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120)화 (120/120)
  • 외전 10화

    몇 년 뒤 페이런의 수도.

    늘 활기찬 수도의 번화가는 오늘따라 유독 더 붐비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표정도 들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던 청년이 가게 옆에서 해를 쬐고 있던 할머니에게 물었다.

    “저, 오늘 무슨 날인가요?”

    “아이고. 모르쇼?”

    “예. 제가 외국에 있다가 몇 년 만에 와서…….”

    머쓱해하는 청년의 말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모르셨구먼. 오늘이 피어트 공작 각하의 생신이잖우.”

    외국에서 돌아온 청년이 눈을 깜박였다.

    “공작 각하의 생신이요?”

    청년의 목소리에 의문이 묻어났다.

    공작이 어마 무시 하게 높은 신분이긴 했지만, 이곳은 피어트 공작가의 영지가 아니고 페이런 왕국의 수도였다.

    “이상하네요. 왕실의 생일도 아닌데, 사람들이 축제처럼 신나 하고.”

    “몇 년 만에 왔다더니 진짜 소식에 깜깜이구먼.”

    할머니가 혀를 차며 자기 귀를 가리켰다.

    “그래서 총각은 이것도 안 하고 있는 거야?”

    할머니의 한쪽 귀에는 은색으로 반짝거리는 장신구가 달려 있었다. 청년은 귀에 걸치는 이어 커프 모양의 장신구를 유심히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거 걸치고 다니던데요. 그게 뭡니까?”

    “마법통신기라네.”

    “……그건 뭐예요?”

    “멀리 있는 사람하고 이걸로 대화를 할 수 있다네.”

    “예에?”

    기겁하는 청년의 반응에 할머니가 우쭐해하며 홀홀 웃었다.

    “놀랐나? 나도 처음엔 무슨 귀신 수작인가 했지 뭔가.”

    “아니, 어떻게…….”

    “몇 년 전에 마탑주와 수호자가 결혼한 건 알지?”

    할머니가 설명했다.

    페이런 최고의 인기인으로 페이릴리라 불리던 레아 피어트 공녀. 그녀가 마법사가 되고, 아르카이크 오켄 황태자를 죽여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마탑을 세운 뒤 마탑주가 된 일은 아직까지도 화제였다.

    혜성같이 나타나 그 옆을 차지하고 함께 황태자를 물리친 미남 헬릭스. 그가 수호자라는 대단한 권능의 소유자였다는 사실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런 마탑주와 수호자가 결혼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돈지랄을 벌였던 것이다.

    “……페이런 사람들을 전부 결혼식에 초대했다고요?”

    “그렇다니까.”

    할머니가 생각하니 또 벌렁벌렁한다며 가슴을 누르며 말했다.

    “마탑에서 직접 일일이 결혼식 초대장을 가져왔다니까. 그러면서 미리 주는 하객 답례품이라면서, 이 마법통신기를 준 거야, 글쎄.”

    “헉…….”

    청년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입을 뻐끔댔다.

    할머니는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 직접 당한 사람들도 그랬다.

    돈을 쓰는 스케일에 1차 혼란, 웬 듣도 보도 못 한 마도구라는 물건에 2차 혼란, 그걸 마탑주와 수호자가 보냈다는 것에 또 혼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탕이었다.

    “아니, 결혼식 초대장을 전 국민한테 돌리고, 거기 미리 선물을 다 보냈다고요? 그럼 그 선물은 결혼식 안 와도 받으란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렇지.”

    “통이 커도 너무 큰데요? 가만, 그거 위험하잖아요. 이렇게 귀한 물건을 다 주면 누가 빼앗아서 팔면 어쩌려고요.”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그렇게 욕심부리는 놈들이 있었지. 그런데 마탑주님은 이미 조치를 다 해 두셨지 뭔가.”

