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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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문드 콜트에게 비비안느를 가지는 일은 생각만큼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섹스에 이성이 나가 버리기에는 그의 삶은 매 순간이 자극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매번 여러 개의 겹쳐진 줄 위를 걷는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무채색의 일상을 견뎠다.

    어느 날에는 그의 호적수가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걸했다. 범부들 눈에 보이지 않는 자명한 사실 같은 것이, 이를테면 돈의 흐름 같은 것이 명백히 보였고 그의 예상은 늘 완벽하게 적중했다.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은 그런 것뿐만이 아니었다. 세상 우스운 줄 아는 렉스가 애새끼 정부의 추종자 놈 목숨을 끊고, 화제의 정부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그다음 날 조간지로 바라보며 위스키를 들이켜는 일상이 당연했다.

    지극히 그의 편의적으로 돌아가는 삶이었다. 어느 날은 그게 당연했다가, 또 어느 날은 그게 재미없었다. 삶의 색채가 점점 흐릿해지다, 자극적인 살육의 핏빛으로 가득 차다가 그다음에는 그 빛깔마저도 점점 희미해져 버렸다.

    피비린내가 코를 스치는 감각도, 종류를 막론하고 상대와 하는 게임에서 승기를 잡는 것도 무감각해졌다. 그런 말이 적당한 것 같았다.

    하물며 거슬렸던 여자와의 섹스는 자극에 무뎌진 신경에 대단한 경종을 울릴 것이 못 되었다. 환상적이라던가. 불꽃이 튀는 것 같다던가. 가슴이 벅차 미칠 것 같다던가. 그가 늘 이겨 온 수컷들이나 하는 하잘것없고도 뻔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모든 게 다 끝나고, 돌아가는 것이 무섭다는 듯 옹송그리고 누운 이 여자의 허리를 끌어당기면 그 어느 때에도 느껴 보지 못한 안락함이 느껴진다. 그래. 그런 감각이었다.

    울긋불긋 멍 자국이 흐릿하게나마 남은 몸을 천천히 쓸어내리면, 이 여자가 제품에 있다는 감각이 현실로 다가온다. 저와는 달리 한없이 가녀린 어깨가 움찔거리는 걸 보면 이 여자가 이 땅 어디선가 다치고 있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고 섬세한 여체는 그가 여태껏 눈멀어 미처 알지 못했던 제 신체의 유약한 반쪽 같았고, 이제는 그녀가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면 곧 그 어떤 본능적인 안도까지 치미는 것이다.

    비비안느 메르고빌을 만난 첫 겨울, 이 여자의 뺨에 난 생채기조차도 어울리지 않았다. 신시아 이스트웰의 같잖은 도발로도 이 가녀린 여자의 대단한 자존심을 꺾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약혼자의 이야기에 어깨를 흠칫 떨던 그런 연약함이 보려 애쓰지 않아도 보였다.

    그때와는 다르게 세상이 두렵다는 태도를 가면 속에 감추고, 언론의 주목 속에서 새로운 질서 속에 자신을 끼워 맞춘 여자는 아직도 자신을 그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1년 전의 그 남자를 자신에게서 보며 죄책감에 떨고 있었다.

    그 마음을 이용하면서도 쉽게 입술을 삼키면서 그 눈물까지도 핥아 올리는 감각이, 사람을 미치게 했다.

    그러면서도 현실이라는 곳으로 강하게 끌어당기는 이러한 역치를 넘은 자극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그는 생전 느껴 본 적 없는 연체된 중력의 무게에 짓이겨진 것 같았다.

    그 긴 시간 동안 여태껏 느껴오지 못했던 현실감이 그녀를 알고 나서야 기다렸다는 듯 가중되어 돌아와 숨통을 틀어막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사람은 수단이자, 판단의 기준에 해당되는 것이라 여태 그런 유한함에 눈길을 둔 적 없다.

    하나 그녀의 목덜미가 눈에 들어오는 대로 키스하고, 좋을 대로 살을 깨물면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의 품 속으로 파고들어 오는 것이 마음속에 은밀한 소유욕을 지폈다.

    이 작은 것을 온전히 지배하고 소유할 수 있도록, 이 순간들이 영원하고 그 어떤 세력도 그녀를 앗아갈 수 없도록 네가 나를 두 번 다시 찾아내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나를 네가 실망의 눈빛으로 보는 일이 없도록, 처음 만났을 그때와는 다르게 다시는 나를 찾아내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네 예민한 감각이 너를 다시 배신하지 않았으면 했다.

