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14)
  • ❖ ❖ ❖

    같은 시각, 제도 중앙 경시청.

    킹슬리 셸던은 제도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도의 중심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이번에는 사업이 아닌 다른 문제였다.

    그가 제도 중앙 경시청 유치장에 뤼드빅 렉스에 대한 접견 신청을 넣은 것은, 순전히 심술 때문이다.

    그는 오늘 안부 인사를 핑계차 외숙모에게 전화했다. 그러다 슬슬 제 본 목적을 드러내자 공작 부인이 비비안느를 데리고 미술관에 갈 예정이라고 말해 주었다. 제가 동행을 요청하자 공작 부인이 에드문드와 비비안느의 사이에 대해 마침 할 이야기가 있다며 거절한 것이다.

    그 여자가 제 사촌 따위에게 벌써 몸을 내어 준 건가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비싸게 굴던 게, 감히. 행선지를 경시청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던 킹슬리는 시가의 끝을 자근자근 물었다.

    모양 빠지게 에드문드와 비비안느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고, 그러다 보니 암흑가 세력의 책사일지도 모른다는 영애의 약혼자 놈이 떠오른 것이다.

    제도의 사람이라면 웬만해서는 몸을 사렸겠지만 킹슬리 셸던은 제 영지에서 워낙 왕처럼 군림해 제도 정계의 정교한 섭리를 몰랐다. 그러니 당연히 제 접견 신청이 받아들여졌다고 믿었고, 별다른 생각 없이 경시청으로 향했다.

    뤼드빅 렉스 놈은 접견실에 마치 피에 굶주린 한 마리 사자같이 걸어 나와 어디 지껄여나 보라는 낯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옆에는 굽신거리는 딘켈 경감을 끼고서는. 이곳에 있는 내내 고생은 하지 않았는지 신수가 아주 훤했다.

    ‘암흑가의 책사라지? 내가 마침 그쪽이 아는 변호사 하나랑 거래했는데.’ 따위의 말로 거들먹거리려던 킹슬리의 의지는 이미 사그라든 지 오래였다.

    무슨 인간이 살기를 저렇게 뿌려 대.

    킹슬리는 속으로 속된 말을 지껄이면서도 정작 뤼드빅을 보고는 한마디도 못 한 채 이곳에 온 이유를 꺼내 놓았다.

    처음에는 들어나 주겠다는 표정이 더더욱 매서워지자 킹슬리는 신이 나서 그가 외숙모를 통해 전해 들은 일을 과장에 과장을 덧대 털어놓았다.

    “담배.”

    뤼드빅이 경감을 보고 말하자 경감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공손히 건넸다. 받아든 그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니 경감은 친히 재떨이를 가져와 뤼드빅의 옆에서 고개를 기울여 들어 주기까지 했다.

    “내 여자가 콜트 백작과 붙어먹은 게 분명하다는 데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셸던 남작.”

    뤼드빅이 붉은 눈이 경감에서 다시 킹슬리에게로 옮겨 오자 그는 굳었다. 킹슬리가 다시 재잘거리기 시작하자 뤼드빅은 느른한 눈으로 유리창 반대편을 훑다 그쪽으로 연기를 뱉었다.

    이야기를 다 들었을 때 뤼드빅은 실소하고 있었다. 웃는 것도 무섭네. 킹슬리는 혼자 쪼그라들어서 속으로 웅얼거리다가 뤼드빅과 시선이 마주치자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올 때 봤던 그 여배우 추모 행렬도 저 새끼 작품…. 듣자 하니 눈앞의 이 새끼가 그 여배우의 추종자를 잔혹하게 죽였다고 했다.

    여배우는 충격에 못 이겨서 자살.

    그러고도 그는 아직까지 여기 유치장에서 멀쩡히 있었다. 꼭 무언가를 기다리는 작태로.

    놈이 킹슬리 자신을 쳐다보며 물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네가 나를 죽이지 않는 거요….

    하마터면 속에 있는 말을 내뱉을 뻔했던 킹슬리는 우물쭈물 상당한 액수의 금액을 제시했다.

    그래. 차라리 돈을 노렸다고 하자. 질투 같은 어쭙잖은 말을 던졌다간 제 약혼자의 추종자니 뭐니 하고 저도 하루아침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었다.

    “원하는 게 그깟 푼돈이 전부면 지금 당장에라도 내어 줄 수 있습니다. 내 변호사가 셸던가에 금방 연락할 겁니다.”

    “예, 예….”

    “계속 그렇게 멍청히 앉아 있을 겁니까? 유감인데, 내가 남색가는 아니라서.”

    킹슬리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그럼.’ 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놈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때마침 킹슬리의 맞은편에서 뜻밖의 사람이 가까워졌다.

    ‘와, 저 배지면 치안총감인데.’

    내가 잘못 봤나.

    하지만 킹슬리는 제대로 본 것이 맞았다.

    치안총감은 킹슬리가 비운 의자 앞에 뒷짐을 지고 섰다.

    “경시청 꼴 잘 돌아가는군그래.”

    딘켈 경감이 황망히 그를 바라보다 재떨이를 놓쳤다. 치안총감의 입매에 조소가 어렸다.

    치안총감이 뤼드빅과 그를 가로막은 유리창을 주먹으로 노크했다. ‘들리나, 자네?’ 그 말에 뤼드빅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들리는군.’ 마치 동물원 창살 뒤의 맹수를 다하는 투였다. 그렇게 말한 치안총감이 입을 열었다.

    “유감스럽게도 자네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날 수 없는 물증이 내 손에 들어왔네만.”

    “…….”

    “그래도 내가 ‘익명의 제보자’와 한 약속이 있어서 아쉽게도 자네를 지금 당장은 풀어 줘야겠군.”

    뤼드빅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을 때 치안총감이 혀를 찼다.

    “젊은이가 이렇게 성질이 급해서야 쓰나. 조건이 하나 있네.”

    “뭡니까.”

    “메르고빌 영애와의 깔끔한, 뒤탈 없는 파혼.”

    “하, 보아하니 보스께서 아랫것 여자라도 탐하시려는 모양입니다. 신문을 열심히 읽으시나.”

    뤼드빅에게서 흘러나온 건 명백한 비아냥이었다. 치안총감 뒤에 누가 있는지 아주 잘 아는 목소리였다.

    “계약서는 가져왔습니까.”

    뤼드빅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이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