    마법통신기는 본인의 마나를 넣어서 사용하는 거라, 한 번 쓰고 나면 다른 사람은 쓸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와…… 미친.”

    청년이 얼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법제국을 외치던 오켄 제국은 지금 몇 년째 내전으로 황폐해져, 유학 중이던 그는 몇 년간 죽을 고생을 해서 돌아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사이에 고향 페이런 왕국은 마탑주가 마도구를 마구 뿌리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니.

    “어, 할머니. 나 지금 들어갈게요! 넘어지잖아, 나와 있지 마!”

    “자기야, 장보러 나왔는데 먹고 싶은 거 없어? 자기 좋아하는 사과 나왔는데.”

    옆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제각기 마법통신기에 대고 대화하는 것이 들려왔다.

    페이런 왕국 사람들은 이제 마법통신기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귀족과 부자들은 보석과 금으로 장식된 프리미엄 마법통신기를 자랑하는 게 유행이라, 새 마법통신기만 나오면 눈에 불을 켜고 구하려 들었다.

    독점 생산 및 공급하는 마법의 탑과 피어트 상단의 부가 나날이 쌓여 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와, 오셨다!”

    들뜬 얼굴로 연신 하늘을 쳐다보던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마탑주님! 수호자님!”

    아이들이 외치며 손을 흔들었다. 청년은 아이들을 따라 시선을 들었다.

    수도의 창공 높이, 커다란 배가 천천히 날아오고 있었다.

    “와! 이번 비행선은 금색인가 봐! 멋있다!”

    금빛 비행선 옆에선 드래곤 해츨링들이 작은 몸 가득 위엄을 뽐내며 수호하듯 함께 날았다.

    청년은 눈을 깜박였다.

    자신이 지금 고향에 돌아와서 헛꿈을 꾸는 건지, 이게 현실인지 헷갈렸다.

    “아얏!”

    “아니 총각, 왜 자기 뺨은 때리고 그래?”

    ❀ ❀ ❀

    금빛 비행선은 피어트 공작저 위에 멈췄다.

    휘이이이.

    레아 가족이 비행선에서 바람마법에 감싸여 내려오기 시작했다.

    공작 저택에서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피어트 공작이 뛰어나왔다.

    “내 강아지들!”

    “할아부지!”

    엄마 아빠의 팔에서 놓여난 아이들이 도르르 굴러가듯 뛰어갔다. 공작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아이구! 이쁜 것들! 다친다, 천천히 와!”

    “천천히 오라는 사람이 왜 자기가 달려가고 그래요?”

    공작부인이 타박하면서도 웃으며 뒤따랐다.

    그녀가 레아와 헬릭스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생일은 아직 며칠 남았는데 뭘 벌써 오니.”

    “미리 오면 얼굴도 오래 보고 좋잖아요.”

    “하긴 네 아빤 애들 보고 싶어서 몸살 났다. 나도 애들 얼굴이 어른어른하더라.”

    공작부인이 헬릭스의 건강까지 묻고 있을 때까지 공작은 손주들에게 푹 빠져서 돌아보지도 않았다.

    레아가 헬릭스의 팔짱을 끼면서 투덜댔다.

    “우리 아빤 이제 내 얼굴도 안 보고 싶으신가 봐.”

    “그럴 리가.”

    픽 웃은 그가 작게 속삭였다.

    “네 옆에 내가 딱 붙어 있으니 그러시는 거 아니겠나.”

    “그럼 잠깐 떨어질까?”

    헬릭스가 말없이 팔짱 낀 손을 잡아 단단히 손깍지를 끼었다.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돌리다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

    피어트 공작이 고개를 돌리며 다시 손주들에게 웃음 지었다. 레아가 헬릭스에게 속닥였다.

    “……헬릭스 네 말이 맞았나 봐.”

    “나와 결혼해서 멀리 사니까 더 그러신 것 같다.”