    제 억양에 암흑가의 것이 섞여 있다는 걸 알아채는 그런 섬세함.

    오늘과 같이 다시 한번 요원의 이름을 부르며 1년 전의 그를 찾았던 그런 예리함은 늘 충실하게 반응해 그녀로 하여금 늘 그를 찾아내게 했다. 이 여자를 죽일 근거가 돼야 할 그런 이유들이 언젠가부터는 은밀한 기쁨이 되었다.

    에드문드.

    그녀가 떨면서도 억눌린 목소리로, 눈물 섞인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순간이 그의 가슴에 날아와 마음에 꽂혔다. 그래서 더 잔인하게 몰아붙이면서도 더 마음 깊이 품었다.

    그녀가 제 요원을 찾아냈다는 그 희망을 가차 없이 깨부수면서도 제 품에 안겨오는 그녀가 마냥 애틋하여 그녀를 해친 손으로 그녀를 쓰다듬었다.

    이런 것이 사랑일까 봐. 선연하게 가슴을 베어 내는 감각이, 그가 알지 못했던 두려움이라는 감정 같아서. 1년 전과는 달리 그새 야위어 버린 몸을 안고 이마에 입술을 맞추면 심장이 뛰며 살아 있다는 감각이 전신에 스민다.

    사랑이라는 것이 사전으로 정의된 일률적인 감정이 아니라면, 이건 그가 빚어낼 수 있는 가장 추악하고도 완전한 애정이었다.

    그렇게 잔혹한 것이라 하기에는 이 여자가 그를 볼 때마다 뛰는 가슴과 온몸에 느껴지는 미칠 듯한 감정이 어쩌면 순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 예민하고도 도도한 아가씨는 진실이 밝혀지면 그를 떠날 것이다.

    그러니 언젠가 너도, 다 똑같은 것들의 집합일 뿐인 이 세상의 회색빛에 녹아들기 전에, 닳도록 원하고 닳도록 품어서 조금이라도 더 가져야 했다.

    여자를 안는다는 말이 성교를 의미하면서도, 품에 넣어 숨을 삼키고 눈물마저도 핥아 낸다는 말임을 추위 속의 체온으로 알아낸다.

    스스로를 금수라 격하하면서도, 언젠가 네가 나를 버리면 나는 견디지 못하고 오늘처럼 내가 가진 것들로 네 삶을 망가뜨리겠지.

    내게는 숨 쉬듯이 당연했던 것들로.

    비비안느는 꽤 오랜만에 꿈을 꿨다. 꿈속에서 그녀는 1년 전으로 돌아가 그 요원과 헤어지기 직전 도개교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모든 건 그녀의 기억과 같이 진행되었다. 그 요원은 자신을 붙잡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그에게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당신, 이대로 가다가는 암흑가 수장에게 살해당할 거라고. 당신이 죽는 미래를 봤다고 설명했다. 그는 꼭 이상한 사람을 보듯 비비안느를 바라보았다.

    비비안느는 열심히 제가 겪은 것들을 빠르게 설명했다. 제도 중앙 경시청에서 당신이 살해당한 사진을 봤으며, 암흑가 수장이 이어 그녀가 타고 있는 차를 폭발시켜 그녀까지 죽이려 했다고. 그리고 자신은 그를 닮은 백작에게… 글쎄, 그 백작에게….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다 그만두고는 요원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이제 당신이 있으니 됐다고. 비비안느는 그에게 어디든 떠나자고 속삭였고, 그는 흐느끼는 비비안느의 등을 말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비비안느는 잠시 동안 죄악감을 느꼈다. 순간 자신의 처음이 이 요원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가 이제 그녀의 곁에 있으니 이제 이 남자가 어디선가 끔찍한 최후를 맞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녀가 그를 지켜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비비안느의 심장이 희망으로 가장 강렬하게 뛰었을 때 그녀는 몸이 천천히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녀가 그 모든 게 꿈이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어느새 어둠이 드리운 방은 여러 소리가 군집해 있었다. 벽난로의 장작에서 타닥타닥 타는 소리가 났고, 그 열기가 상당히 강렬해 겨울임에도 실내는 상당히 따뜻했다.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 목소리가 너무 시끄럽지 않을 크기로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캐롤리나 러셀라의 추종자를 살해한 혐의를 받았던 뤼드빅 렉스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것에 대하여 공분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와중에, 그와 과거의 악연이었던 왓킨스 양에 관한 관심 또한 점점 더 커지고 있는데요. 몇몇 사람들은 왓킨스 양이 이를테면 뤼드빅의 ‘비밀’ 연인이었다고 폭로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화제의 여배우 또한 왓킨스와 같은 피해자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왓킨스 양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감을 표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고 생각해요. 다만 제 목소리를 듣고 있는 여성분께 이건 말씀드리고 싶어요. 위험한 사람이 나에게만큼은 다정할 거라고 믿는 건 독이에요. 그런 사랑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죠.”

