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드디어 첫 정화 작업이 마무리되고 헬릭스와 해츨링들이 돌아왔다.
“헬릭스!”
“레아!”
백 년 만의 재회인 양 애절하게 서로 끌어안는 둘을 보고 쿠앙이와 다른 해츨링들이 흐린 눈을 했다.
“쿠옹.”
“삐이비.”
‘은색 인간, 캠프가 자리 잡히자마자 레아 보고 싶다고 밤새 달려갔다 오고 그러지 않았나.’
‘갈 때마다 꽃도 꺾어 갔다. 내가 봤다.’
해츨링들이 뒤에서 수군수군 흉보든 말든 두 연인은 기쁨을 만끽했다.
“레아, 이번엔 급히 돌아오느라 이것밖에 준비하지 못했다.”
헬릭스가 풍성한 야생화 꽃다발을 내밀었다. 제 품에 한아름 차는 꽃다발에 레아가 흐드러지게 핀 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너무 예뻐.”
이름 모를 보라색 자잘한 꽃들과 은방울꽃들이 생기와 향기를 뿜어냈다. 새벽에 꺾었는지 아직도 이슬이 맺혀 있고 풋내가 났다.
어스름한 새벽, 그녀에게 주려고 꽃을 한 송이 한 송이 꺾고 있었을 그를 생각하자 가슴이 부풀었다. 레아가 설레하며 꽃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헬릭스는 그런 그녀를 꽃다발과 함께 덥석 끌어안았다.
그가 속삭였다.
“늘 말하지만, 네가 더 예쁘다.”
‘저흰 이제 가 볼게요.’
해츨링들은 강제로 학습된 눈치로 슬슬 물러났다. 아무래도 마탑에 돌아온 해후는 다른 마법사들과 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레아와 헬릭스는 손을 꼭 잡고 오랜만에 함께 펜트하우스로 올라갔다.
야외 정원의 녹음은 그사이 훨씬 더 짙어져 있었고, 차가운 물로 가득 찬 풀장 옆에는 널찍한 선 베드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 준비된 음식을 본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레아, 요즘 많이 덥나? 음식이 찬 음식뿐이다.”
새우와 푸실리 면을 바질페스토로 비빈 냉 파스타, 피스타치오와 크랜베리 등을 넣은 차가운 편육 요리, 치즈와 올리브와 햄과 맥주와 과일셔벗까지 모조리 찬 음식들이었다.
레아가 머쓱하게 웃었다.
“요즘 화염마나를 안 썼더니 자꾸 열이 끓어올라서.”
“어디.”
헬릭스가 큰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뺨과 귀 뒤, 목까지 확인하듯 만져 본 그가 안심한 듯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큰일은 아닌 것 같다.”
“응. 좀 덥긴 한데 그뿐이야.”
화염마법을 늘 쓸 순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벌써 한여름인걸. 풀장에서 몸을 식히다 보면 여름도 갈 테니까 괜찮아.”
“북쪽으로 넘어가면 훨씬 덜 덥다. 햇볕은 따가워도 그늘 밑에 들어가면 금세 시원해지고.”
“와, 좋겠다. 가 보고 싶어.”
“오염이 조금 더 제거되면 같이 가자.”
헬릭스는 다정하게 말하며 손으로 레아의 뺨을 쓸었다. 어쩐지 그의 손이 조금 전보다 차가웠다.
“그리고 레아 너는 날 좀 더 이용할 필요가 있다.”
“응?”
그의 손에 절로 얼굴을 기대고 있던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나를 다루는 애인이 돌아왔는데, 풀장만 쓸 필요가 뭐가 있나.”
헬릭스가 유리그릇을 들어 올리더니 과일셔벗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의 목울대가 꿀꺽 울리며, 얼굴이 순식간에 레아에게 가까워졌다.
“아.”
“아……?”
차가운 입술이 그녀의 입을 벌리고 열을 가져갔다.
입 안에 감도는 과일의 맛도, 습격하듯 쏟아지는 냉기도, 예상 못 했던 것이었다. 차가운 입술과 숨결에 놀란 레아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그가 더 빨랐다.
셔벗 그릇을 잡았던 단단한 손이 그녀를 붙들었다. 입과 손 양쪽에서 얼음처럼 찬 기운이 느껴지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느리게 키스하며 레아의 입속을 샅샅이 훑은 헬릭스가 입술을 떼었다.
“이 정도면 되겠나?”
