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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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비안느가 혼란스러운 마음을 갈무리하려 저택의 층계를 올라가 방에 모습을 감춘 사이, 잠시 승마를 하고 돌아온 에드문드가 여러 언어로 번갈아 시녀들에게 말했다.

    [귀부인처럼 모셔 주시길.]

    그중 메칼렌티아어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비비안느는 침대의 늦은 아침 식사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색색의 잼이 당긴 병. 위스키 글라스. 주스, 빵 조각들이 예쁘게 놓여 있었다. 위스키 글라스는 왜 있는 걸까 하고 의아해했는데 그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잔을 집어 한 모금 들이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손끝이 추위로 붉게 달아올라 있는 걸 보면 몸을 덥히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정작 비비안느는 어제의 여파로 밀려든 근육통 때문에 운신에 제약이 생겼지만 남자는 멀쩡해 보였다. 오히려 몸을 풀겠다며 밖에서 땀까지 흘리고 돌아온 걸 보니 기운이 넘치는 듯했다.

    비비안느는 방금 그의 메칼렌티아어 억양을 곱씹었다.

    아니야.

    비비안느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메칼렌티아어를 잘 모르니까 마냥 그 언어를 쓰는 목소리가 다 비슷하게 들렸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아까의 일을 생각했다. 콜트 백작을 암흑가의 수장과 겹쳐 보다니!

    그 요원은 메칼렌티아어를 전혀 못 했으니 저 남자가 정보국 요원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받은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고.

    그녀는 죄책감을 내리누르며 빵을 포크로 꾹 눌렀다. 에드문드는 그녀의 얼굴을 살피다 말했다.

    “통화한다더니, 네 전 약혼자가 전화를 받았나 보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창백하잖아. 네 표정.”

    비비안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숨을 죽였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때 그의 말이 이어졌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인데.”

    “집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요.”

    “이제는 집에 다녀오겠다고.”

    “약혼이 저희 두 사람 일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잖아요. 저도 제 쪽에서의 일을 정리해야 되고, 백작님도 외숙부와 아버님께 미리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부모님이 뤼드빅과 같이 있으며 자신을 부른다는 게 불안하긴 했지만, 비비안느는 서류상 부모님의 허락만 받으면 모든 게 깔끔히 정리될 것이라는 뤼드빅의 말을 믿고 싶었다. 부모님에게 허락을 얻고 와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그의 삶에 염치없이 파고들 생각이었다.

    “같이 가지.”

    “불편한 자리일 거예요. 제 몸만 얻자고 감수하기는 성가실.”

    에드문드의 말에 비비안느는 그의 말을 막아섰다.

    험한 꼴일 것이다.

    아버지는 렉스가에 자신의 파혼 이유를 전해 들었으니 그녀가 자신의 계획을 망쳤다고 몰아붙일 것이고, 비비안느는 그 추한 모습까지 에드문드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제가 어디 못 가는 거 아시잖아요. 거기다 백작 각하께서도 가족들에게 말씀을 안 드렸고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저는 귀족이에요. 사람들의 평판이라는 게 꽤 중요하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시끄럽게 구설수를 만들고 흐지부지될 바에야 제가 가서 조용히 가서 말씀드리고 올게요. 백작님 쪽도 저를 반기지 않으니까 조심하고 싶고요.”

    비비안느는 그 말을 최대한 고고하게 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해 주실 거죠?”

    “글쎄.”

    답한 에드문드는 비비안느의 손을 가져가서는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말씀대로 레이디께서는 품위가 중요하니 내가 귀족답게 모셔야지. 반지만 달랑 끼워서 돌려보내는 게 귀족의 품위인가?”

    “…….”

    “손을 떠는군.”

    비비안느는 제가 꽤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화제를 돌릴 생각으로 말을 꺼냈다. 별다른 기대 없이 한 말이었다.

    “백작님은 제 몸 말고 그냥 저에 대해서는 궁금하지 않으세요?”

    “…….”

    “전 백작님이 궁금해서요. 어떤 일을 하시는지.”

