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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117)화 (117/120)
  • 외전 7화

    투닥거리면서도 둘은 계속 시장을 돌며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북적북적. 거리엔 해가 긴 여름 저녁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물 탄 포도주를 파는 작은 술집들은 가게 앞으로 길게 차양을 내렸다. 맥주를 파는 술집들은 가게 밖으로 빈 술통들을 굴려 테이블처럼 늘어놓았다.

    “헬릭스, 저기 봐. 저긴 서서 마시나 보네.”

    “한잔하고 가겠나?”

    “찬성. 무조건 찬성.”

    레아와 헬릭스는 맥주집 앞에 놓인 술통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종업원이 곧 차가운 맥주를 내왔다.

    꿀꺽. 레아가 홀린 듯이 맥주잔에 손을 뻗었다.

    “크으, 시원하다.”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켠 그녀가 술꾼처럼 감탄했다. 그 와중에 입가엔 맥주 거품을 묻힌 채였다.

    맞은편의 그가 웃으며 혀를 찼다.

    “털털하든지 허술하든지 하나만 해라.”

    “난 둘 다 해도 예쁘니까 괜찮아.”

    헬릭스가 고개를 저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말 하면 안 된다. 욕먹는다.”

    “헬릭스는 욕 안 하잖아. 속으로는 맞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 다 알아.”

    “……티가 나나?”

    레아가 눈가를 가리켰다.

    “다 나지롱. 눈에 쓰여 있어.”

    “뭐라고 쓰여 있나?”

    “레아 피어트한테 콩깍지가 씌었다고 쓰여 있는데?”

    “하하.”

    그가 못 말리겠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었다. 한 점 구김 없는 미소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헬릭스가 저렇게도 웃는 줄 아는구나.

    늘 조금은 냉정하고 자제하고 있던 얼굴이 풀어지니 근사하고 풋풋한 청년 같았다. 입고 있는 축제 의상 때문에 더 그래 보였다.

    “……진짜 잘생겼어.”

    무심코 튀어 나간 진심에 레아의 볼이 확 달아올랐다. 웃고 있던 헬릭스도 순간 굳었다.

    꿀꺽.

    누가 냈는지 모를 소리가 둘 사이를 울렸다.

    탁. 타닥.

    긴 손가락이 나무 술통 테이블을 소리 내어 가로질렀다. 살짝 젖은 차가운 손이, 맥주잔을 쥔 레아의 손을 잡았다.

    찬 맥주잔을 쥔 손이 차갑고, 그 손을 덮은 헬릭스의 큰 손도 차가웠다.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여름의 공기가 바람이 되어 얇은 블라우스와 치마를 펄럭이게 했다.

    그런데 왜 등에선 살짝 땀이 나는 걸까.

    얼굴은, 목은 왜 이렇게 뜨거운 걸까.

    “너도 진짜 예쁘다.”

    “예엠병!”

    헬릭스의 달콤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옆 테이블에서 쾅 소리가 났다.

    “세상이 왜 이러냐?”

    “술맛 떨어진다! 주인장, 맥주 더 가져오쇼! 확 취해 버리게!”

    ❀ ❀ ❀

    “헬칸이 확실히 어수선한 분위기이긴 하더라.”

    여름밤.

    맥주를 한 잔씩 마시고, 서로의 손을 잡고 마탑으로 돌아오는 길.

    마탑 관리소에서 쌍둥이 탑까지 이어지는 오솔길은 길가에 박아 둔 야광석으로 밤에도 어스름히 빛났다.

    시원한 밤바람이 불고, 어디선가 밤새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둘만 독차지하고 걷는 이 길이 점점 짧아지는 게 아쉬웠다. 레아는 헬릭스와 잡은 손을 천천히 흔들며 걸었다.

    “아까 그 술 취한 사람들 얘기 들었어? 마법의 탑은 북부를 어지럽힐 뿐이라고, 왜 하필 여기에 지었는지 모르겠다고 엄청 불만스러워하던데.”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았다.”

    헬릭스가 조곤조곤 말했다.

    “이제까지 북부에 영주도 없었으니, 마탑이 북부를 관리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더군.”

    “하긴 외지 사람들이 전혀 안 오던 곳에 상단 사람들도 드나들고 하니까. 시내가 전보다 활기찬 느낌이었어. 가게들도 깔끔해지고.”

    “그래 보였다.”

