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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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비안느는 그녀의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셔 어색한 응접실의 공기를 외면하려 노력했다. 한참의 정적 후에 말을 꺼낸 것은 그녀의 아버지였다.

    “내 딸을 난데없이 약혼 발표 연회에서 데려가더니, 이제야 얼굴을 보게 되는군. 콜트 백작이라고 했나?”

    “이렇게 정식으로 인사드리게 되어 반갑습니다, 어르신.”

    비비안느는 대답하는 에드문드를 초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만약에 그가 그녀의 몸을 원한다는 둥 그런 이야기를 하면 어쩌지. 내색할 수 없으니 차만 열심히 들이킬 뿐이었다. 후작의 말이 이어졌다.

    “알다시피, 렉스가와 메르고빌가의 혼약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두 가문의 중대한 문제였네. 하지만 자네의 사촌을 통해 내 딸의 이야기를 전해 듣자 하니 두 사람이 꽤 가까운 것 같더군. 렉스 가는 이를 근거로 파혼을 요청했고 말이야.”

    “아버지의 부탁으로 책임지고 보호하려다 보니 마음이 깊어졌습니다. 아직은 서로를 알아 가는 단계일 뿐이지만 따님의 파혼을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레이디를 책임지겠습니다.”

    비비안느는 놀라서 에드문드의 옆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는 백작저에서와는 달리 반듯한 수상의 아들 같았으므로.

    원래 그의 얼굴을 알고 있어 저 모습이 어떤 위장 같아 보이기도 했다.

    “사업을 하신다 들었는데.”

    비비안느는 방금 뤼드빅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드문드의 모습을 보다 뤼드빅의 작태를 보니 완전 딴판이었다.

    그는 소파 팔걸이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으니까. 뤼드빅이 이어 말했다.

    “…이렇다하게 알려진 게 없군요. 후작 부처께서 아직까지 파혼 문서에 서명을 주저하고 있는 걸 보면, 말보다 돈 얘기부터 꺼내야 한다는 거 모르십니까?”

    “그렇습니까. 사업이라면 다양하게 합니다.”

    답한 에드문드는 비비안느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 올려 뤼드빅에게 보이며 이어 말했다.

    “이런 반지를 사 줄 정도는 되고요.”

    “그 자금의 출처를 수상 각하도 알고 계십니까?”

    “제 아버지께서는 제 자금의 출처보다는 그쪽 자금의 출처를 더 궁금해하실 것 같습니다만.”

    그 말에 분위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에드문드의 말이 이어졌다.

    “게다가 메르고빌 가문같이 유서 깊은 가문이라면 품위 또한 중요히 여길 거라 생각했는데, 그쪽을 보면 왜 레이디가 야반도주를 하려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

    “허락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에드문드가 아버지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는 비비안느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를 메르고빌가에서 빼내 오기에 이보다 더 정석적인 방법은 없을 것이다. 풋맨이 찻잔을 거듭 채워 주자 그녀는 차를 마시며 살짝 상기된 얼굴을 에드문드로부터 감추려 노력했다.

    비비안느의 행복을 깨트린 건 후작의 목소리였다.

    “자네, 신대륙에서 수학했다고 하던데. 그 말이 맞는가?”

    “예.”

    “그곳에서는 자유연애를 하는 게 보편적이었겠지. 하지만 우리 귀족들은 다르네. 만약 자네가 내 딸과 더 이상 교제하고 싶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할 건가? 그때도 파혼을 요청하고 다른 여자를 찾아가 만나겠지.”

    “듣기론 아버님의 사위 되실 분은 여자가 알려진 걸로만 둘인 것 같은데, 파혼만 하지 않으면 정부를 두는 건 괜찮습니까?”

    “그래도 결혼이라는 거래는 이어져야 하니까.”

    후작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명료했다.

    “알다시피 우리 가문과 자네의 가문은 엮일 수 없지 않겠는가? 마음은 이해하네만 허락은 해 줄 수 없네. 그래서 우리 딸아이만을 보고자 한 건데 자네까지 와서 듣기 싫은 소리만 늘어놓아 버렸군.”

    “그러니까 결국 돈의 문제가 맞다는 말이군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비비안느는 속으로 ‘잘한다. 잘한다.’를 외치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체면을 차리면서도 렉스가와 파혼하지 못하고 있는 가족들의 모순이 답답했었다. 에드문드는 그 사실을 정면으로 꼬집고 있었다. 그녀는 따뜻한 차를 넘기며 에드문드를 곁눈질로 훑었다.

    “그럼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장인어른. 돈이라면 차고 넘치도록 많은데.”

    에드문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비스듬해졌다.