    비비안느는 그쯤 말하고는 백작의 표정을 살핀 뒤 말을 이었다.

    “…어떤 음식을 선호하시는지, 음악을 좋아하시는지 같은 거요.”

    “일단 음악은 네 입에서 나오는 게 제일 들을 만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가 대답하고는 고개를 숙여 비비안느의 턱을 쥐고 입술을 가볍게 부딪혀 왔다. 그녀가 그의 앞에서 부른 노래 비슷한 건 하나였기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혀끝이 그녀의 부은 입술 끝의 잼을 핥아 냈다. 그녀가 방심했던 틈을 타고서였다.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여졌다.

    “또 어떤 게 궁금하실까.”

    “백작님이 제게 정말 진심인지요.”

    이러한 말에도 장난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걸 두고 한 말이었는데, 그는 그저 낮게 웃었다.

    “네 접시에 있는 걸 먹기나 해. 제도까지 가려면 거의 두 시간쯤 걸릴 테니.”

    “…….”

    “몸은.”

    “괜찮아요. 걸음걸이를 조금 조심해야 하는 것 빼고는요.”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여인이 방으로 들어와 침대의 식탁 위에 티 포트와 찻잔을 내려놓았다. 대륙 동부의 허브 향기가 방에 퍼졌다. 여인이 방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났을 때, 에드문드가 예쁜 무늬의 찻잔을 손수 채워 주었다.

    “레이디께서는 이런 차 향기는 처음 맡아 보는 거겠어.”

    그의 말에 비비안느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게 뭔데요?”

    “피임 효과가 있는 차.”

    “…….”

    “아이를 낳고 싶은지는 네가 결정할 일이니까. 절차가 그렇게 중요한 거라면 배 속의 애로 부모님 설득하고 싶지는 않을 거고.”

    에드문드가 그렇게 말하자 비비안느가 차를 집어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서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언젠간 낳고 싶다고 생각해요.”

    “…….”

    “꼭 백작 각하의 얼굴을 닮아서일 게 아니라, 백작 각하의 어머님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서요. 귀족 가문에서도 간호 장교로 일하셨다죠. 제 아이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다치는 걸 무서워하지 않고 용감했으면 좋겠어요. 전 그러지 못했으니까. 그 아이만큼이라도.”

    “누구나 다치는 건 다 무서워해.”

    돌아온 대답은 건조했으나 처음으로 그가 그녀를 생각해서 해 준 말에, 비비안느는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녀는 시선을 음식에 꽂고는 말했다.

    “백작님은 안 그러실 것 같은데요.”

    “정말 그럴 것 같아?”

    “네. 통각에 무디실 것 같아요.”

    “네가 다치는 건 아프던데.”

    “…….”

    “그러니까 그게 무섭기도 하고.”

    비비안느는 그의 말을 들으며 말없이 음식을 삼켰다. 거짓말일 걸 알면서도, 별다른 가벼운 말보다는 훨씬 더 마음에 와닿았다.

    그녀는 죽은 요원의 손을 놓은 죄책감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그도 생각에 잠겨 있는지 대답은 조금의 시간 간격을 두고 돌아왔다.

    “천만에.”

    비비안느와 에드문드를 태울 랭스턴 리무진은 저택 현관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비비안느는 차에 오른 뒤, 옆으로 조금 당겨 앉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와 차에 탔을 때의 기억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에드문드가 다른 쪽 차 문을 열고 그녀의 옆자리에 탔다.

    한 시간쯤 되어 비비안느가 바로 앉으려고 애쓰며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그녀의 머리가 닿는 곳에 단단한 어깨가 느껴졌다.

    아직 겨울이었지만 어느새 달이 바뀌어 차가운 차의 공기와는 달리 차창 안으로 밀려드는 햇볕은 꽤 따뜻했다.

    그녀가 그 노곤한 볕과 포만감에 속절없이 허물어졌을 때, 어느새 바깥 풍경이 제도의 윤곽을 담기 시작했다.

