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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느는 공작 부인의 랭스턴 리무진을 타고 공작저에 돌아왔다. 공작 부인은 에드문드가 저택에 없으면 돌아올 때까지 며칠 더 묵고 가도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비비안느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렇다면 편지를 쓰고 떠날 생각이었다.
에드문드는 역시 저택에 없었다. 비비안느가 그 사실을 알려 준 시녀에게 알겠다고 말하고 뒤돌려 할 때, 시녀가 에드문드에게 전화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비비안느는 어색하게 손을 내저으며 그럴 필요까지 없다고 말했지만 시녀는 이미 멀어진 지 오래였다.
비비안느가 기대 없이 편지를 쓰고 있을 때 등 뒤로 문이 열렸다. 가까워진 담배 냄새에 비비안느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에드문드는 화장대 위의 편지를 말없이 집어 들어 읽기 시작했다. 비비안느가 빼앗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에드문드가 하, 하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그 모습이 제까짓 게 나를 두고 도망치려 했다, 이렇게 읽혀서 비비안느는 더이상 그와 시선을 맞출 수 없었다.
“메르고빌.”
그의 손이 비비안느가 앉은 의자를 돌려놓고는 그와 시선을 맞추게 했다. 이 정적이 그녀는 불편했지만, 이번에는 감히 항의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우리 애부터 가질까. 왜, 끝까지 하지 못한 게 그렇게 아쉬웠어?”
“아뇨.”
“편지에 그렇게 쓰여 있는 것 같은데. 오늘 그것 때문에 네가 화가 많이 났다고.”
“…제게 질리신 걸 이해하고, 저도 어차피 각하를 요원에 겹쳐 본 것뿐이니까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게 어떻게 그렇게 읽혀요.”
에드문드는 피식거리며 편지를 구겨 뭉쳐진 수십 개의 편지지 옆에 하나를 더했다.
“왜 멋대로 구겨요. 이 저택에서 저는 편지를 쓸 자유도 없나요?”
비비안느는 종종거리며 그를 따라가 그가 앉은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저 백작님 좋아한 적 없어요.”
그 말에 담배를 꺼낸 백작이 비비안느를 바라보았다. 더 말해 보라는 듯해 비비안느는 용기 내어 말을 꺼내 놓았다.
“조금이라도 여지를 드렸던 건… 제가 심적으로 힘들었고, 각하께서는 그 요원을 닮아서. 대용품으로 잠시 이용했을 뿐이에요.”
“대용품으로, 이용했다.”
비비안느는 그의 목소리가 이렇게 굵어지는 순간이 무서웠다. 그녀는 애써 그의 손에 들린 담배 끝을 바라보려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더 이상 기만할 수는 없었다.
“그건 백작님도 마찬가지잖아요. 절 얼마나 아신다고요.”
“…….”
“제 몸을 원하신 거잖아요.”
비비안느에게 그건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녀는 잠시였지만 제 몸을 원하는 그가 좋았다. 그녀가 달아올라 그에게 더한 걸 요구하던 걸 그가 거절한 것도… 조금 부끄럽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그러니까 이 말을 한 건 당신은 내게 원하는 게 몸뿐이고, 그것조차도 쉽게 꺼져 버릴 가벼운 흥미일 뿐이라는 걸 다 알고 있으니 우리 어른답게 오늘까지의 일을 매듭짓자는 권유였다.
그래, 나도 어른이지, 이제 스물셋인데. 비비안느는 다소곳이 앉은 채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방금 말도 저를 당황하게 하려는 거였다는 거 알고요. 저한테 마음 줄 생각 없으신 것도 다 이해하니까… 우리 정리하자는 거예요. 피차 좋게. 백작님도 이만하면 제 밀고에 대한 값은 다 치르셨으니 갈 길 가시라는 거고요.”
“…….”
“대신 제가 뭔갈 알아 오면 꼭 수상 각하께 전해 드리겠다는 약속을 해 주세요.”
에드문드는 결연한 비비안느의 표정을 훑다가 픽 웃었다. 그녀가 무어라 쫑알거리든 그의 머릿속엔 ‘제 몸을 원하시잖아요.’ 그 한마디만 남아 있었다.
신기하게도 비비안느는 감이 꽤 좋았다. 하여튼 그녀 스스로도 제 귀여운 몸뚱어리를 포함해 빼놓을 곳 없이 이쁜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비비안느가 제 폭신폭신한 코트를 여미며 시선을 피했다. 저러는 게 귀여웠다. 너무 귀여워서 당장에라도 한입에 잡아먹고 싶었다. 그래도 그녀가 그를 두려워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는 참을성이 꽤 좋은 편이었지만 비비안느를 상대로는 달랐다.
