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118)화 (118/120)
  • 외전 8화

    “……역시 나 하나만으로는 부족한 건가?”

    그는 연인의 매끄럽고 따뜻한 등을 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살냄새, 고른 숨소리, 느린 심장 박동이 잡힐 듯 가까웠다. 모두 제 품 안에 있었다.

    그런데도 이토록 마음이 수런거리는 이유가 뭘까.

    “나는 레아 너 하나면 되지만.”

    헬릭스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네게도 그걸 바라면 안 되는 거겠지.”

    그가 레아를 더 깊이 끌어안았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연인이 깨어나지 않아 다행이면서도, 이대로 잠들어 있는 게 조금 서운했다.

    “…….”

    그때였다.

    억지로 눈을 감으며 잠을 청하는 헬릭스를 향해 정령이 포르륵 날아들었다.

    “꿱!”

    번개같이 잡아챈 그의 손 안에서 정령이 비명을 질렀다. 헬릭스의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조용히 해라. 깬다.”

    “께……. 끕! 끄끕!”

    자는 애인을 깨웠다간 이대로 눌러 버릴 기세였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정령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헬릭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제 손에 잡힌 것을 살펴보았다.

    “……정령?”

    정령이 최대한 공손한 표정으로 또다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헬릭스는 레아에게서 조심스레 몸을 떼었다. 돌아앉은 그가 정령에게 물었다.

    “뭘 하러 왔나.”

    아주 작고 낮은 목소리였다.

    정령은 바짝 긴장해서 역시 작게 대답했다.

    “소, 소원을 들어드리러 왔습니다.”

    말하고 보니 소원 들어주러 와서 이렇게 저자세로 덜덜 떨어 본 적이 없었다.

    어쩐지 억울해진 정령이 덧붙였다.

    “사랑의 소원을 들어드리려고요.”

    “사랑의 소원?”

    뜬금없는 말에 헬릭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수작인가. 정령들이 대가 없이 소원을 들어주고, 그게 사랑의 소원이라니. 그럴 리가 없다.”

    어째 이 무서운 인간은 정령에 대해 잘 아는 모양이었다.

    사랑의 정령이 더욱 공손한 표정이 되어 설명했다.

    “저는 그런 자연의 정령이 아니고, 만들어진 사랑의 정령입니다. 대마법사 안데르의 정령이라고 들어 보셨을지도…….”

    “대마법사 안데르라면, 워낙 추남이라 300년 동안 여자들한테 차이기만 하다가 죽은 그 마법사 말인가?”

    더 짙어지는 의심의 눈초리에 정령이 열심히 손을 저었다.

    “진짜 순수하게 사랑 소원만 들어드립니다! 저주 같은 거 하나도 없어요!”

    “…….”

    “정말입니다! 안데르가 얼굴은 그래도 마음은 얼마나 호구……. 아니, 고왔는데요!”

    “으음.”

    헬릭스도 속으로 그 말에 동의했다.

    ‘좀 음흉한 성격이긴 했어도, 남에게 저주 같은 건 못 걸 인물이었지.’

    그가 납득한 것 같자 정령은 조심스레 헬릭스 앞을 날았다.

    “저, 보니까 애인 때문에 불안하신 거 같은데.”

    “…….”

    “사랑의 소원, 빌고 싶지 않으신지?”

    정령이 손을 비볐다.

    “애인이 나만 바라보게 만들어 줄 수도 있습니다. 날 볼 때 사랑이 몇 배가 되게 해 줄 수도 있고요.”

    “됐다.”

    헬릭스는 몸을 돌렸다. 레아의 자는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그런 마법을 쓸 거였다면 예전에 썼겠지.”

    “예에?”

    정령이 혼란에 빠져 있는 걸 놔두고, 헬릭스는 레아의 뺨을 가만히 만졌다.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이 걸렸다.

    그저 뺨을 만질 뿐인데, 아무 이유 없이 가슴이 꽉 차는 기분이 들었다. 헬릭스가 그녀의 얼굴을 쓸었다.

    정말 이상했다.

    이 여자 옆에 있으면 자신은 더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제 연인의 행복을 바라고, 원하는 것을 이뤄 주고 싶은 그런 평범한 남자로.

    헬릭스가 사랑의 정령을 돌아보았다.

    “그 사랑의 소원이란 거, 여러 사람한테도 쓸 수 있나?”

    ❀ ❀ ❀

    헬릭스는 정령에게 소원을 빌었다.

