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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119)화 (119/120)
  • 외전 9화

    사생팬들을 회오리바람으로 휩쓸어 멀리멀리 날려 보낸 뒤.

    마탑은 잠시 평화를 찾았다.

    “탑주님…… 그놈들은 어디까지 날려 보내신 겁니까?”

    “오켄 제국.”

    레아의 말에 마탑 관리소장은 입을 떡 벌렸다.

    “농담이야. 그냥 여기서 사흘 거리쯤 되는 곳까지 보냈어.”

    관리소장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그래도 죽이진 않으셨군요.”

    사생팬들 중에 페이런 왕국의 귀족들이 많아서 걱정된 모양이었다. 그녀가 후후 웃었다.

    “아마 지금쯤 죽고 싶을걸.”

    “예?”

    “피어트 공작가 영지랑 맞닿은 곳으로 보냈거든.”

    “……여름이면 작은 공자님께서 거기서 수련하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관리소장은 이마를 짚었다.

    봐주는 것 같더니 결국 이런 일에 가장 적합한 루얀의 손에 떠넘긴 모양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작은오빠도 요즘 철이 많이 들었잖아? 죽이진 않을 거야. 아마도.”

    “예, 아·마·도· 그러시겠지요…….”

    사생팬들은 진짜 죽는 게 나았다 여기가 지옥이라 울부짖고 있지 않을까.

    그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눈앞의 마탑주나, 소드마스터 루얀이나, ‘왜? 뭐? 왜? 이 정도면 자비롭지’ 하며 당당할 이들이었다.

    ‘독 사건을 생각하면 자비로우신 게 맞긴 하지…….’

    그런데 왜 더 무섭지.

    부르르 떨던 관리소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이고 나도 모르겠다.

    그는 포기한 표정으로 비척비척 물러났다.

    ❀ ❀ ❀

    레아와 헬릭스는 정령을 찾아서 보물 창고로 향했다.

    창고를 열자마자 둘은 말을 잃었다. 온 창고 안이 붉은빛이었다.

    “이 빛이 다…… 저 목걸이에서 나온 거야?”

    레아가 감탄 반, 어이없음 반에 고개를 저었다.

    헬릭스는 굳은 얼굴로 계속 빛을 뿜는 루비 목걸이 옆으로 다가갔다. 목걸이 옆에서 작은 정령이 바들바들 떨며 그를 올려다봤다.

    “제, 제 잘못이 아닙니다.”

    정령의 말에 그가 조용히 번쩍이는 루비 목걸이를 가리켰다.

    “아니에요, 저거 원래 안 저래요. 저번에 창고에 오셨을 때도 안 저랬습니다. 보셨잖아요?”

    “나는 분명히 사람들이 마법사들을 좋아하게 해 달라고 했다.”

    헬릭스는 차갑게 말했다.

    “너는 대마법사 안데르의 이름을 걸고 약속했고.”

    “정말 제 탓이 아니란 말입니다!”

    정령이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저는 마법을 발동시킬 뿐이라고요! 마법을 이루는 힘은 부탁한 사람이 얼마나 연인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사랑의 힘으로 이뤄지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레아가 끼어들어 물었다.

    “헬릭스가 날 너무 많이 사랑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라고?”

    정령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법이 강력할 수밖에 없잖아. 발동 조건을 처음부터 말해 줬어야지.”

    레아가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물러 줘.”

    “……예? 사랑의 소원을요?”

    “안 물러 주면 대마법사 안데르에 대한 기록을 바꿀 거야.”

    그녀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대로 설명도 안 해 주고, 문제가 생기니까 책임도 안 지는 정령을 만들었다고. 그런 문제를 일으켜서 사후에 대마법사 지위 박탈당했다고.”

    사랑의 정령이 입을 딱 벌렸다.

    헬릭스가 옆에서 작게 혀를 찼다.

    “저런. 마탑주, 그런 슬픈 일이 있었나? 안타깝군.”

    책을 읽는 것 같은 성의 없는 연기였다.

    정령의 붉은 눈이 지진 난 듯 흔들렸다. 그는 깨달았다.

    이 연인은 서로한테만 푸딩처럼 무른 인간들이었다.

    ‘정령에게 자기를 만든 마법사의 명예를 가지고 협박하다니!’

