윅 공작저에 전화해 네가 집에 잘 도착했다고 할 테니까. 너와 콜트 백작의 사이를 의심하는 공작 부인에게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 걸 내가 직접 확인했고, 나와 네가 당장 여행을 떠날 거라고 말할 테니까.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날까?”

비비안느는 그 답을 알면서도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뤼드빅이 친절히 그 답을 내어놓았다.

“만약에 콜트 백작께서 정말 백작님이시기만 하면 절대 경시청에 나타나지는 않으시겠지. 치안총감과 결탁한 건 제국 수상의 아들이 아니라, 암흑가 세력이니까. 안 그러겠어?”

“…….”

“그런데 만약에 백작께서 내가 짐작하는 대로 암흑가 수장이 맞다면.”

뤼드빅이 비비안느의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면 네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는 백작 각하께서는 나타나 널 구하겠지.”

그 말에 비비안느는 반박하듯 고개를 치켜들어 뤼드빅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작 불쌍한 여자 하나 구하자고 자기 위장을 포기할 남자는 없어요.”

그녀는 이 사실을 거의 확신했다.

그의 말이 맞다면 백작은 이미 저를 죽이려고 한 남자다. 그런데 여기 저를 손쉽게 없애 줄 수 있는 금수가 있다. 그러면 그는 무슨 이유로 경시청에 나타나겠는가?

이어진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확신에 차 있었다.

“특히 그게 암흑가의 수장같이 철두철미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겠죠.”

이런 그녀의 기색에도 뤼드빅은 조금도 기세에 밀리지 않았다.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지.”

그는 킬킬거리며 이어 말했다.

“그 똑똑한 머리로 다 알면서 나타나 널 구하고야 말지도.”

“…….”

“앞으로 경시청에 이 재미있는 사실을 공유할지 말지는 네가 어떻게 하는지에 달렸어. 어때?”

비비안느는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뤼드빅은 그 영겁의 시간을 온전히 만끽하며 기다려 주기라도 하려는 듯 여유로운 포식자의 태도로 그 자리에서 비비안느를 바라보았다.

그를 밑바닥에서부터 지금 이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든 건 이러한 직감과 비상한 지능이었다.

그리고 그건 이 상황에서조차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비비안느도 밀리지는 않았다.

“당신 약혼녀로 남아 줄게요. 경시청은 내 발로 걸어가요.”

뤼드빅이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는 비비안느를 바라보았다. 비비안느는 답했다.

“그런데 백작은 내버려 둬요. 이러는 거, 다 나 때문이라는 거잖아요.”

목소리의 끝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평소와 같이 백작을 지키는 것인데도 지금은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똑똑하네.”

뤼드빅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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