    레아가 바라는 대로, 마법사들이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소원의 힘이 생각보다 너무 강력했다.

    “마법사다!”

    “마법사님이다!”

    “마법사님, 이거 하나 드시고 가세요!”

    시작은 평화로웠다.

    헬칸 시내로 나가 군것질하는 마법학교 아이들에게 상인들이 닭꼬치도 쥐여 주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던 것이다.

    “와. 마법사라고 이거 공짜로 주는 거야?”

    “우리가 세긴 센가 보다!”

    잠깐 좋아하며 우쭐해하던 마법학교 아이들은 곧 무서워하며 마탑으로 도망쳐 왔다.

    “으악 탑주님! 수호자님! 살려 줘요!”

    “탑주님! 어헝……!”

    소동에 달려 나온 레아의 얼굴이 굳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놀러 나갔던 마법사 애들은 엉망인 모습이었다. 마법학교 교복 단추며 머리카락이 뜯겨 나가고, 어떤 아이들은 소매나 신발이 사라진 채였다.

    “너희 왜 이래? 싸웠어? 누가 이랬어?”

    “어헝…… 사람들이, 사람들이 막…….”

    “머리카락이랑 단추랑, 막 뜯어 갔어요! 눈이 무서웠어요!”

    “평생 간직하겠다고 막 염소 소리 같은 소리도 냈어요!”

    뭐지, 이거.

    레아는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어디서 보고 겪었던 상황인데……?’

    그녀가 기억을 더듬는 동안 해츨링들이 화를 내며 뛰쳐나갔다.

    “쿠왕!”

    “삐비삐!”

    그리고 몇 분 만에 도망쳐 들어왔다.

    “쿠어어…….”

    쿠앙이가 질린 목소리로 울었다. 레아의 눈이 흔들렸다.

    ‘쿠앙이까지?’

    쿠앙이가 누구인가.

    세상천지 겁나는 게 거의 없는, 몇 개월 차 드래곤 해츨링이셨다. 자기가 쿠앙앙 울면 강해서든 귀여워서든 인간들이 다 진다는 걸 알고 있는 녀석인데.

    “쿠어어엉…….”

    ‘레아, 미친 사람들이 온다. 무섭다. 마법사들 다 죽나 보다.’

    쿠앙이의 울음에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고 밖을 내다보았다.

    쌍둥이 마탑을 둘러싸고 진을 친 사람들이 보였다.

    “마법사님들! 사랑해요!”

    “마법사 누나, 절 가져요!”

    “비켜! 이 마탑을 기어 올라가서라도 마법사님 얼굴을 볼 거야!”

    레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사, 사생팬?”

    ❀ ❀ ❀

    심각한 사태에 헬릭스가 털어놓았다.

    “아무래도 사랑의 정령에게 빈 소원 때문인 것 같다.”

    그는 정령에게 ‘사람들이 마법사들을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말한 일을 설명했다. 레아가 입을 뻐끔댔다.

    이 야단법석이 헬릭스가 그녀를 생각해서 대신 빌어 준 소원 때문이라니.

    “미안하다, 레아.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헬릭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좋아하게 해 달라고 했지, 좋아한다고 미쳐 날뛰게 해 달라고 했나?”

    일단 상황을 정리하고, 정령을 찾아서 마법을 되돌려야겠다.

    결심한 그녀의 귀에 끼기긱 급정거하는 마차 소리와 말 울음소리들이 들려왔다.

    “공녀님! 아니 마탑주님!”

    우렁찬 목소리들이 부르짖었다.

    “사랑합니다!”

    헬릭스의 얼굴이 분노로 새파랗게 질렸다.

    “이 무도한 자들이 남의 애인한테…….”

    “헬릭스, 진정해! 저 사람들 다 제정신 아니야!”

    흘깃 내다봤던 레아의 얼굴이 썩었다. 페이릴리 팬클럽 때의 사생팬들이 속속들이 도착하며, 마탑 앞은 더 혼란의 도가니탕이 되고 있었다.

    “놔라, 이런 사랑의 햇병아리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마탑주님이 데뷔하시기 전부터 피어트 공작가를 훔쳐보던 사람이다!”

    “……저자는 범죄자 아닌가?”

    헬릭스의 낯빛은 이제 잿빛이 되어 가고 있었다.

    “지, 진정해, 헬릭스. 저 인간들이 원래 제정신이 아니긴 하지만……! 나도 엄청 패 주고 싶긴 하지만……!”