    공작은 헬릭스를 고마운 사위로 여겼지만 어쨌거나 사위는 사위였다. 금보다도 다이아보다도 귀한 내 딸을 데려간 사위.

    그는 괜찮다고 하다가도 ‘아빤 안 보고 싶냐’ ‘언제 또 수도에 올 거냐’ ‘마탑엔 헬릭스 두고 너 혼자만이라도 와라’ 하면서 서운한 티를 내곤 했다.

    속으로 폭 한숨을 쉰 그녀가 남편에게 물었다.

    “우리 텔레포트 마법진 어디까지 개발했지?”

    “조금만 더 하면 된다. 완성하면 바로 마탑에서 여기까지 오게 설치해야겠군.”

    “맨 처음으로 하자. 안 그러면 아빠 더 삐지시겠어.”

    “삐지다니. 그 소리 아버지가 들으시면 더 섭섭해하실걸?”

    다정한 목소리에 레아가 고개를 돌렸다.

    “큰오빠.”

    “잘 왔네. 오는 길은 별일 없었지?”

    리케일 소공작이 웃으며 동생과 헬릭스를 맞이했다. 그녀가 끄덕이며 물었다.

    “유리아는?”

    “곧 리리아를 데리고 나올 거다.”

    리케일은 유리아 세이건 공녀와 결혼해서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트로우 경의 납치에서 구해 내 피어트 공작저에 숨기고 보호할 때, 리케일은 유리아를 조용히 배려해 주었지만 둘 사이에 연심은 없었다. 유리아는 고마워하고 리케일은 동생이 데려온 그녀가 좀 안쓰러웠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 사건 후유증으로 유리아가 남자를 무서워하게 되면서 일이 달라졌다.

    그러나 저를 구해 준 레아와 꼭 닮은 얼굴의 리케일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배려해 주었던 기억도 다시 떠올리기 시작하니 자꾸 생각났다.

    그 감정이 사랑으로 변하는 데에도, 그 사랑이 들키는 데에도, 상대에게 번지는 데까지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서로의 감정을 확신한 둘은 양가의 축복을 받으며 빠르게 결혼했다.

    “그럼 이제 작은오빠만 오면 되겠다.”

    “루얀은 이틀쯤 있다 올 거라고 하더라.”

    “요즘 우리 중에 작은오빠가 제일 바쁘네.”

    루얀은 국경 부근의 오켄 제국 잔당들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혼란에 싸인 제국의 옛 변경백이며 탈영병들이 도적인 척 자꾸 국경의 피어트 영지를 찔러 대는 탓이었다.

    원래도 소드마스터인 루얀에겐 상대가 안 되는 놈들이었다. 피어트 공작가에선 이제 루얀이 전투에 나갔다는 말을 무슨 단기 출장처럼 여기고 있었다.

    “빨리 국경이 안정돼서 루얀 오빠도 좀 쉬어야 할 텐데.”

    “그놈은 전투 없으면 심심하다고 더 날뛸 놈이야.”

    ❀ ❀ ❀

    모인 가족들은 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피어트 공작 저택의 정원은 위명에 걸맞게 화려하면서도 우아했다.

    볕을 가리는 하얀 가림막 아래 야외에 어울리는 녹색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였다. 계절에 어울리는 주홍빛, 자줏빛 진한 꽃들이 테이블을 수놓듯 치장하고 진한 향기를 뿜어냈다.

    “엄마, 이뻐!”

    레릭스가 정원에서 꽃을 따서 달려오며 환하게 웃었다. 햇빛에 금발이 해사하게 빛나고, 회색 눈은 웃는 법밖에 모르는 것처럼 예쁘게 접혔다. 천사 같은 미소에 보고 있던 어른들이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레아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헬레아가 타박했다.

    “엄마가 예쁘단 거야, 꽃이 예쁘단 거야?”

    “둘 다!”