입 안이 얼어붙은 것처럼 얼얼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숨을 들이켜고 눈만 깜박이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가 다시 과일셔벗을 베어 물었다. 더 차가워진 숨결이 레아를 삼켰다.
은근한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이 정도?”
그녀가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들었다. 사락대는 얇은 재질의 옷감이 손끝에서 구겨졌다.
“더…….”
조르는 음성에 헬릭스가 낮게 웃었다. 그가 셔벗이 든 유리그릇을 그대로 제 입을 향해 기울였다.
“아, 차가워…….”
유리그릇을 타고 떨어진 셔벗 조각이 레아의 가슴으로 떨어졌다. 헬릭스가 아깝다는 얼굴로 입술을 벌려 조각을 삼켰다. 차가운 입술이 피부에 닿았다 떨어지자 또 소름이 돋았다.
움찔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그가 제 입술을 다시 내리눌렀다.
이상한 키스였다.
입술이 얼어붙고, 혀가 굳고, 입천장이 마비되다가…… 어느 순간 온기가 돌며 감각이 깨어나고, 뜨거운 숨이 엉키다 보면 또다시 차가운 마나가 건너왔다.
미열에 시달리던 레아의 몸이 저도 모르게 헬릭스에게 매달려 엉겨 붙었다. 그녀가 달뜬 얼굴로 중얼거렸다.
“헬릭스 혀가 아이스크림 같아…….”
“아이스크림?”
되묻는 목소리는 조금도 아이스크림 같지 않았다. 바싹 마르고, 뜨거웠다.
“아이스크림이, 뭐냐면……. 앗!”
설명은 나중에 듣겠다는 듯 그가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레아도 그에게 집중하며 눈을 감았다.
차갑고 부드럽게 녹는 저만의 아이스크림이 앞에 있었으니까.
❀ ❀ ❀
가끔 듣는 일을 뒤로 미루긴 했지만, 헬릭스는 레아의 말을 허투루 듣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깨어나자 그는 아이스크림에 대해 물었다.
“셔벗과 비슷하게 액체를 얼린 건데, 부드럽다고?”
“응. 셔벗은 과일즙을 얼리잖아. 아이스크림은 우유랑 설탕 같은 걸 얼려서…….”
말하던 레아가 자신 없는 얼굴로 덧붙였다.
“근데 우유도 그냥 얼리면 부드럽지 않고 딱딱했던 거 같아. 뭘 해야 부드러워지더라?”
세상 심각한 표정이 되어 끙끙대던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마탑엔 냉동고를 만들어 놨으니까 되겠지. 아이스크림도 만들어 볼래.”
“그렇게 맛있나?”
“응. 엄청.”
레아가 확신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아이스크림이 있는 여름이랑, 없는 여름은, 하늘과 땅 차이야. 헬릭스를 만난 나와 안 만난 나 정도의 차이랄까나.”
이렇게까지 말하면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헬릭스도 소매를 걷어붙였다.
“나도 돕겠다.”
“진짜? 너무 열심히 해서 막 백 개씩 만들면 어쩌지?”
그녀가 들떠서 재잘댔다.
“옆에서 내가 폭주하지 않도록 말려 줘야 해?”
이렇게 귀여운데 그게 가능할 리가.
그가 속으로 고개를 젓는 사이, 레아는 종알종알 떠들었다.
“우유에 꿀을 넣어서 얼려 볼까? 아니야, 아이스크림은 역시 유지방 맛이지. 생크림이 어떨까?”
헬릭스는 신난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헬릭스, 역시 실패를 막으려면 제일 만만한 걸 넣는 게 최고겠지? 베이킹과 아이스크림 만들기를 성공시키는 마법의 아이템은 뭘까? 설탕? 과일?”
“헬릭스! 주방에서 아이스크림에 넣으라고 딸기잼을 만들어 줬어! 세상에! 너무 맛있어! 실패하면 아까워서 어떡하지?”
“생크림을 만들어야 하는데 휘핑 기계를 만들어야 하나. 아, 맞다. 내가 회오리바람마법으로 돌려 버리면 되잖아?”
이번에는 그도 듣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위험하다. 그건 나에게 맡겨라.”
헬릭스는 생크림을 저으면서, 아이스크림 만들기에 골몰한 레아를 흘깃 쳐다봤다. 코와 뺨이며 머리에 크림과 딸기잼을 묻히고 집중하는 그녀는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달달했다.
“…….”