    “후작 각하께 저는 놓치면 후회하실 둘 없는 신랑감일 겁니다.”

    “…….”

    “그리고 저는 아버님의 사위 되실 분처럼 제 아버지의 말에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라, 꽤 유용하기도 합니다.”

    “마음은 변한다네. 말도 변하고.”

    “그러면 장인어른께서는 계약 또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걸 목격하시겠군요.”

    “젊은이의 패기는 아껴 두게. 언제든지 쓸 데는 많을 테니. 자네가 내게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고 싶으면 최대한 서둘러서 이곳을 걸어 나가 줬으면 좋겠군.”

    “…….”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나도 점잔 떨 것 없이 말하면 되겠군. 렉스가 놈 성격이 영 마음에 들진 않긴 해도, 저자는 내 딸아이가 더럽혀져도 데리고 살 인물이네. 그러니 고마울 따름이지.”

    “허락해 주시지 않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말귀는 잘 알아듣는군. 이만 나가 주게나.”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에드문드가 마침내 비비안느를 보며 말했다. 비비안느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여태껏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오빠의 표정도 훑었다.

    그러다 비비안느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버지의 말이 틀린 것은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공작저에서도 분명 반대할 것이다. 그런 것에 비해 백작은 자신의 몸을 좋아한다고 했다. 에드문드가 그녀를 버린다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쩌면 진짜 용기란 여기서 내야 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전 렉스 가문과 약혼해서 단 한순간도 행복한 적 없었어요.”

    비비안느는 가족들과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추며 말했다.

    원래는 그럴 수 없었지만 에드문드가 옆에 있으니 꼭 신경 안정제 궐련을 피운 것같이 용기가 났다.

    제가 틀린 게 아니었다.

    잘못된 게 아니었다.

    에드문드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자신이 이 좁디좁은 세계에 갇혀 있어서 여태껏 몰랐을 뿐.

    “저를 생각한다면 저를 이만 놔주셨으면 해요. 오빠의 삶마저 좀먹고 있는 순간순간을 이어 나가는 게 제가 잘되었으면 하는 애정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말을 할 때 비비안느의 시선이 어머니에게 고정되었다.

    “집을 나갈 때 이 말을 드리고 싶었어요, 어머니.”

    분위기는 회동 자리가 일시적으로 파한 뒤에서야 환기되었다. 비비안느는 어머니와 함께 저택의 정문을 통해 걸어 나와 드넓은 앞뜰에 난 길을 따라 걸었다.

    마지막으로 이곳을 떠났을 때, 그러니까 약혼 발표 연회 날과는 무언가가 달랐다.

    구획이 나뉘어 길게 늘어선 앞뜰의 화단에 꽃들이 듬성듬성 피어 있었다.

    소소한 변화였지만 비비안느는 그 사실이 좋았다.

    ‘누가 이렇게 해 둔 걸까.’

    비비안느는 약혼 발표 연회 2주 전, 뤼드빅을 그녀의 방에서 독대한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뤼드빅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그녀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우는 눈은 여전히 예쁘네.”

    “…….”

    “사랑해, 비비안느 메르고빌.”

    그날 창문을 열어 내다보았던 저택 측면의 풍광을 기억했다. 철에 따라 벌거벗은 나무만 있어 참 황량했었으나 지금 그녀가 걷고 있는 저택 앞 정원은 조금이지만 생기가 느껴졌다. 비비안느는 걸음을 옮기며 그녀의 옆에서 같이 걷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틀어 올려진 빛바랜 머리칼이 제일 먼저 시선 속에 들어왔다. 신중한 시선은 어딘가 엄격한 그녀의 인상을 완성했다.

    비비안느는 완벽한 귀부인의 자태를 갖춘 어머니를 동경했었으나, 온갖 화려한 연회를 앞두느라고 그녀에게마저도 뒷모습만 보여 주었던 어머니의 손을 가끔은 잡아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귀족들의 핏줄은 세간의 비유처럼 푸르고도 차가웠다.

    응접실에서 걸어 나와 바깥으로 향할 때까지 아무 말도 없었던 그녀의 어머니가 말을 꺼낸 건 그때쯤이었다.

    “이렇게 너와 단둘이 걸어 보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네, 어머니.”

    비비안느는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최대한 자태가 흐트러지지 않게끔 걸음을 옮겼다.

    혹사한 허벅지의 근육이 걸음마다 비명을 내지르는 듯했지만 내색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기에 어머니와 보조를 맞추어 걷는 모습은 평소와 같았다. 마치 수면 아래로는 발장구를 쳐도 수면 위로는 고고한 백조 무리가 된 것 같았다.