    인간한테 ‘너 이러는 거 부모님은 아시니’라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치사하십니다!”

    레아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응. 그러니까 물러 줘.”

    ❀ ❀ ❀

    정령은 이미 들어준 소원을 완전히 무르는 건 어렵다고 통사정했다.

    레아는 그런 정령을 어르고 혼내 가며 소원을 조금 수정하는 걸로 합의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마법사들을 아주 조금 좋아하는 정도로 바꾸는 거죠?”

    “그래. 사랑이나 집착까지 안 가는 작은 호의 정도로 해 줘.”

    정령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마법이라면 10년 정도는 될 것 같네요.”

    볼이 움푹해진 그가 레아와 헬릭스를 쳐다보았다.

    “두 분 예쁜 사랑하시고요, 우리 다시 보지 말아요…….”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다.”

    헬릭스가 레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마지막까지 염장을 지르는 두 연인을 보며 정령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목걸이가 반짝이더니 그가 휙 사라졌다.

    “진짜 다시 볼 일 없겠지?”

    “없다.”

    제 손에 쥐어진 그녀의 손을 가만가만 문지르며, 헬릭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레아가 웃었다.

    “그럼 이제부터 마탑 이름으로 좋은 일도 많이 하고 힘도 더 키워야겠다. 10년 후에 호의가 사라져도 사람들이 마탑이랑 마법사를 존경하게.”

    “레아 너는 얼마든지 해낼 수 있을 거다.”

    신뢰가 가득 담긴 눈빛에 마음이 새삼 간질간질했다. 그녀가 그를 올려다봤다.

    “그야 난 잘하겠지만, 혼자 하면 힘든데.”

    “그런가?”

    “응. 아주 믿음직하고 잘생긴 애인이 이럴 때 같이해 주면 딱 좋을 거 같은데.”

    “이런.”

    헬릭스가 미소 지으며 레아의 뺨을 잡았다.

    “딱 그런 애인이 옆에 있지 않나.”

    “그러게. 어쩔 수 없네? 애인이랑 같이해야겠다, 그치?”

    그녀가 큰 손에 얼굴을 잡힌 채 환하게 웃었다.

    그는 결국 못 참고 레아의 얼굴에 자잘하게 입맞춤을 퍼부었다. 간지럽다며 꺄르륵대던 그녀가 헬릭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고마워.”

    “뭐가 말인가.”

    “더포드 남작 강냉이 털어 줘서.”

    그는 순간 분위기를 잊고 뿜을 뻔했다.

    “강냉이……? 이를 부순 걸 말하는 건가?”

    “응. 야무지게 합죽이로 만들었던데. 일부러 그런 거지?”

    그걸 눈치채고 있었나.

    헬릭스가 약간 머쓱해하며 말했다.

    “네게 독을 먹이려 했던 걸 떠올리니 그만.”

    “맞아. 그놈, 나한텐 그래 놓고 지는 잘 먹어서 얼굴이 번들번들하더라?”

    “그러니까 말이다. 마음 같아선 다른 곳도 더 부숴 놓고 싶었다.”

    그렇지만 레아와 마법의 탑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참았다. 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잘해 봤자 몇 년 더 연명할 거다.’

    피어트 왕국에 이를 치료하는 치료법 같은 건 없었다. 더포드 남작은 앞으로 씹지 못하니 소화기가 약해지고 영양부족에 시달리다 시들시들 말라죽을 운명이었다.

    “레아.”

    헬릭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번에 그 범죄자 놈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가 속삭였다.

    “그런 미친놈들에게 기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내게 와 줘서 고맙다.”

    “……다쳤는데.”

    레아가 꼼질대며 말했다.

    “다쳤지만 헬릭스가 다 치료해 줬잖아.”

    “……역시 더 때릴 걸 그랬다.”

    지금 품 안에 있는 그녀가 열에 들끓던 때를 생각하니 피가 식었다. 헬릭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레아 네가 왜 그리 마법사들의 평판에 신경 썼는지 알 것 같았다. 사교계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나.”

    일방적인 애정, 제 것으로 못 삼으니 깎아내리는 모욕, 악의적인 후려치기.

    그런 일들을 겪었으니 마탑과 마법사들의 평판에도 민감했으리라.

    “……그것만은 아니야.”

    레아가 작게 말했다.