    “그치. 오늘 간 가게도 맥주 맛이 생각보다 괜찮던데? 나중에 같이 또 가자.”

    “…….”

    당연히 그러자고 할 줄 알았던 헬릭스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 가게 맘에 안 들어?”

    “술맛이 없었다.”

    “어? 괜찮던데?”

    “술 마시는 놈들이 레아 너를 너무 쳐다보지 않나.”

    착 가라앉은 목소리와 달리 눈은 이글대고 있었다. 레아가 헬릭스의 팔을 살살 더듬어 올라가 팔짱을 끼었다.

    “어차피 아무도 나한테 말도 못 붙일걸? 헬릭스가 너무 멋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닳는 것 같다.”

    “안 닳아.”

    그녀가 그의 팔에 더 밀착하며 올려다봤다.

    “그런 놈들이 아무리 쳐다봐도 헬릭스가 나 한번 쳐다보면 뽀송뽀송해지는걸.”

    헬릭스의 눈빛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질투심으로 질척거렸던 마음이 레아의 말에 같이 보송보송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가 그녀의 머릿수건 밑으로 손을 넣었다. 가느다란 목과 작은 뒤통수를 소중히 잡고 제게로 끌어당겼다.

    “아무래도 나한테는 레아 네가 대대대대마법사인 모양이다.”

    헬릭스가 한숨처럼 속삭였다.

    “네 말 한마디면 세상이 달라지니.”

    “나한테도 헬릭스는 엄청난 수호자인걸.”

    레아가 그의 품에 파고들며 대꾸했다.

    “헬릭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기운이 치솟았다 쏙 빠졌다 하니까.”

    “내가 요즘 레아 네 기운을 빠지게 할 일이……. 아.”

    의아해하던 헬릭스가 깨달은 듯 말을 멈췄다.

    잠깐 침묵하던 그가 낮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오늘은 나쁜 수호자가 되어도 될 것 같다.”

    “어?”

    헬릭스는 끌어안고 있던 그녀를 덥석 들어 올렸다.

    “내일 바쁜 일정도 없으니, 오늘 밤 정도는 기운이 빠져도 되지 않겠나.”

    “어제도 나쁜 수호자였잖아! 그제도!”

    갑자기 공주님처럼 안긴 레아가 바동거렸지만 그는 굳건했다.

    “수호자가 대마법사를 상대하는 데 늘 자비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게 어딨어!”

    ❀ ❀ ❀

    한편 아즈라의 보물 창고 안.

    보물의 산들 사이에서 유독 반짝이는 물건이 있었다.

    붉은 루비 목걸이였다.

    “후아아…….”

    목걸이가 빛을 뿜고, 붉은 눈의 작은 정령이 튀어나와 입을 벌렸다. 지루한 듯 크게 하품한 목걸이의 정령이 주위를 둘러보며 귀를 쫑긋거렸다.

    “왜 안 오지?”

    오랜만에 깨어난 정령은 눈을 반짝거리며 자신을 깨운 남녀가 다가오길 기다렸지만, 그들은 빛나는 목걸이도 정령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날 못 봤나?”

    정령이 자문자답하며 고개를 까닥였다.

    “하긴, 못 봤겠지. 서로 둘만 쳐다보면서 이 보물들도 있는 둥 마는 둥 신경도 안 쓰던데.”

    그렇게 불타는 연인에게 보물 창고 구석에서 빛나는 루비 목걸이 정도가 눈에 띌 리 없었다. 정령은 아쉬워서 보물 창고 안을 빙빙 돌았다.

    “날 깨울 정도로 서로 사랑하는 연인은 많지 않은데 말이야.”

    그들이 서로 사랑을 뿜뿜 뿜어 대는 바람에 사랑의 정령인 자신도 오랜만에 목걸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정령이 중얼거렸다.

    “만나서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데.”

    오래전 대마법사 안데르가 만들어 낸 사랑의 정령.

    그는 평소엔 목걸이에 잠들어 있다가 진짜 사랑하는 연인의 사랑으로 깨어나,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면 다시 목걸이로 돌아갔다.

    단, 정령이 이뤄 줄 수 있는 소원은 사랑 한정이었다.

    ‘이 사람이 평생 나만 사랑하게 해 주세요.’

    ‘마음이 변치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보다 저 사람이 날 조금 더 사랑했으면…….’

    정령은 연인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게 좋았다.

