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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미모로 정의 구현 (116)화 (116/120)
  • 외전 6화

    한가로운 오후.

    레아는 나무 그늘에 매달린 해먹에 누워 잠깐 졸았다.

    여름의 뜨거운 햇볕은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부드러운 빛이 되어 떨어졌고, 바람은 적당히 기분 좋게 불었다. 해먹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사이로 멀리서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 한 입만 더 먹는다고 했잖아. 숟가락 이리 내.”

    “너무 좋아하는데 좀 더 먹어도 괜찮잖니?”

    “아냐, 언니. 이거 차가워서 많이 먹으면 배 아프더라. 조는 어리니까 더 조심해야지.”

    루이지가 조를 데리고 왔나 보네.

    그녀는 잠에 반쯤 취한 채로 생각했다. 자넷이 아이스크림이 너무 맛있다며 루이지랑 조를 초대해서 맛보여도 되냐고 물었던 기억이 났다.

    ‘오늘 오기로 했었나 봐.’

    어쩐지 아침부터 자넷의 얼굴이 들떠 있더라니. 피식 웃은 레아가 리케일을 떠올렸다.

    ‘큰오빠도 찬 거 좋아하는데.’

    단건 별로 안 좋아하니까 아이스크림은 별로려나?

    ‘수도에 아이스크림 가게를 내기로 했으니까, 큰오빠도 맛은 보겠지. 좋다고 하면 공작저로 기계랑 레서피도 보내야겠다.’

    잠이 조금씩 깨기 시작해서, 그녀는 누운 채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나뭇잎들이 드리우는 녹빛 그늘 사이로 비치는 빛줄기가 하나, 둘. 세 번째 빛줄기를 세려는데 그 아래 은발이 나타났다. 빛을 받은 긴 머리칼이 하얗게 빛났다.

    레아가 눈을 둥글게 접었다.

    “헬릭스.”

    누운 채 손을 뻗는 그녀를 향해 그가 다가왔다. 큰 손이 이마를 다정하게 쓸었다.

    “잘 잤나.”

    “응.”

    나른하게 대답하던 레아가 헬릭스의 팔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있잖아, 헬릭스.”

    그녀가 물었다.

    “헬릭스는 맛있는 거 가져다주고 싶은 사람 없어?”

    “내 앞에 있지 않나.”

    레아는 절로 배시시 웃었다.

    “그럼, 나 말고는?”

    “없다.”

    얼음칼로 싹둑 자른 것처럼 단호한 한 마디였다.

    “음……. 하긴 헬릭스는 그럴 만하지. 오래 갇혀 있었잖아.”

    “갇히기 전에도 너한테처럼 맛있는 것만 보면 먹여야겠다 싶은 사람은 없었다.”

    무뚝뚝한 말인데 가슴이 설렜다. 그녀가 칭찬하듯 헬릭스의 팔을 두드렸다.

    “앞으로도 부탁해요. 맛있는 거 보면 내 생각 먼저 하기. 약속.”

    “약속이다.”

    “나한텐 헬릭스 먼저 챙길 거냐고 안 물어봐?”

    “내가 챙겨 먹으면 되는데 무슨 걱정인가.”

    레아가 새삼 감격해서 그를 올려다봤다.

    “누구 애인이 이렇게 듬직하지?”

    “누구겠나.”

    헬릭스가 가볍게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나?”

    “아, 그게……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서.”

    레아는 자넷이 아이스크림을 먹이려고 루이지와 조를 초대했다는 얘기를 했다.

    “생각해 보니까 나도 우리 가족한테 먼저 먹였어야 했던 건가 싶었거든.”

    “레아 너와 자넷 경우는 다르지. 수도와 여기는 거리가 멀지 않나.”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피어트 공작저가 맛있는 음식이 부족한 곳도 아니니, 네가 거기까진 생각 못 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응. 듣고 보니 그런 거 같아.”

    그녀가 좀 편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근데 난 그렇다 쳐도, 우리 마법사들 말이야. 마탑 밖에 있는 사람한테 아이스크림 먹이고 싶단 말을 한 명도 안 했단 말이지? 이상해.”