    “이 소식을 마지막으로, 현재 시각 열한 시를 알려 드리며….”

    11시.

    비비안느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켜 상황을 파악해 보려 했지만 손가락을 까딱할 기력도 없거니와 온몸이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아팠다. 그녀는 뜻 모를 향수에 가빠진 숨을 겨우 몰아쉬었다.

    “아…!”

    더부룩한 배를 움켜쥐고는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흘려 냈다. 몸을 옹송그리려는 순간 허리에서 격통이 밀려와 눈을 끔벅이며 문득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그녀는 원래 자신의 집이 그렇게 따뜻한 곳이 아니었으며, 이런 몸으로 돌아가 환영을 바라는 건 사치라는 걸 떠올렸다.

    낯선 사내의 침대 위에 맨몸으로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그녀는 겨우 몸을 일으켜 보려다, 작은 비명을 끽 지르고는 다시 침대에 털썩 누울 수밖에 없었다. 말을 하려 해도 목이 건조했고, 극심한 갈증이 느껴졌다.

    백작은 그녀를 내보내 줄까, 아니면 약혼해 주겠다고 구슬리며 계속 그녀를 취할 생각일까.

    그녀가 무력하게 눈만 끔벅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비비안느는 눈만 움직여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고는 빛 속 체형만으로 그 사람이 콜트 백작이라는 걸 알아챘다.

    왠지 그를 보는 게 어색해 겨우 돌아누웠다. 일단 지금 부은 눈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고, 그가 또 그 행위를 요구할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이런 몸 상태로는 싫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가 그녀를 덮쳐 온다면 그의 키스에 응할 거라는 것도 알았다. 저 남자가 얼마나 잔인하든 그가 자신의 약초 궐련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었으니까.

    그게 기만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그를, 아니 그마저 놓을 수 없었다. 그녀의 삶이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몸을 좋아했고.

    문가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고개만 살짝 돌려서 보았더니 트롤리였다.

    그녀를 이곳에 밀어 넣은 여인이 그걸 침대 앞으로 옮기고는 문 뒤로 사라졌다. 에드문드는 문을 닫고 들어왔다. 그가 재킷을 의자에 걸쳐 두고, 가죽 장갑을 차례로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추위를 탈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장갑을 자주 끼고 다니는 걸까, 비비안느는 의아해했다. 그는 그대로 트롤리에 놓인 작은 대야 같은 데에서 손을 씻고 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비비안느.”

    그 행동에 저절로 움츠러들며 입술을 달싹였다. 왠지 그의 앞에서는 다문 입이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잠시 후 남자의 단단한 엄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혀를 만졌다. 혀의 모든 돌기가 그의 손가락과 깔깔하게 얽혔다. 비비안느는 희미한 피의 철분 맛을 느끼며 입술을 벌린 채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비비안느의 등을 조심스레 받쳐 그녀를 일으켜 세워 준 후 다른 손으로는 베개들을 뭉쳐 그녀가 침대 헤드에 머리와 어깨를 기댈 수 있게 했다.

    그가 곧 트롤리를 가까이 끌고 와 따뜻한 꿀차를 찻잔에 따르고는 은제 티스푼으로 떠 그녀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혀끝에 남은 꿀, 귤 과육과 계피의 향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 배 속을 어루만지는 느낌이었다.

    비비안느는 맨몸으로 그가 주는 걸 받아먹는 상황이 부끄러워서 긴 머리카락으로 가슴을 가리면서도 꿀차가 담긴 티스푼이 가까워지면 입술을 열었다.

    그녀가 차를 그만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티 포트가 비워졌고, 그가 티스푼을 내려놓는지 달그락 소리가 났다. 이어 사내의 손길이 그녀가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 냈다.

    다시 품으려는가 싶어서 비비안느는 그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내려앉은 건 입술이 아니라 따뜻한 물수건이었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피로한 근육을 풀어 주었다. 흰 피부를 가리고 있는 긴 생머리를 조심스럽게 옆으로 치워 내고 그의 손길에 다시 예민해진 곳들도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물수건의 온기로 스쳤다.