    비비안느가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새 후작저 저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곳 콜먼 거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는 그녀가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가 손을 잡아 주었다.

    때문에 비비안느는 깍지껴진 제 손에 있는 반지를 보며 시간을 죽일 수 있었다.

    금방 저택의 대문이 열리고, 차가 멈춰서자 비비안느가 있는 쪽 문이 열렸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 오래간만에 그녀가 떠나온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도착이구나.’

    렉스가와의 파혼은 세노윅 공작저에서의 제 행실에 대한 에드문드의 고발 때문일 테니, 질책이 뒤따를 것이다. 그래도 혼자 이곳에 오겠다고 생각했을 때보다는 기분이 괜찮았다. 비비안느는 조심스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걸음이 불편하다고 했던 그녀의 말을 의식했는지, 그가 그녀의 보폭에 맞춰 주었다.

    그녀가 그 배려에 정신이 온통 팔렸을 때 사용인에 의해 저택의 문이 열렸다.

    동시에 눈 깜짝할 새도 없이 현관문에서 팔 하나가 튀어나와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움츠러든 순간 단단한 손이 그 팔을 잡아 저지했다.

    뤼드빅의 팔을 에드문드가 잡고 있었다.

    비비안느가 에드문드의 등 뒤로 향하자 뤼드빅이 가소롭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이곳에서 또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백작.”

    뤼드빅의 말이 이어졌다.

    “안 그래도 제 파혼 서류가 오늘 아침 이곳 저택에 도착하여 후작 부처와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습니다. 제 약혼자의 말로는 그 서류를 백작저에서도 보았다 하던데, 백작께서 보내신 거였습니까?”

    그 말에 비비안느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분명 그녀의 처신 이야기가 두 사람 사이에 먼저 오갔을 거고, 렉스 가문이 그걸 듣고 파혼 서류를 작성해 줬을 거라고 짐작했었는데.

    왜 뤼드빅은 에드문드가 서류를 보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는 걸까.

    비비안느는 에드문드의 지난 말들을 생각했다.

    “네가 키스해 주면 빼내 줄 수 있는데.”

    그리고 그녀의 약혼자는 유치장에서 나와 여기에 있었다.

    머릿속에서 백작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 아직 안 끝났고, 난 네가 필요해서 시키는 대로 했는데.”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에드문드는 곧 파혼 문서를 들고 그녀를 찾지 않았나.

    “예. 잘 도착했다니 다행입니다.”

    뤼드빅의 표정이 굳어졌을 때 에드문드가 태연히 이어 말했다.

    “레이디의 서명을 급히 받아야 했던 것인지 어느 이방인이 제게 전달해 주고는 오늘 다시 가져가더군요.”

    “그 사람이 꼭 누구인지 모르는 것처럼 이야기하시는군요, 백작.”

    “글쎄. 그러면 그쪽은 알고 계십니까?”

    “…….”

    “알고 있어서 굳이 물어보는 것 같아서.”

    에드문드는 그렇게 답하며 비비안느의 어깨를 감쌌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마침 후작 부처와 대화 중이셨다니 제게 길을 안내해 주시면 감사하겠군요. 파혼 이야기는 안에서 더 나누어 봐도 좋겠습니다.”

    비비안느는 에드문드를 흘긋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아침에 백작이 만난 이방인을 말하는 거라면, 반지 이야기를 한 사람인 것 같은데. 그 이전에 그 사람과 또 다른 거래가 오간 걸까.’

    다른 누구도 아닌 에드문드가 암흑가와 거래를 해 제 파혼을 얻어 냈다는 건 의외였지만, 그가 그녀의 몸을 탐내어 한 일일 뿐 그와 암흑가의 더한 관련은 없다고 믿었다.

    그냥 이 남자가 제 아버지를 등진 세력과 거래할 정도로 자신을 그만큼 원했던 거라고 생각했을 뿐.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고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가 이 오만한 남자 앞에서 자존심을 세울 걸 생각하니, 또 두 사람의 충돌을 봐야 할 걸 생각하니 다른 고민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었다.

    ΑngKeumTo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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