“그런 것치고는 내가 너무 관용을 베풀지 않았나?”
그의 담배 끄트머리가 천천히 내려가 그녀의 허리 부근에서 멈추었다.
“제일 맛있는 부분은 또 남겨 뒀잖아, 내가.”
그 말에 비비안느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걸 끝까지 해 주지 않아서 삐졌다는 말로 알아들은 게, 왜.”
“백작님.”
“왜요. 배려해 준 게 눈물 나게 감동적이라 이제라도 내 앞에 엎드릴 생각이라도 나서?”
“…….”
“기분 좋게 해 줄 수 있는데. 이번엔 어느 쪽을 질질 흘리게 만들어 드릴까. 위쪽? 아니면….”
“하지 마세요. 저한테는 장난 아니에요.”
비비안느의 눈가에 눈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에드문드는 그런 그녀의 부어오른 눈시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밀려오는 욕구를 참아 가며 조용히 자리를 뜨는 관용까지 베풀어 주었는데 어른 취급 안 해 준 게 화났는지, 아니면 뭐가 불만인 건지.
에드문드는 담배를 재떨이에 올려 두고 두 소파 사이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글라스에 위스키를 채웠다. 다시 한번 몸을 뒤덮는 열기가 이끄는 충동질을 애써 억누르기 위해서였다. 그는 얼음 없이 위스키를 들이켜며 소파에 기댔다.
“끝내자며.”
탁한 목소리였다. 비비안느는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끝내기 싫은데. 네 맘대로 끝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전 렉스가의 차남과 약혼….”
“그럼 그걸 끝내 달라 말했어야지.”
에드문드는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비비안느는 이 대낮에 그가 술을 마신다는 사실에 놀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품위 있는 귀족들은 해가 떨어지기 전 술을 마시는 것을 천하게 여겼다.
차라리 저 옆에 있는 과실주를 마시지. 둘 다 비비안느가 만찬 식탁에서 선물로 받고는 이곳에 보관하던 것이었다. 하나는 킹슬리가 준 과실주. 다른 하나는 공작이 제가 선물로 받은 것을 쓸 만한 빈티지(Vintage)라며 비비안느에게 건네준 것이었다.
“우리 아가씨께서는 항상 원하는 걸 내 입으로 말해 줘야 알지. 안 그래?”
“…….”
비비안느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 수 없었다. 키스도, 옷을 사이에 두고 몸을 겹치는 것도 그녀가 다 내밀하게 원했던 것들이었다.
정말 그녀가 원하지 않는 건 그가 그녀를 버리는 것이었다. 여태껏 마음이 불안했던 이유는 그가 더 이상 그녀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새삼 현실이 자각되었고, 그 또한 흥미가 사그라들었고, 그녀도 멈출 수 있을 때 확실히 매듭을 짓자고 생각했다. 돌아가면 부모님께 사실을 고백할 것이다, 그리고 파혼 허락을 받아 낸 뒤….
달칵, 하고 위스키 글라스가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이자 비비안느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래요. 내가 그쪽 몸을 원해.”
에드문드가 사이드 테이블을 한 손으로 가벼이 들어 그녀 쪽으로 더 가까이 밀어 놓자 그 위에 놓인 위스키 글라스가 중심을 잃고 쓰러져 카펫에 액체를 흘려 놓았다. 질 좋은 카펫이 진하게 물들어 갔다.
“그리고 넌 내 얼굴이 좋고.”
“아뇨. 제게 질리셨잖아요.”
“그렇게 생각했어? 글쎄, 난 네가 내 얼굴에 질리지만 않았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버클에 손을 대 허리띠를 풀자 비비안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뤼드빅은 항상 허리띠를 손에 쥐고 그녀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윽박지르곤 했다.
에드문드는 마치 총기를 바닥에 내려놓아 무장 해제를 하듯 소파 위에 벨트를 툭 놓고는 비비안느를 바라보았다. 비비안느는 일순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들킨 것 같아 심장이 아래로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의 앞에서 뤼드빅에게 그러했듯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떨었다.
비비안느는 애써 평소의 말투를 쓰려 노력하며 말했다.
“공작 부인을 뵙고 왔는데… 이불보에 피가 묻는 일이 없었으니, 없었던 일로 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럼 깨끗한 이불보부터 준비하면 되겠네.”