    에드문드는 물이 식으려 할 때면 몇 번이고 다시 뜨거운 물이 담긴 포트를 대야에 기울여 그녀의 온몸을 정성스럽게 닦아 냈다. 그 온기가 사라지고 몸이 조금 으슬으슬해졌을 때 그가 목욕 가운을 꺼내 그녀에게 입혀 주었다.

    비비안느의 몸을 안아 들어 한쪽 팔에 가운 소매를 끼워 넣어 당기고, 다른 팔에도 똑같이 한 뒤 그녀의 몸을 다시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그가 그녀를 너무나도 가볍게 들어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조금도 불편하지 않게 가운을 입을 수 있었다.

    그녀의 몸이 폭신한 매트리스에 돌아갔을 때 이불을 그녀의 턱 아래까지 덮어 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비비안느는 멀어지는 그의 입술을 손으로 더듬었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가 그녀를 버릴 것인지. 약혼에 대한 말은 진심이었는지. 그의 표정이라도 살피고 싶었지만 주변이 어두운 탓에 보이는 건 실루엣이 전부였고, 촉감으로는 그 이상의 정보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을 이렇게 아프게 만든 그에 대한 증오심이 들기는커녕 그에게서 나는 타바코와 달콤한 향이 요원을 떠올리게 해, 괜히 제 마음만 아파 왔다. 그가 이렇게 자신에게 상냥하게 대해 주는 건 언제까지일까. 다른 시녀들을 시켜서 할 수도 있는 일을 그는 직접 해 주지 않았나.

    그녀의 손가락이 떨어지자마자 그가 가까워져, 이번에는 따뜻한 입 속 살덩어리로 그녀의 입 안을 탐색했다.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사내의 흔적이 남지 않았나 살피는 아주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비슷하긴 했다.

    그녀의 다리를 쓸던 손이 스르르 올라와 그녀의 턱을 잡았을 때 비비안느는 생경한 금속의 촉감을 느끼고는 그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자신이 그걸 의식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곧 사내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비비안느는 아쉽다는 듯 입을 달싹였지만 그는 다시 그녀에게 숨을 나누어 주는 대신 슈트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어둠 속이라 유심히 봐야 했지만 크기나 실루엣으로 봤을 때, 작은 상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상자 위에 키스한 후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끌어당겨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무언가를 꼭 끼워 주었다. 비비안느는 본능적으로 그게 그의 손가락에서 느낀 감촉, 그가 낀 반지의 나머지 한쪽임을 알았다.

    뤼드빅이 준 반지는 정사이즈도 아니었던 데다가 빠져나가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가벼웠는데, 백작이 준 건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아도 묵직한 보석의 크기가 느껴졌고, 크기도 꼭 맞아 절대 잃어버릴 수가 없었다.

    비비안느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 위를 더듬어 그가 준 반지의 촉감을 느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어딘가로 떠났던 그가 다시 돌아와 그녀에게 입을 맞춰 왔을 때, 비비안느는 그의 셔츠가 사라진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서는 좋은 비누 냄새가 났고, 머리는 물기에 살짝 젖어 있었다.

    손에 착 감기는 단단한 살갗은 뜨거운 물을 맞아 그런지 불처럼 뜨거웠다. 비비안느는 요원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향수 냄새도 좋았지만 이런 남성적인 체향, 가장 투박한 살 내음도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비비안느는 그가 하려는 일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 요원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죄책을 느끼면서도 현실을 바라보려 노력했다.

    이 남자라도 없으면 자신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 심리적으로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그녀는 모든 면에서 그가 필요했다. 그가 그렇게 만들었고, 그녀는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비비안느는 그가 자신을 뒤로 밀어내는 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그러다 목욕 가운의 끈이 있는 곳에서 그의 손을 잡았다.

    요원이 아니라 백작이랑 교접하는 거라는 사실을 실감하자 부끄러워지기도 했고, 지금은 많이 지쳐 있기도 해서였다. 그녀가 그의 손을 놓아주자 그가 물러섰다. 순간 떠나는 그의 모습에 꿈속의 요원이 겹쳐 보였다.

    비비안느는 그 순간이 두려워져 스스로 가운의 끈을 풀어냈다. 그가 그녀를 서투르다고 생각하고 버리는 건 바라지 않았거니와 아까는 볼썽사납게 그의 품에서 울기만 했었던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의 손을 가져와 대자 손끝이 제 몸을 쓸어내리고는 아까 물수건으로 미처 풀어 주지 않았던 곳으로 향했다. 비비안느는 손 아래 잡히는 이불을 꼭 움켜쥐었다.

