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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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비안느는 등 뒤로 백작의 탄탄한 가슴을 느끼며 눈을 떴다. 라디오에서 열두 시 무어라고 말하는 게 들렸다. 허리에 감긴 사내의 팔을 보고는 제 팔을 천천히 들어 손을 쫙 펴 보았다. 거대한 크기의 핑크빛 다이아가 두 흰색 다이아 지지석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다이아의 정교한 세공에 반사되며 만드는 빛무리는 넋을 놓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손을 트는 각도에 따라 보석은 자색으로 보이기도 했고, 분홍색으로 보이기도 했다.

    귀족 영애로서 수많은 보석을 보아 왔지만 이런 색상과 크기에 완벽한 세공까지 된 걸작을 본 적은 없었다.

    육안으로만 봐도 다이아 중에서 으뜸이라고 일컫는 팬시 비비드 등급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정말 그녀의 마음을 건드린 건 보석의 값어치가 아니었다.

    그녀가 원하는 게 돈이었으면 애초에 요원과 떠나는 미래를 그리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녀는 상류 사회의 사람들이 제 몸집을 부풀리려 걸치는 것들에 대해 이골이 나 있었다. 하나 이 반지는 선물이었기에 특별했고, 의미가 있었기에 뜻깊었다.

    비비안느는 백작이 제 몸만을 취한 뒤 버릴 생각이라면 굳이 이런 선물을 해 주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다면 약혼을 하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던 걸까.

    “백작 부인.”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사내가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이제 이 말에 익숙해져야지. 곧 내 아내가 될 텐데.”

    “…….”

    “약혼반지 처분은 네 마음대로 해. 청혼할 때 또 사 줄 테니까. 장인어른께 곧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할 텐데 딸이 쓸 만한 사윗감을 물어 왔다는 좋은 인상을 드려야 하지 않겠어.”

    비비안느는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런 독보적인 크기와 등급의 자분홍빛(purple-pink) 다이아라면 그녀의 가문이 진 천문학적인 빚의 절반은 갚을 수 있을 것이다.

    “넌 귀족 아가씨야, 메르고빌.”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가 당연한 이야기를 했다. 무려 그녀가 스물셋이 될 때까지 귀에 박히도록 들어 온 이야기였다.

    “그러니 너한테는 요원보다 백작이 어울리겠지. 가족도, 여태까지의 삶도. 무엇 하나 포기하지 않아도 되니까.”

    “…….”

    “네 요원을 추운 빌라에서 기다리는 것보다 차기 공작 부인이자 세노윅 사교계의 중심으로 사는 게 너한테도 더 좋을 텐데.”

    “전부 제가 바라지 않았던 것들이에요.”

    머리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 본심에 비비안느는 제가 내뱉은 말을 후회했다. 요원과 도망쳐 영원토록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짐작도, 복수를 다짐했던 것과 같은 맥락의 환상이라는 걸 이제는 알았기 때문이다.

    “유감이군.”

    에드문드의 목소리가 한참 낮아져 있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아이는 낳고 싶으면 낳아. 홑몸으로 귀부인 일부터 배우겠다면 그것도 상관없고. 자선 행사를 여는 법도, 회계도 배워야 할 거고, 외숙모 미술관을 상속받으려면 그림 보는 안목도 키워야 하겠지. 아버지께서 유세할 때나 연설하실 때 어머니 곁에서 콜트가 며느리처럼 구는 법도 알아야 할 거고.”

    “…….”

    “…비비안느.”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그가 종용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백작님.”

    비비안느는 에드문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입술 주위에 작은 키스를 남기며 그녀를 따뜻한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불을 더 덮어 주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시선을 쫓았다.

    “그런 건 제가 부모님과 먼저 상의하게 해 주세요.”

    “…….”

    “부탁할게요.”

    에드문드는 그렇게 말하는 비비안느의 나신을 보고 괜히 하반신에 피가 쏠리는 기분이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안느의 긴 머리카락이 목을 덮고 있어서 제가 베어 물고 흔적을 남긴 부분은 가려져 있었다. 그러고서는 몸을 살짝 일으키는 게 그의 눈에는 여신 같았다.

    에드문드는 물끄러미 비비안느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조금도 화나거나 실망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풀어 주려 노력할 수 있기라도 하지.

    새벽과는 달리 자신에게는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그녀가 어째서인지 거슬리면서도, 에드문드는 지금 제가 비비안느의 몸이 아닌 감정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타인의 감정을 읽는다는 개념 자체를 학습으로만 알고 있었던 그였기에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 비비안느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전화를 쓰게 해 주세요. 제가 백작님을 떠나지 않는다는 건 아시잖아요.”

    에드문드는 비비안느가 몸을 일으킬 때 그녀의 머리카락 아래로 숨겨지는 봉긋한 살갗을 제 귀여운 것이라 불렀다.

    하나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게 이제는 몸이 아닌 저 여자인 걸 보니 정말로 귀여운 건 비비안느 메르고빌 자체였다. 그는 담배를 피우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래.”

    거의 뭣에 홀린 듯이 흘러나온 말이었다.

    “고마워요.”

    비비안느는 상냥하게 대답해 주었다. 에드문드는 그 모습이 마냥 흡족해 그녀의 전화 통화에 별다른 조건을 붙이지 않고 넘겼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실수가 될 거라는 것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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