헬릭스의 손이 느려지며 눈빛이 진득해졌다.
일에 팔린 시선을 다시 자신한테 오도록 만들고 싶은 욕구와, 좀 더 오래 이 모습을 보고 있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서로를 누르며 솟아올랐다.
‘정말 입 속에 넣고 씹고 빨아 버리고 싶군.’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귀여워서 뽀뽀를 퍼붓다가 정신 못 차리는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작아작 먹어 치우고 싶었다.
‘달콤한 맛이 나겠지.’
아이스크림이란 건 어떤 맛일까.
레아에게서 가끔 나는 향기처럼 새콤달콤하고, 톡 쏘는 여운이 있는 그런 맛일까?
아니면 레아가 좋아하는 푸딩처럼 입에 넣자마자 흐무러지는 그런 맛일까?
‘어느 쪽이든 맛있겠지.’
그녀가 저렇게 즐거워하는데 맛이 없을 리가 없었다.
레아의 열정과 헬릭스의 인내심과 팔근육이 계속 불타오르길 며칠.
“이거다!”
드디어 만들어진 딸기 아이스크림을 붙들고 그녀가 감격에 젖었다.
생크림을 만들어 우유와 딸기잼을 넣고 얼렸다가, 1시간마다 포크로 긁고 휘저어 섞어 주는 걸 반복하며 7시간이나 얼린 역작이었다.
‘처음에 포크로 긁을 때는 다 엎는 줄 알았지…….’
레아가 끙끙대는 걸 헬릭스가 빼앗아 가서 섞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실패할 뻔했다. 그녀는 기뻐하며 첫 성공작을 스푼으로 푹 떠서 내밀었다.
“헬릭스, 아.”
헬릭스가 레아가 내미는 아이스크림을 받아 물었다.
진한 우유 맛과 달콤한 딸기잼이 쫀쫀하고 부드럽게 뒤섞여 입 안에서 녹아내렸다. 그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이 마법 같은 건 뭔가?”
“그치? 굉장하지?”
❀ ❀ ❀
얼마 후, 마탑에는 아이스크림 파티가 열렸다.
이런 맛있는 걸 자신들만 먹을 수 없으니 대량 생산 하라는 레아의 지시와 레시피 덕분이었다.
마도구를 만들다 끌려와 아이스크림 기계를 만들던 연구동 마법사들.
그들은 보상으로 첫 아이스크림을 맛보고는 감격해서 바닥에 드러누웠다.
“이런 걸 먹으라고 사람한테 혀와 위장이 달려 있었구나……!”
“나 지금…… 잠시 달콤한 꿈을 꾼 것 같은데. 뭐지, 이 맛은? 왜 사라졌지?”
아이스바까지 만들어 내기 시작하자 마탑은 거의 축제 분위기였다.
특히 마법학교 아이들은 계속 아이스크림과 아이스바만 찾아 대서, 배탈이 날까 봐 하루 3개씩만 먹도록 제한해야 할 정도였다.
해츨링들도 이 매혹적인 신문물에 깊이 빠졌다.
“쿠옹…….”
“삐이…….”
쿠앙이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여름엔 반드시 마탑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겠다고, 다음 오염의 땅 정화는 꼭 다른 계절에 가겠다고 졸랐다.
“쿠앙이 네가 아직 모르는구나.”
레아가 후후 웃으며 말해 주었다.
“겨울에 따뜻한 방 안에서 아이스크림 먹는 게 또 얼마나 별민데.”
“쿠앙!”
아이스크림에 반한 건 마탑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화장품 신상품 때문에 들렀던 피어트 상단 책임자는 아이스크림을 먹더니 손을 떨었다.
“탑주님, 이건, 이건 팔아야 합니다! 반드시 팔아야 합니다아!”
“안 될걸.”
레아가 그를 진정시켰다.
“이건 냉동장치가 있어야 해서 상품화하기 힘들 거야.”
“수도에 아이스크림 가게를 내시지요! 그리고 제작하는 기계와 냉동장치를 놓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녀가 잠시 침묵했다.
‘왜 가게를 낼 생각을 못 했지?’
어느새 마법학교 이사장, 마탑의 수장, 드래곤로드 역할에 너무 익숙해진 레아였다.
뭐든 상단 규모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약품이나 화장품처럼 기성품으로 파는 것만 생각했잖아. 와, 나 진짜 이제 드디어…….’
금수저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구나!
묘하게 뿌듯하면서 기분이 이상해진 그녀였다.