    “…….”

    헬릭스가 약간 애매한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레아가 계속 말했다.

    “특히 마법학교 애들 말이야, 아직 어리잖아. 노예상한테 팔리긴 했지만 가족 형제들이 그리울 텐데. 생각해 보니까 그런 말을 전혀 안 했어.”

    “……만나고 싶으면 벌써 만났을 거다.”

    짐작되는 게 있는 말투였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혹시 나 몰래 이미 가족 만나고 온 뒤에 숨기고 있는 걸까?”

    “몰래 갔건, 레아 네게 이야기하고 허락을 맡았건.”

    그가 이어 말했다.

    “좋은 기억이었다면 애들답게 자랑을 했겠지. 아이스크림 나눠 주게 마탑에 초대해도 되느냐는 말도 했을 테고.”

    “…….”

    “레아.”

    헬릭스가 웃어 보였다. 씁쓸한 미소였다.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하나? 마법사들은 성격이 비뚤어진 경우가 많았다고.”

    “기억하지. 어릴 때부터 귀신 들렸다, 저주받았다, 괴롭힘을 당하고 차별받은 일이 많아서 그랬다고 했잖아.”

    레아가 숨을 크게 쉬었다.

    “그렇지만 그건 마법이 알려진 옛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지금이 더할 수도 있다. 마법사가 어떤 존재인지 짐작도 못 할 테니.”

    그의 말에 그녀의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속이 팍 상했다.

    일리 있는 말이었기 때문에 더 화가 나고 기분이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과 다른 것에 한없이 잔인해지곤 했으니까.

    마법학교 아이들의 상처가 얼마나 깊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걔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녀가 중얼거렸다.

    움막 안에 쓰러져 있던 작은 몸뚱이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어린데, 부모 손에 몇 푼 받고 팔린 아이들이었다. 인체실험의 제물이 되어 그대로 죽을 뻔한 운명이었다.

    “이게 뭐야? 힘없는 어린애라고 맘대로 팔고 죽이려 들더니, 이젠 힘이 있는데 그게 자신들이 모르는 힘이라고 배척하는 거야? 진짜 자기들 멋대로 아냐?”

    레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안 그래, 헬릭스? 우리가 좀 도와주긴 했지만, 걔들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서 살아나고 마법사까지 됐는데! 칭찬은 퍼부어 주지 못할망정!”

    파란 눈이 파직파직 빛이라도 뿜을 기세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헬릭스의 목울대가 꿀꺽 울렸다.

    레아는 알까?

    그녀가 이렇게 분노할 때면 홀릴 것처럼 빛난다는 것을.

    제 모든 것을 바치고 싶을 만큼 환하게 타오른다는 것을.

    “헬릭스, 우리 한번 확인해 보자.”

    “뭘 말인가?”

    레아가 말했다.

    “헬칸이랑 애들 고향 사람들이, 마법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좀 알아봐야겠어.”

    ❀ ❀ ❀

    둘은 변장을 하고 헬칸 시내부터 돌아보기로 했다.

    “마법사 애들 고향 마을은 딜런 경이 알아봐 주기로 했어.”

    “좋은 판단이다. 드나드는 사람이 적은 시골 마을이니 그쪽이 나을 것 같군.”

    소곤대는 두 사람을 사람들이 흘깃거리며 지나갔다.

    “이 계절에 웬 망토람?”

    “마탑 사람들 아냐? 하여간 수상하다니까.”

    “…….”

    헬릭스와 레아는 머쓱해져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 다 가을에 돌아다니던 생각만 하고 너무 허술하게 변장한 모양이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일단 옷부터 새로 사자.”

    “옷을?”

    헬릭스는 레아를 이끌고 시장으로 들어섰다.

    저녁에 가까워지며 해가 늘어지는 시각이었다. 더위를 피해 물건을 사고 구경하려는 이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멍하게 가게를 지키고 있던 상인들도 바지런하게 상품을 늘어놓았다.