    비비안느가 뒤쪽으로 힐끔 시선을 던지자 후작 부인이 말했다.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이야기하게 두자꾸나. 네 아버지가 콜트 백작과 더 이야기해 보고 고민해 본다고 했으니, 너도 결정에 따라야지. 그쯤이면 네 아버지도 많이 양보해 주신 거란다.”

    “네. 알고 있어요.”

    “마침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 싶었는데. 잘되었지. 네가 응접실에서 한 말도 있으니 말이다.”

    비비안느는 그제야 놀란 얼굴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다. 그녀가 제 목소리를 낸 것을 어머니께서 드디어 진지하게 들어 주신 걸까. 비비안느는 오늘따라 유독 다정한 어머니 때문에 아까보다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답할 수 있었다.

    “네.”

    “그래, 정략혼이 쉬운 일은 아니지. 특히 지금같이 우리가 아쉬운 상황에 있다면 더더욱 말이다. 믿지는 않겠지만, 너를 그렇게 보내는 내 마음도 내내 편하지만은 않았어.”

    “…….”

    “하지만 귀족이라면 으레 감정도 숨길 줄 알아야 하는 거란다. 쓸데없이 일에 감상을 섞다 보면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결국엔 결정이 그 마음에 끌려다니게 되지. 절제가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미덕인 이유란다.”

    후작 부인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같이 냉했지만 그토록 서릿발 같았던 어머니가 여태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온몸이 조금 더 따뜻해진 느낌이 드는 건 비단 아까 응접실에서 차를 마셨던 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명심할게요, 어머니.”

    “네 아버지는 쉽게 마음을 바꿀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콜트 백작이 워낙 강경하게 나오니 렉스가 외의 다른 경우도 염두에 두고 있긴 하겠지. 가문에 득이 되는 쪽이라면 네 의견 정도는 반영하는 걸 택할지도 모르고.”

    정말 그럴까.

    비비안느가 생각하는 아버지는 가부장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저택의 폭군이었다. 그랬기에 그런 경우는 상상을 하기도 힘들었다. 그럼에도 비비안느는 콜트 백작을 믿고 싶었다. 그가 아까의 태도를 고수해 이곳에서 자신을 꺼내 줄 거라고.

    “네. 모두에게 최선인 쪽으로 해결되었으면 좋겠어요.”

    비비안느는 어머니와 대화를 더 나누고 싶은 마음에 그녀 쪽으로 살짝 더 다가가 말을 이었다.

    “꽃들이 정말 아름다워요. 정원을 가꾸기로 한 건 누구의 생각이었나요?”

    흰 장미들을 눈에 담고 있던 비비안느는 내심 그게 에드문드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가 보낸 만찬회 초대도 거부한 부모님이 콜트가 정원사라고 들이지는 않았을 것 같아 대답을 듣기 전에 희망을 내려놓았다.

    “데인체스터 부인이 다녀갔단다.”

    매디슨의 부모님이 데인체스터가의 변호사로 일했었다.

    비비안느는 오랜 기억 속 매디슨의 말을 떠올렸다.

    “너 정말 좋은 데 사는구나? 우리 엄마가 일하는 저 옆의 옆집도 저택인데, 이렇게 호화롭지는 않거든.”

    저택의 측면이 내려다보이는 비비안느의 방 창문으로 모형 글라이더가 날아든 날, 매디슨이 비행기를 잃어버린 다니엘이라는 소년을 옆에 두고 그녀에게 한 말이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어져 비비안느의 상념을 방해했다.

    “그 집 양자도 함께 왔었는데, 데인체스터 영지의 꽃이 올해 유독 아름답다며 나누어 드리는 건 어떻겠냐 권하더구나. 처음에는 성가셔하던 네 아버지도 좋은 기색이셨어. 그래서 결국….”

    어머니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비비안느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도 걸음이 자꾸 처지는 것이 피로한 몸 때문이라 생각했다.

    아까 랭스턴 리무진에서 꾸벅꾸벅 졸았던 기억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녀가 휘청하자 후작 부인이 뒤돌아 비비안느를 훑었다.

    비비안느는 그 정적을 무마하려는 듯 입매를 끌어당겨 살짝 웃어 보였다. 그 순간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 보려 했지만 졸음이 자꾸 몰려오는 탓에 비비안느는 꼼짝할 수도 없었다.

    “이제야 찻잎의 약효가 드는 모양이구나.”

    어머니의 음성이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잠이 드는 것뿐이란다. 걱정할 것 없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비비안느는 의식을 잃었다.

    저택의 사용인들이 달려와 그녀를 조용히 어디론가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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