    이제는 옳은 길을 알려 주던 이성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것은 이 남자의 손길에 가슴이 뛴다는 것이었고, 그녀는 그를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는 것이었다.

    설령 그녀에게 돌아온 남자가 그 요원이 갖지 못한 겉껍데기만 갖춘 사내일지라도.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훌쩍임을 삼키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는지, 에드문드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눈물로 범벅이 된 비비안느의 볼을 핥아 올렸다. 비비안느는 그에게 더 가까이 밀착해 그의 등 근육을 쓰다듬고, 그의 품에 파고들어 체향을 느꼈다.

    한참 그렇게 그에게 심취해 있을 때 그가 하던 일을 재개했다. 곧 그녀의 서투른 다리가 그의 허리를 겨우 감았다. 다시 입술이 맞닿고 숨이 섞였을 때 그녀는 훌쩍거리면서도 그의 혀를 강렬하게 죄어 왔다.

    이번엔 그의 목 깊은 곳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그녀의 입은 그가 넘겨주는 타액을 잘 받아먹는 법을 배운 것이다. 에드문드는 그걸 아는지 낮게 앓는 소리를 자꾸 흘려 냈다.

    그녀는 계속해서 새어 나온 그의 우악스러운 숨을 작은 입으로 모두 삼켜 냈다. 어찌나 거칠게 그를 삼키고 꿀떡이며 먹으려 했는지 그가 상체를 그녀에게서 떨어트리고 그녀의 착하디착한 얼굴을 보았을 땐, 부르튼 입술 밖으로 그의 타액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가 그걸 엄지로 훔쳐 주며 화답하듯 비비안느의 살갗이란 살갗에 모두 입을 맞추었다. 그가 내뱉는 예쁘다는 말은 어조도 무디고 언어에 꾸밈이 없어 조금도 세련되지 않았지만, 그랬기에 더 진심처럼 느껴졌다. 어딘가 이성이 나가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에.

    때마침 쇄골 쪽을 지분거리던 그의 입술과 손길이 아래로 향하자 닫혀 있던 그녀의 입이 열리며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몸이 더 달아올라 깊은 곳이 끓는 걸 느끼며 어깨를 비틀었다. 그럴수록 그가 남기는 자극은 거세어져만 갔다.

    그렇게 그는 꽤 긴 시간 동안 그녀의 지친 근육을 한계까지 혹사시키며 그녀의 결핍을 흘러넘칠 정도로 채워 주었다.

    그가 그녀와 엉킨 채로 몸을 뉜 뒤 그녀를 끌어당기자, 비비안느는 강렬하게 쿵쿵 뛰는 심장 위를 베고는 품의 체온을 느끼며 잠을 청했다. 자신의 녹진한 몸을 계속 쓰다듬어 주는 사내의 손길이 느껴졌다.

    계속해서 드는 생각은 가족에 관한 것도, 앞으로의 일도, 깨어진 약혼에 대한 것들도 아니었다. 아까의 꿈이 진짜였다면 그녀는 요원과 어디로 도피했을까. 애초에 그가 그녀를 위해 그가 가진 요원직과 삶을 버려 줬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러지 않았겠지.

    정답을 알고 있었기에 원래 계획도 수상과 협상해 그 요원을 보상으로 얻어 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 요원의 얼굴을 하고서도 어떤 조건 없이 그녀를 누구보다도 더 강렬히 원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암흑가 수장을 만나겠다는 결심은 흐려져만 갔다.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이런 행위를 하는 건 틀림없이 견디기 힘들 터였다.

    남녀 간의 일을 알고 나니 정혼자가 아닌 이들과 몸을 섞는 게 두려워졌다. 무엇보다도 비비안느는 이 남자를 놓고 싶지 않았다.

    그 무수한 이유에도 단 한 가지, 콜트 백작은 그를 지켜 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죽어 버린 요원은 다를지도 모른다는 게 생각나 감긴 눈이 번쩍 뜨였다.

    백작에 대한 끌림이 아주 조금이라도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녀가 이렇게, 완벽하게, 요원의 손을 놓아 버리면 그의 죽음은 평생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할 것 같아서….

    비비안느는 이 남자에게 안기는 그 순간에도 지켜 내려 했던 그 요원을 아직도 포기하지 못했다는 것에 낮은 한숨을 쉬었다. 제가 행복할 방안을 찾았음에도 이 생각들이 자꾸 막아서서. 그래서 그녀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곧 방에 새근새근 숨소리가 이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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