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14)

“평생의 비밀은 없다고 생각해요.”

비비안느는 몇 걸음 더 걸은 뒤 숙고한 바를 차분히 말했다. 그녀는 공작 부인과 합심해 에드문드를 속이는 일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에드문드는 그녀를 구해 준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지금 당장 그녀는 그를 기억 속 요원을 닮은 사람으로만 보고 있다는 사실이 죄스러웠다. 맹목적인 애정에 목말랐던 것이다. 게다가 몸이 달아서 그를 이용했을 뿐.

지금도 그녀는 그의 기만자인 거 아닐까, 비비안느는 그런 생각이 들자 자신이 몸서리쳐질 만큼 싫어졌다.

에드문드가 자신을 남겨 두고 자리를 피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니면, 달아오른 제 얼굴이 이상해 보여서일까?

그러자 기분이 더 가라앉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의 흔적이 있는 가슴 쪽에 주홍 글씨라도 붙은 느낌이었다.

에드문드가 만약 감정을 정리한 거면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비비안느는 그 불씨의 잔여물을 치울 때라고 생각했다.

달거리가 가까워져 몸이 달아올라 있었고, 그와 함께 지내는 동안 마음이 흔들린 적도 여럿이었다. 그가 그걸 알아챘다는 듯이 달려들어 그녀는 그 일련의 행위들을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하나 그녀는 ‘보호’를 받기 위해 공작저에 신세를 지고 있는 처지였다. 언제까지고 이어질 수 없는 일탈이었고 외설이었다. 그를 통해 상처를 위로받겠다는 건 덧없는 환상일 뿐이었다.

생각을 마친 비비안느는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하며 말했다.

“귀부인께서 직접 말씀해 주신다니 그걸 제 입으로 말할 필요도 없어서 다행이겠어요. 전 아직 레이디가 되기에는 많이 부족해 말을 고르는 데에는 서투르거든요.”

비비안느의 그 말에 난색이 된 건 공작 부인이었다. 말을 고르는 데 서슴없었던 공작 부인은 자신이 방금 잠시간 품위를 잊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비비안느는 조곤조곤 말을 이어 갔다.

“공작 부인께서 입을 여시면, 어머니께서는 제가 더럽혀졌다며 당장 렉스가에게 파혼을 요구하고 저를 백작 각하에게 팔아 치우려 하실 것 같지만… 제가 보기에 백작 각하께서는 제게 마음이 떠난 것 같으셔서요.”

비비안느는 그 말을 하면서도 가슴이 욱신거리는 걸 느꼈다.

백작은 그 요원도 아닌 데다가 입도 거칠고, 성품도 몹쓸 남자였다. 하지만 그에게 몸을 주고 나니 마음의 아주 작은 부분도 따라간 걸까.

그녀는 그 사실을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냥 가벼운 호기심이었던 모양이죠. 책임질 필요 없는 감언으로 끌어들였다가 언제든지 흥미가 사라지면 두고 떠날 생각이셨다든가.”

“…….”

“하지만 에드문드 콜트 백작 각하는 결혼이라는 족쇄를 원하지 않을 부류처럼 보이지 않던가요? 흥미가 떨어진 여자를 공작 부인의 말 한마디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 같은 거, 반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

“그러면 원하는 바를 이루기 더 힘들어지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공작 부인은 떨리는 입매를 힘겹게 끌어 올리며 말했다.

“내가 쓸데없는 말을 했군요.”

그녀는 아까와는 다르게 훨씬 더 점잖은 말투였다.

“우리는 비밀 하나씩을 나눠 가지게 된 셈이 되었고.”

“예, 공작 부인.”

“레이디의 생각이 그렇다면 나도 조언을 받아들여야겠어요. 나는 또, 두 사람이 아주 깊은 관계라도 되는 줄 알고 쓸데없는 착각을 했지 뭔가요.”

그녀는 아닌 척 비비안느에게 가까이 다가와 팔짱을 꼈지만 비비안느는 그 상황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깊은 관계라도 되는 줄 알고 쓸데없는 착각을.

그 말을 타인의 입으로 듣고 제 처지를 자각하니 그간의 일이 얼마나 무모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요원 대신 저에게 의지하라는, 백작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되는 줄 알았다.

잠시나마 그 달콤한 순간이 영원할 줄 알았다. 충동에 내던져져 쾌락에 몸을 떨었을 때에는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세상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 상냥함은 없다는 걸 알고 경계했어야 했는데.

그녀는 레이디 메르고빌로서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실감했다.

“오늘 내가 한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겠어요?”

공작 부인이 그렇게 말했으나, 고작 자신의 조카가 가지고 놀고 버린 여자에게 부탁을 하는 것치고는 너무 살랑거리는 투였다. 비비안느는 그제야 공작 부인이 아쉬운 위치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네. 그동안 공작저에 머무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가려고요? 벌써.”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제가 공작 부인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 귀부인께서도 그게 편하지 않으시겠어요?”

정곡을 찔린 공작 부인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간 제가 먹고 자며 진 신세는 그걸로 갚을게요. 갤러리를 구경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

“백작 각하께는 제가 직접 인사를 드리고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정리하고 떠나고 싶은데, 귀부인께서 도와주시겠어요?”

“솔직히 백작이 레이디를 데리고 왔을 때는 그렇게 좋지 않은 언론가 평판에다, 위험한 사내들을 꼬이게 할 단정하고 고운 용모 때문에 퍽 좋게 보이지만은 않았어요.”

공작 부인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비비안느는 고개를 숙인 채 ‘예, 공작 부인.’ 하고 공손히 대답했다.

“그런데 잠시나마 영애를 알게 된 지금은, 영애가 내 조카며느리로도 썩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감사합니다…. 귀부인.”

“영애는 내 약점을 잡고 백작의 관심을 끌어 보려 했을 수도, 내 남편한테 내 밑바닥을 보여 내게 언성을 높이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내 위치에 놓였을 때 나와는 다른 관용을 보여 주는군요. 그 점을 높이 사겠어요.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나와 더 걷도록 해요. 이곳 미술관을 제대로 구경하게 해 줄 테니.”

“네, 귀부인.”

비비안느는 공작 부인과 함께 갤러리를 구경했다. 공작저의 시녀장이 말한 것처럼 이곳은 정말 아름다웠는데, 꼭 시대의 가장 뛰어난 화가들이 세노윅 가문의 온 역사를 화폭 안에 박제해 놓은 하나의 박물관처럼 느껴졌다.

그 아름다움에 매료당한 비비안느는 이곳을 이어받는 세노윅의 안주인이야말로 진정한 공작 부인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꾼 이가 자신의 옆에 있는 현 공작 부인이라 생각하니 그녀가 이곳의 소유자가 될 상대를 고름에 있어 신중한 이유도 이해할 수 있었다.

비비안느는 잠시 대공황이니, 엠머하임의 추락이니, 차관이니 하는 당대의 문제들을 잊고는 잠시 할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던 ‘귀족들의 시대’로 녹아들었다.

그녀의 이름이 고작 약혼자가 앗아 갈 명예로운 훈장 따위보다 더 큰 가치가 있었을 때. 그 환상이 그녀의 눈시울을 잠시 붉게 했다.

그건 그녀가 저런 세상에 살고 있었다고 믿었던 한때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때문이었고.

저 위엄 있는 세노윅 공작 옆에 선조인 메르고빌 후작의 자리 하나쯤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주는, 스스로를 향한 어설픈 위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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