    “애써 씩씩하게 말할 것 없다. 힘들지 않았나.”

    “으…… 이건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민망해하던 레아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마법사 평판은 헬릭스 위해서 그러려고 한 건데.”

    “나를?”

    헬릭스는 놀랐다.

    “헬릭스, 마법사들이 차별받을 거라 이야기하면서 무척 씁쓸하게 웃었던 거 알아?”

    “…….”

    그의 큰 손이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잡고 제게서 떼어 냈다. 얼굴을 보고 싶었다. 레아가 새빨개져서 말을 이었다.

    “마법사 애들이 아이스바 가지고 나갔다가 동네 양아치들한테 뺏겼을 때도 엄청나게 화냈잖아.”

    “…….”

    헬릭스의 침묵에 그녀가 눈치 보듯 그를 살폈다.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나한테 실망했어?”

    레아가 머뭇머뭇 말했다.

    “헬릭스처럼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

    근데 네가 제일 신경 쓰이는 걸 어떡해. 작게 변명처럼 덧붙이는 말에, 헬릭스의 가슴은 터질 것 같았다.

    자신이 레아를 위해 마탑과 해츨링과 세상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레아 또한 그를 위해 제 주위를 바꾸고 있던 것이었다.

    “……레아, 반대다.”

    그녀의 이런 면이 자신을 미치도록 행복하게 했다.

    공작가 사람들이 마탑을 세운 뒤 저를 붙들고 하던 말들이 떠올랐다.

    ‘우리 레아는 사랑을 받고 줄 줄 아는 아이라네.’

    ‘그 애는 귀족이란 관습에 얽매여 있던 우리에게 가족끼리 사는 기쁨이란 걸 알려 주었어. 레아가 행복하면 된 거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가 틀렸다. 레아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를 사랑해 주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큰마음을 받아도 되는 사람인가?’

    두려웠다.

    지금 이 순간이 물거품처럼 깨질까 봐 무서울 정도로 행복했다. 헬릭스가 꽉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를 위해서라도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싫어.”

    그녀가 도리질 쳤다.

    “난 지금의 헬릭스도 너무 멋진걸. 더 좋은 사람 같은 거 안 되어도 돼.”

    레아가 그에게 팔을 둘렀다.

    “그냥 내 옆에 있어 줘.”

    네 옆에.

    이렇게.

    헬릭스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얼굴을 내렸다. 부드럽게 윗입술을 제 입술로 비비고, 말캉한 아랫입술을 물었다.

    천천히 시작된 입맞춤에 레아가 눈을 감았다.

    혀에서 건네지는 마나에 전기를 맞은 양 그녀가 파드득 떨었다. 레아는 매달리듯 헬릭스를 붙들었다.

    배 속 깊은 곳에서, 심장에서, 화염마나와 바람마나가 반응하듯 함께 휘몰아쳤다.

    그녀는 그를 꽉 잡았다. 이렇게 감당하기 힘든 마나가 쏟아질 때면 늘 이런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서 아득히 멀어지다가, 끝없이 추락하는 느낌.

    그리고 그 부유감 속에서 늘 자신을 붙들고 제 곁으로 끌어오는 헬릭스.

    이렇게 낯설고 강한 힘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에 때때로 놀라도, 그는 언제나 붙들어 줄 것이다. 변함없이 곁에 있어 줄 것이다.

    “너무 좋아…….”

    헬릭스가 너무 좋아. 레아가 흘린 작은 목소리에 그의 손길이 급해졌다. 손가락 하나하나에서 열감과 마나가 함께 넘어와, 그녀는 못 견디고 헬릭스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 투정 같은 몸짓에 그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렀지만, 그 웃음조차 여유라곤 없이 바짝 말라 있었다.

    “나의 레아.”

    그가 불렀다.

    “나의 마탑주. 나의 드래곤로드.”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헬릭스가 그녀의 눈썹 위에 키스했다.

    “나의 푸른 불꽃.”

    조급하고 마른 목소리가 누르고 있는 감정은 욕망일까, 독점욕일까. 그가 소원을 빌듯이 뇌까렸다. 언제까지라도, 제일 가까운 곳에서 네 눈이 빛나는 걸 보고 싶다고.

    나도 그래. 그녀가 헬릭스를 끌어안았다. 그가 레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와 결혼해 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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