    사랑에 불안해하고 떨면서도, 연인들은 상대의 반응에 마음 졸이고 천국과 지옥을 오가곤 했다. 그 모습을 보면 ‘에그 인간들은 저게 뭐라고 저러나’ 싶으면서도 제 가슴까지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맛에 사랑의 정령 노릇 하지. 암.”

    아니면 목걸이에 갇힌 정령 신세에 무슨 낙이 있었겠나. 잠시 한숨을 뱉은 사랑의 정령이 곧 고개를 흔들며 푸르르 날아올랐다.

    붉은 눈이 반짝였다.

    “이번 연인은 무슨 소원이 있는지 확인해 볼까?”

    ❀ ❀ ❀

    헬칸을 돌아보고 온 다음날, 레아는 딜런 경에게 북부 시골의 여론을 보고 받았다.

    시골의 분위기도 헬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탑이란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생기리란 기대감 반, 반대로 북부를 어지럽힐 뿐이라며 불만스러워하는 이들 반.

    레아가 시무룩해서 한숨을 쉬었다.

    “진짜 마법사나 마탑에 호의적인 사람이 별로 없네.”

    헬릭스가 다독였다.

    “반 정도면 많은 것 아닌가?”

    “그 반도 뭔가 이득을 바라는 거지, 마법사 자체를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

    “레아, 그 정도는 자연스러운 일 같다. 사람들은 아직 마법과 마법사를 겪어 본 적도 없지 않은가.”

    “헬릭스 말이 맞아.”

    그녀가 울적해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레아는 이런저런 생각을 내놓았다.

    “헬칸에 저렴하게 아이스크림 가게를 내 볼까?”

    “먹을 걸로 환심 사는 건 레아 네게 맞춘 생각이 아닌가.”

    “아니거든? 먹을 거는 대개 잘 통하거든? 헬릭스도 내가 쿠키 주면서 꼬셨잖아.”

    “아니다.”

    그가 정정했다.

    “구해 주고 웃고 칭찬하고 좋은 말만 해 주면서 꼬셨잖나.”

    “……그러고 보니 그랬네?”

    레아가 헤헤 웃으며 헬릭스에게 눈웃음쳤다.

    “넘어올 만했다, 그치.”

    “누가 안 넘어가겠나.”

    그가 그녀의 코를 살짝 잡으며 웃었다.

    회색 눈이 빛을 받아 은색으로 반짝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더없이 다정한 시선에 레아의 귀가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도 헬릭스의 뺨을 꾹 찌르며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나한테 퐁당 빠졌구나?”

    “잠수 중이다. 평생 안 나갈 거다.”

    레아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현명한 판단이야. 난 잡은 물고기한테 더 잘하자는 주의거든.”

    “그거야말로 정말 현명한 말이군.”

    그는 미소 지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레아가 사람에게 늘 최선을 다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좋지만…….’

    가끔은 다른 이들에게 신경 쓰느라 정신이 팔린 레아가 멀게 느껴졌다. 이렇게 마법사들이나, 북부 사람들에 대해 고민하다 지쳐 잠든 모습을 볼 때면.

    “레아.”

    헬릭스는 그녀의 옆에 비스듬히 누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잠이 오지 않았다.

    “……네가 왜 이렇게 애쓰는지 모르겠다.”

    이제 막 생긴 마탑이었다.

    다시 마법사가 나타난 것도, 드래곤 종족이 부활한 것도, 마탑이 세워진 것도 전부 1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그는 북부 사람들이 경계하며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제껏 하던 대로 천천히 해 나가면 될 것을, 뭐가 그리 급한가.”

    헬릭스가 긴 손가락에 감기는 백금발을 쓸어내렸다.

    몸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마음을 읽을 수 없어 속이 탔다.

    “북부를 발전시키고 싶은 건가?”

    그는 몇백 년 전의 시장과 별다를 게 없던 헬칸의 초라한 시장을 떠올렸다.

    “아니면 마탑 생활이 너무 외로워서, 일에라도 몰두하고 싶은 건가?”

    지금이야 마탑에서 헬릭스와 놀고 있지만, 레아는 화려한 수도의 사교계에서 페이릴리라 불리며 잘나가던 사람이었다.

    척박한 북부, 가족도 멀리 있고 티 파티를 할 또래 귀족 여자도 하나 없는 헬칸이 갑갑할지도 몰랐다.

    헬릭스는 착잡하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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