에드문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기묘하게 화가 난 것 같은 어조였다.
“마침 말을 같이 탄 날 그쪽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서 쥐어 보는 건 어떤 느낌일까, 하고 생각했거든. 넌 날 항상 궁금하게 하니까.”
비비안느는 이 말이 자신이 했던 말, 그러니까 그가 그녀에게 흥미를 잃었는지 아닌지 따위의 투정에 대한 확실한 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네가 내 앞에서 무릎 꿇으면 오늘 있었던 일은 없던 거로 할까.”
그가 재떨이에 내려놓았던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애를 가지고 싶으면 날 기쁘게 해 줘야지, 비비안느.”
비비안느가 움츠러들자 그가 오만하게 담배 끝에 불을 붙이고는 말했다.
“키스하면 약혼자를 빼내 주겠다고 했잖아. 파혼도 알아서 처리해 준다고 했는데, 네가 이렇게 참을성 없이 굴고 반항하면 내가 기분이 나쁘지.”
“…….”
“아니면 지금이라도 암흑가 수장한테 가서 애원해 보시든가. 약혼자도 버렸고, 가족도 버렸고, 경찰인 오빠도 버린 데다가 나 좋다고 붙잡은 백작도 버렸다고. 그러니까.”
“백작님.”
“그러니까, 죄송한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친히 없애셨으니 같이 저승길 걸어 주셔야겠다. 그런데 오는 길까지 안내받는 값으로 만난 사내새끼들이 조금 많아서 늦었다.”
“싫어요.”
비비안느가 고개를 숙인 채 말하자 에드문드의 날카로운 시선이 누그러들었다.
“왜.”
“…….”
“암흑가 수장은 아무나 다 만나게 해 줘? 그럼 그래야지. 가는 길에 시키는 거 다 하다 이왕 만지게 해 줄 거 암흑가 수장한테 그 예쁜 것도 보여 줘야지.”
“…무서워요.”
“내가 이러는 게?”
“암흑가의 수장이요.”
비비안느는 그 말을 하면서 울었다.
“제가 그토록 없애고 싶은 사람이 너무나도 막강해서… 타협하게 되는 저도 무섭고, 백작님이 주시는 온기에 익숙해지는 것도 무섭고, 그리고.”
비비안느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백작님이 저를 버리실까 봐 무서워요.”
그 말에 에드문드는 낮게 웃었다. 혼자 저 조그마한 머리로 온갖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게 귀여워서였다.
“그럼 내 앞에 와서 그러지 말아 달라고 예쁘게 부탁하셔야지.”
“전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어요. 애정을 구걸하고 싶지도 않고요.”
“그러면 이럴 때 내가 그 요원이 아닌 게 참 다행이겠네. 안 그래?”
“…….”
“그놈은 죽었고 네 남은 선택지는 하나인데, 나는 네가 그렇게 되바라지게 굴면 기분이 나빠지거든. 네가 상냥하게 부탁해야 다시 곱게 결혼해 줄 마음이 생기겠는데.”
“실례했어요.”
비비안느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마음이 변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면 그가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고 그걸 이용해 또 다른 감언으로 육욕을 풀어내려는 걸지도.
그녀는 아무리 비참해질지언정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필연적으로 그의 약점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녀가 그를 좋아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될 관계를.
저 남자를 기쁘게 해 주면서 희망 고문당하는 건 정부(情婦)나 할 법한 일 같았다. 차라리 옳은 길을 가자. 더 잘못되기 전에 가족에게 돌아가 용서를 빌 것이다.
제 일탈을 고해하고 약혼자와 파혼하며… 계획대로 암흑가의 수장을 찾아갈 수 있을까.
그에게 마음을 내어놓고 이제는 모든 걸 외면하며 바닥까지 길 용기는 없다는 걸 알았으니 부디, 그녀 자신에게 남은 벌을 이겨 낼 용기를 주시길 신께 기도하고 또 기도할 것이다.
그녀는 공작 부인이 대기시켜 놓은 걸로 보이는 랭스턴에 몸을 실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요원의 얼굴을 한 남자가 저렇게 무례하게 구는 걸 봤으니 이보다 더 최악이 어디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를 떠나는 게 조금도 좋지 않았다.
제게는 늘 짓궂으며 몸을 탐할 뿐인 무뢰한의 거짓말에 속아 버린 걸까. 비비안느는 애써 그 감정이 요원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려 노력했다.
이건 죽어 버린 그에 대한 마음일 뿐이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속은 후련했다.
차가 제집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