    “탑주님! 무도회에서 한 번 뵌 그 미소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역시 절 사랑하시는 거죠? 저도 사랑합니다!”

    “태양제 때 화염구 쏘실 때부터 반했습니다! 제 심장도 태워 주세요! 마녀처럼 뺨도 때려 주세요!”

    그녀의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미친 데다 변태들 아냐?’

    헬릭스를 말리던 레아의 손에 점점 힘이 빠져 갔다.

    꼭 말려야 할까?

    그냥 이김에 다 날려 버리면 안 될까?

    확 바람마법으로 날려서 이 페이릴리 사생팬들을 오켄 제국 쪽으로 날려 버리면, 쓰레기도 치우고 원한도 갚고. 일석이조 아닐까?

    점점 그녀의 눈빛이 위험해질 때였다.

    “마탑주님!”

    듣기 싫은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저를 한 번만 봐주세요! 안 봐주시면 콱 죽어 버릴 겁니다!”

    옆에서 헬릭스가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거 더포드 남작 아닌가?”

    “……응.”

    두 연인의 인내심이 동시에 뚝 끊어졌다.

    ❀ ❀ ❀

    “으아악!”

    더포드 남작의 투실한 몸이 회오리에 휩쓸려 떠올랐다.

    “우웨엑!”

    멀미로 헛구역질을 해 대며 마탑 꼭대기까지 치솟았던 그의 눈이 레아와 마주쳤다.

    “마탑주님……!”

    놈이 반색하는 것과 동시에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저었다.

    사형을 명하는 것 같은 단호한 손짓과 함께 남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쪽으로 떨어진다!”

    “피해!”

    공포에 질린 사생팬들이 흩어졌다. 사랑이고 뭐고 죽을 것 같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그들을 달리게 만들었다.

    바닥에 그대로 철퍽 떨어지려는 더포드 남작을 잡아챈 건 키가 큰 은발의 남자였다.

    “……드디어 이 면상을 가까이서 보는군.”

    헬릭스의 낮은 목소리에 남작은 오금이 저렸다.

    “사, 살려 주십쇼! 살려 주세요!”

    헬릭스는 무시하며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남작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퍼억!

    크고 단단한 손이 놈의 따귀를 갈겼다.

    “커억!”

    사람 손이 아니라 무쇠솥 뚜껑에 처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남작의 눈이 반쯤 뒤집혔다.

    “이건 처음 레아에게 드래곤 마나를 먹인 값이다.”

    헬릭스가 놈의 반대쪽 얼굴을 갈겼다.

    “크엑! 컥!”

    “이건 레아에게 암살자를 보낸 대가다.”

    그가 손을 놓자 더포드 남작은 부서진 나무통처럼 바닥을 굴렀다. 감싸 쥔 얼굴 사이로 이가 우수수 떨어졌다.

    헬릭스가 딱딱하고 서늘한 표정으로 놈을 내려다보았다.

    “……마탑주에게 독을 두 번이나 먹인 것치곤 너무 싼 대가가 아닌가.”

    히익. 남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놈이 울컥 피와 이를 뱉어 내며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사뿐히 헬릭스 옆으로 날아와 착지한 레아가 그의 팔을 잡았다.

    “잘했어, 헬릭스.”

    그녀가 남작을 차갑게 보며 말했다.

    “적어도 저 입으로 다신 내 이름은 부르지 못하겠지.”

    합죽이가 된 더포드 남작이 바들바들 떨었다.

    이제 그는 평생 멀건 스프만 먹고 살아야 할 처지였다.

    레아는 조용해진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법은 만능도, 기적도 아니라는 게 새삼 실감났다.

    헬릭스는 분명 사랑의 정령에게 ‘사람들이 마법사들을 좋아하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마법사 아이들에게 닭꼬치를 주고, 이자들은 제멋대로 마음을 강요하며 미친 것처럼 굴었다.

    결국 마법으로 이끌어 낸 감정은 단초일 뿐.

    그 감정에 휘둘려 무슨 짓을 했는지가 본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 역시 쓰레기는 치울 때가 됐어.”

    레아가 손을 들어 올렸다.

    큰 마법의 전조를 느낀 바람이 그녀를 감싸기 시작했다. 온몸을 채우는 폭풍의 힘을 느끼며, 레아가 시동어를 외쳤다.

    “토네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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