    헬릭스는 익숙하게 그런 가게들을 헤집고 목적지를 찾아냈다.

    그녀가 살짝 놀라 물었다.

    “여기 와 봤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잘 찾아?”

    “작은 도시의 시장이란 거의 다 비슷하니까. 레아, 저기 저 옷은 어떤가? 네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축제용 여름옷이 걸려 있었다. 시골의 평민 아가씨들이 축제 때 입는 외출복이었다.

    레아는 그가 골라 준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어때?”

    하얀 블라우스에 파란 치마, 검은색 조끼를 갖춰 입고 머리를 한 갈래로 땋아 내려 파란 머릿수건까지 쓴 모습이 풋풋했다. 헬릭스의 얼굴이 환해졌다가 곧 근심이 어렸다.

    “……너무 예뻐서 눈에 띄는 거 같은데.”

    “남 말 할 때가 아니거든요?”

    그녀가 역시 청년들의 축제 의상으로 갈아입은 그를 쿡 찔렀다.

    눈에 띄는 긴 은발은 모자 속으로 감췄지만, 체격과 얼굴은 평범한 하얀 셔츠와 조끼 차림으로도 감출 수 없었다.

    가게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이 너무 선남선녀시라 눈길 받는 건 어쩔 수 없겠어요.”

    “우리 애인이 너무 예쁘긴 하지.”

    “호호. 자랑하실 만하네요.”

    레아는 넉살 좋게 말하는 헬릭스를 딴사람 보듯 쳐다보았다.

    누구세요?

    그는 그녀의 눈초리에도 까딱하지 않고 가게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애인 손에 들릴 가방도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뭐가 제일 잘 나가나?”

    “마침 또 입으신 옷이랑 딱 맞는 가방이 있지요. 이거 어떠세요? 여기 파란색 실로 물망초꽃 수를 놓아서…….”

    물꼬를 튼 헬릭스는 거침이 없었다.

    장사가 잘되느냐, 손님들 분위기는 어떠냐, 외지인들이 드나든다고 뭐라 하는 소리는 없느냐.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지며 정보를 끌어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어? 어어?”

    레아는 옆에서 벌어진 입을 다무느라 바빴다.

    결국 신발과 머플러와 양말까지 사 들고 나온 그들이었다. 그녀가 보퉁이를 든 그를 보고 입을 뻐끔댔다.

    “와…… 와…….”

    “왜 그러나. 너무 많이 샀나?”

    “아니, 이 정도 물건 사면서 들을 얘긴 다 들었으니까 남는 장사지. 그건 잘했는데, 와…….”

    레아가 헬릭스를 올려다봤다.

    “이 유능한 수사관은 누구시죠?”

    그녀의 감탄에 그가 픽 웃었다. 덤덤한 얼굴이었다.

    “이런 유의 수사는 많이 해 봤다.”

    “진짜? 미친 대마법사랑 드래곤들 잡으러 다닌 거 아니었어?”

    “보통 사람인 척 숨은 경우도 꽤 많아서.”

    세상에. 헬릭스에 대해 이제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반전은 또 생각 못 했다. 고개를 젓던 레아가 불쑥 물었다.

    “이렇게 뛰어난 수사관이 비밀클럽에선 왜 그렇게 헤맸던 거야?”

    “……그렇게들 밤놀이를 하는 줄은 몰랐다.”

    그때 일이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헬릭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미, 미안.”

    그녀는 말을 꺼냈던 게 미안해져서 웅얼거렸다.

    “나중에 또 수사할 일 있더라도 그런 덴 절대 보내지 말아야겠다.”

    “보내지 말아야겠다니, 무슨 소린가.”

    그가 정색했다.

    “당연히 레아 너도 가지 말아야지.”

    “난 가도 괜찮지 않을…….”

    별생각 없이 장난스럽게 말하던 레아가 헬릭스의 눈빛을 보고 흠칫했다.

    “아니야, 안 가. 절대 안 가.”

    “…….”

    “그 미심쩍은 눈빛은 뭔데? 진짜 안 간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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