    레릭스의 해맑은 대답에 헬레아가 새침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린데도 벌써 찬바람 도는 냉미녀 같은 얼굴이 흔들리자, 긴 은발이 찰랑찰랑 함께 흔들렸다.

    “그게 뭐야. 분명하게 해야지.”

    “진짜 다 이뻐.”

    “에휴.”

    한숨을 쉬던 헬레아의 표정이 바뀌었다. 멀리서 손을 흔들며 붉은 머리 소녀가 뛰어오고 있었다.

    “헬리!”

    “리리!”

    금세 생기 넘치는 얼굴이 된 헬레아가 의자에서 뛰어내려 달려갔다. 서로 팔을 벌려 답삭 껴안은 두 소녀가 까르르 웃었다.

    “둘이 너무 좋아하네.”

    레아가 웃으며 말했다. 옆으로 다가온 유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리리아가 헬레아가 온다고 일주일 전부터 난리지 뭐예요.”

    “헬레아도 어젯밤 잠을 제대로 못 자더라.”

    그렇게 말하는 레아의 눈 밑도 거뭇했다. 옆에 앉아 있던 헬릭스가 몸을 기울였다.

    “레아, 들어가서 잠깐 눈을 붙이는 게 어떤가.”

    “그래요. 애들은 여기서 놀면 되니까 둘이 들어가 좀 쉬어요.”

    유리아도 말했다.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피곤해…….”

    공작 저택에는 아직 레아의 방이 그대로 있었다. 레아는 오랜만에 익숙한 침대에 몸을 던지며 앓는 소릴 냈다.

    비행선을 타고 해츨링들의 수호를 받으며 와도, 역시 애들 챙겨서 오는 여행은 쉬운 게 아니었다.

    “하녀를 좀 더 데려올 걸 그랬나 보군.”

    “그럼 비행선 속도가 느려져서……. 하아암.”

    하품하는 그녀에게 헬릭스가 다가왔다. 큰 손이 다정하고 담백하게 얼굴을 쓰다듬었다.

    “으응…….”

    처음엔 뺨만 조심스럽게 만지던 손이 점점 능숙하게 움직였다. 힘 있는 손길이 눈썹 뼈를 더듬고, 눈두덩과 귀 뒤 우묵한 곳을 꾸욱꾹 눌러 시원하게 해 주었다.

    얼굴의 긴장이 풀리며 노곤해져 왔다. 레아는 저도 모르게 졸린 눈이 되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벌써 자는 건가.”

    헬릭스가 낮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긴 손가락이 그녀 속눈썹 아래에 대고 슬쩍 쓸어 올리듯 건드렸다.

    “응…….”

    이미 반쯤 잠에 취한 레아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퐁.

    그의 손가락이 아주 약하게 마나를 건네 왔다.

    둥근 이마에도, 코에도, 입술에도. 헬릭스의 손가락이 약하게 머물다 가는 나비처럼 레아의 얼굴에 마나를 뿌렸다.

    그 자잘한 애정 표현에 미소를 띠며 레아가 눈을 접었다.

    오랫동안 아픔에 시달렸던 침대 위에서, 그녀는 이제 새털같이 가벼운 몸으로 누워 있었다. 조금의 여독에도 그녀를 살피는 남편과 함께.

    레아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여전히 수려한 얼굴이 그녀에게 오롯이 집중하며 기울었다. 은발에 오후의 햇살이 닿아 눈이 부셨다.

    “헬릭스.”

    부름에 그가 웃었다. 레아를 향해 몸을 내리던 커다란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끌어안았다.

    사라락.

    커튼이 가벼운 바람에 흔들리는 사이로 아이들의 높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앞으로도 이렇게 행복하게 살게 되겠구나.

    온몸을 채우는 예감에 레아는 헬릭스의 품에 파고들었다. 단단한 몸을 마주 안자, 예감은 확신이 되어 그녀를 몽글몽글 채웠다.

    이 남자와 함께, 오래오래.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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